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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문화재는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 50년 이상이 지난 것으로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하여 등록한 문화재이다. 우리가 지금껏 살아왔던 그 삶의 현장이 이제 역사가 된 것이 근대문화유산이다. 현재의 우리를 있게 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 근대문화유산의 자취를 찾아 나선다. 그곳에서 근대의 시간 속으로 산책하며 과거와 현재에 얽힌 이야기를 기사로 정리하여 남기고자 한다. - 기자 말
 
정동의 덕수궁 돌담길
 정동의 덕수궁 돌담길
ⓒ 박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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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덕수궁 돌담이 이어지는 정동길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유진 초이와 애신이 러브하면서 걷는 모습을 만날 것 같은 상상에 빠진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역사학을 공부하던 대학 시절에 근대적인 건축물들이 많이 있는 정동 길의 이색적인 거리 풍경을 보기 위해 다니곤 했다.

몇 십 년의 서울 생활에 그런 감성이 무디어져서인지 이제는 정동 길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런데 얼마 전 방영된 '미스터 션샤인'이란 드라마를 통해 세트이긴 하지만 당시의 풍경을 자주 보다보니 당시의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는 정동 길이 새롭게 와 닿게 되었다.

전철 시청역 옆의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출발하여 정동 거리의 근대문화유산 산책을 나섰다. 거리를 거닐다가 유진 초이와 애신을 만나 눈인사라도 나누는 즐거운 상상도 해본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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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 있는 등록문화재인 모자이크 제단화와 경운궁 양이재를 보고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가다 보면 구 대법원청사(현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배재학당 건물(현 배재학원 역사관), 신아일보 별관, 이화여고 심슨관(현 이화여고 역사관) 등의 등록문화재가 기다리고 있다. 등록문화재 외에도 근처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정동제일교회와 러시아 공사관 건물이 있다.

정동길의 끝에서 정동사거리를 건너 강북삼성병원에는 김구 선생의 유적지인 경교장이 있다. 서울특별시교육청을 지나 서울 성벽을 끼고 송월1길을 따라 가다보면 등록문화재인 홍난파 가옥도 보인다. 홍난파 가옥을 지나 길을 따라 가다 사직터널 위로 건너가면 막다른 골목에서 딜큐샤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마치게 되는 근대문화 산책의 그 흥미로운 여정을 기사로 소개해 본다.

서울 지하철 시청역 3번 출구로 나와 걸어가다 보면 전에는 골목에 숨어 있는 듯 보인 대한성공회 서울 주교좌성당이 이제는 큰길에서 바로 보인다. 성공회 교회는 '천일의 앤'으로 유명한 영국의 헨리 8세가 그의 이혼을 불허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분리하여 만들어 영국에서 시작된 개신교 교회다.

우리나라에서의 성공회 교회는 고종 27년(1890)에 1대 코프 주교가 한국 선교를 위해 인천항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성공회 교회가 한국 문화에 뿌리내리기 위해 지은 한국 건축 양식의 교회들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강화도의 유명한 한옥 성당도 대한성공회 성당이다.
 
1926년 성당 건축을 완공할 때 자금 문제로 원래 설계의 절반 크기로 축소해 지었다가 1993년 영국 렉싱톤 도서관에 원래 설계도가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설계도를 복사하여 문화재청의 증축허가를 받았다. 1994년 시작하여 1996년 나머지 부분을 70년만에 완성하였다. 사진의 세례대는 1890년 1대 코프 주교가 올 때 동료 성직자들이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1926년 성당 건축을 완공할 때 자금 문제로 원래 설계의 절반 크기로 축소해 지었다가 1993년 영국 렉싱톤 도서관에 원래 설계도가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설계도를 복사하여 문화재청의 증축허가를 받았다. 1994년 시작하여 1996년 나머지 부분을 70년만에 완성하였다. 사진의 세례대는 1890년 1대 코프 주교가 올 때 동료 성직자들이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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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3층 교회건물이다. 1922년 공사를 시작하여 1926년 완공하였는데 자금 문제로 월 설계의 절반 크기로 축소해 지어 사용하였다. 1993년 영국 렉싱톤 도서관에 원래의 설계도가 있는 것을 알게 되어 1994년 시작하여 1996년 설계도대로 70년만에 완공하게 되었다. 1978년 시도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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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인 1937년 세운 조선총독부 체신국 청사가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 아름다운 근대 건축물을 가리고 있었다. 서울시가 세종대로 일대의 역사문화특화공간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서울 국세청 남대문별관으로 사용하던 이 건물을 허물고 주변을 정리하면서 2015년부터 온전한 건물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유월민주항쟁진원지
 유월민주항쟁진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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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당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국민운동본부 주최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 발족식이 대성당에서 개최되어 6·10 국민대회가 시작된 곳이다. 이날 오후 6시 성공회성당에서는 해방 후 이날까지 42년간 분단과 독재의 역사가 끝났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42번의 종을 울렸다.

이렇게 이 성당은 한국 사회에 종교적·문화적 의미와 함께 역사적 의미를 더하는 공간이 되었다. 한옥 사제관 뜰에는 '유월민주항쟁진원지'를 새긴 표지석이 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내부 모습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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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은 벽이 두껍고 창문이 작아 실내가 어둡다고 하지만 이 성당의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어둡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건물에 비해 작은 창이기는 하지만 1층과 2층의 창으로 들어오는 한낮의 빛이 있었고 무엇보다 성당 정면의 찬란한 황금빛 모자이크 제단화의 광채가 실내의 어두움을 밀어내는 듯했기 때문이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모자이크 제단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모자이크 제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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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자이크 제단화(등록문화재 제676호(2017.2.15))는 일제강점기인 1927년 만들기 시작하여 1938년 완성하였다. 조지 잭(George Jack, 1855-1932)의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모자이크 그림이다.

전체 그림의 중앙 부분에 예수상이 있고 예수가 들고 있는 책에는 'Ego Sum Lux Mund(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 예수 상 아래에는 성모 마리아를 그렸다. 성모 마리아의 왼쪽에 성 사도 요한과 성 스테파노가 있고 오른쪽에는 성 이사야 선지자와 성 니콜라스가 있다.

이 모자이크 벽화를 비추는 조명으로 화려한 황금빛의 광채를 성당 전체로 내뿜고 있다. 어두울 수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안을 밝히는 모자이크 벽화의 황금빛이 성스러운 예배당 내부의 분위기를 성스럽게 만든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당에 들어서는 신도들이 그 성스러움에 휩싸여 저절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 숙여 기도할 것 같다.
 
경운궁 양이재
 경운궁 양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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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을 나와 건물 뒤쪽 후문으로 가는 길에 한옥 사목관 옆에 경운궁 양이재 (慶運宮 養怡齋, 등록문화재 제267호(2006.9.19.))가 있다. 대한제국 시기 경운궁을 중건할 때(1904~1906) 궁 안에 건립하였던 건물이다. 1896년 왕비가 시해된 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피해 있던 고종이 경운궁으로 거처를 정한 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제국의 정궁이 되었다.

헤이그 특사 파견을 단행한 고종이 1907년 강제 퇴위된 후 순종은 창덕궁으로 옮겨가고 고종이 머물렀던 이 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이때 궁의 정문인 대안문도 수리하여 이름을 대한문으로 바꾸었다. 서양식 석조 건물인 석조전은 1910년에 건축하였다.
 
경운궁 양이재의 아궁이
 경운궁 양이재의 아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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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덕수궁 터를 팔아 지금처럼 외국 공사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 양이재 건물도 소유권이 이전되어 영국대사관과 성공회 성당이 있는 이곳으로 1927년경 옮겨 지었다. 이 양이재 건물은 옮겨 지으면서 바닥이나 지붕, 기단 등이 일부 변형하기는 하였으나 기본 골격이 비교적 잘 유지되어 있다.

황족과 귀족들의 자제들에게 근대식 교육을 실시하는 수학원으로 사용한 건물이다. 한옥 건물인 양이재는 성당의 한옥 사목관 왼쪽에 있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한국 근대 초기에 중건한 경운궁 내부의 시설이었다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가지고 있다. 1920년 대한성공회가 건물을 매입하여 현재는 서울교구 주교의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성당 후문으로 나와 영국 대사관 앞길을 통해 덕수궁 돌담길로 접어든다. 대학 시절 연인과 함께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을 들은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근거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연인과 걷기를 꺼리는 길이기도 하였다. 다행인지 당시 필자는 부산에 있는 연인과 사귀고 있어 이 길을 걸을 기회가 없다가 결혼 후에 같이 다닌 기억이 있는데 지금까지 40년을 함께 잘 살고 있으니 속설이 연인 시절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그 진위 여부는 증명할 길이 없다.

 
정동제일교회
 정동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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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세워 133년이 넘은 정동제일교회(사적126호)가 있다. 이 교회가 보이는 로터리에서 왼쪽 언덕길을 올라가면 보이는 서울시립미술관이 구 대법원청사(등록문화재 제237호(2006.3.2.))이다.  
      
구 대법원청사
 구 대법원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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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일본이 경성재판소로 건립한 근대 건축물이다. 이 자리에는 1895년에 세워진 조선최초의 재판소인 평리원(한성재판소)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를 침탈하기 위해 만든 기반 시설이다. 당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쓴 "定礎 昭和二年十一月 朝鮮總督子爵齋藤實 齋藤實" 기록이 새겨진 정초석이 남아 있어 일본의 한국 침탈을 증거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관청 건물이 광복 후 그대로 대한민국 정부의 관련 부서의 관청건물로 많이 쓰였는데 이 건물 역시 대한민국의 대법원으로 사용하였다. 1995년 대법원을 서초동으로 옮긴 후 2002년부터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구 대법원 청사 전면 현관부의 전면과 측면의 아치문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구 대법원 청사 전면 현관부의 전면과 측면의 아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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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2002년 기간 동안에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만들기 위해 전면 현관부를 제외한 뒤쪽으로 3층의 현대식 건물을 새롭게 건축하였다. 전면 현관부에는 앞쪽으로 돌출되어 나온 3개의 아치문이  있고, 좌우 측면에도 하나씩 아치문이 나 있다. 미술관 전체 건물 중 전면 현관부만 원형대로 남아 있어 문화재청은 이 부분만 등록문화재로 등록하여 보존하고 있다.

번잡한 시청 앞에서 덕수궁 돌담길로 접어들면서 어느 숲길에 들어선 듯 아늑함을 느끼며 걷다가 구 대법원청사에서 언덕길을 내려오며 보이는 정동길은 정감이 있다. 이 거리의 이국적인 근대 건축물들을 보면 마치 근대의 어느 시간대로 소풍을 온 것 같은 생각으로 즐거운 산책을 하게 된다.

정동 교회 앞 로터리에서는 무관이었던 유진 초이를 만나러 정동극장 뒤쪽의 구 미국공사관에나 가볼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왼쪽으로 발길을 돌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향했다.

(*앞에서 언급한 등록문화재에 관한 기사는 다음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chamjun0104)에도 실립니다.


태그:#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덕수궁돌담길, #성공회서울성당, #구대법원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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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육과 문화에 관한 관심이 많다. 앞으로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통해 한국 근대문화유산과 교육 관련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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