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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신 어머니의 두 가지 소원

며칠 있으면 설날이다. 이제 함께 못하지만, 명절 때마다 나는 부모님 생각을 한다. 8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도 그립지만, 32년 전에 세상을 뜨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더하다.

한 달 전, 군에 입대한 아들 사진을 보고 눈물짓고 있는 아내 모습을 봤을 때, 더욱 그랬다. 어머니도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아버지 회갑잔치 비디오에 나온 군대 간 아들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그때 내가 '왜 우세요?' 하고 물었더니 '정권이가 보고 싶어서 운다'고 하셨다. 당시 그 남동생은 ROTC 소위로 임관해 군에 입대한 지 한 달도 안 되던 때였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10개월전의 모습, 전남대 교정
▲ 다섯째 아들 대학졸업식때 어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시기 10개월전의 모습, 전남대 교정
ⓒ 이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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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돌아가시기 1년 전, 아버지 회갑을 지낸 뒤, 동네 분들과 배를 타고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셨다. 그때 심한 배 멀미를 해서 머리가 아프다고 하신 뒤부터 서서히 치매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서울 큰형님 댁에 머물며 병원에 다니시던 어머니는 더 이상 고칠 수 없다는 의사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자꾸 약을 먹고, 병을 어떻게든 나으려고 애쓰셨다. 그래서 어느 날은 손자가 먹을 감기약을 어머니 치료약인 줄 착각하고 통째로 드셨다가 하루 종일 잠들기도 했다.

당시 31살 '노총각'이던 내가 웃으며 '엄마, 빨리 나으셔서 뭐하시게요?' 하고 물었더니, '그래야 널 에우고(결혼시키고), 내 환갑도 세지'라고 대답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두 가지 소원을 이루지 못하셨다. 그해 12월, 어머니는 57세를 일기로 돌아가셨고, 영화감독을 꿈꾸던 나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야 장가를 갔기 때문이다.

남을 울린 내 영화, 나를 울린 어머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1997년, 나는 <편지>(최진실, 박신양 주연)라는 멜로 영화로 많은 사람들을 울린 덕분에 감독으로서 한때 성공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막상 나는 평소에 눈물이 거의 없는 편이다. 사실 나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바 있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어둠속의 댄서>(2000)를 제외하고, 내 영화 <편지>를 비롯해 어떤 영화를 보고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

그렇게 냉정한 나를 여러 번 울린 유일한 대상은 어머니뿐이다. <어둠속의 댄서>를 보고 눈물 흘린 것도 결국 그 내용이 '아들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죽어간 어머니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감독인 나와 주인공인 최진실, 박신양
▲ 영화 <편지>제작 발표회 (1997년 8월)  감독인 나와 주인공인 최진실, 박신양
ⓒ 이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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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아버지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오랜만에 31년 전 내 일기를 다시 들쳐보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두 달 전, 내가 치매 걸린 어머니와 함께 지낸 3일간의 생활이 자세히 기록된 그 일기는 오랜만에 내 눈시울을 적셨다.

당시 정치적인 격동기 과정에서, 서울에 살던 나는 영화감독이 되고자 발버둥치는 시기였기에, 어머니가 계신 고향 전남 보성에 자주 가지 못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시골에서 나온 전형적인 촌놈인 내가 영화감독이 된다는 것은 평생을 농부로 사신 시골 부모님이 보기엔 가당찮은 꿈이었다. 그래서 기대감도 거의 없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서울에서 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나는, 어떻게든 감독이 되고자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아래 3일간의 일기는 그런 와중에 쓴 내용이다.

1987년 10월 4일(첫째 날) - 치매 걸린 어머니의 전화

어제 아침 일찍 시골에서 둘째형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나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수화기를 들자 어머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정국아!"
"예, 엄니!"


나도 어머니를 불렀지만, 대답은 못하시고 계속 흐느끼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시기만 하셨다. 어머니 병세가 굉장히 심해진 것 같아 여기저기 연락을 취해놓고 오늘 아침에야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조성역(전남 보성군 조성면)에 도착하니, 막내 동생 준이(18세)가 자전거를 타고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드실 소주 한 병과 어머니를 위해 빵을 좀 사가지고 동생의 자전거 뒤에 타고 고향인 대흥마을로 향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 전남 보성군 조성면 용전리 대흥 마을(최근 모습)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 이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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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서니 마침 어머니는 아버지의 부축을 받고 부엌을 나서고 계셨다. 인사를 했지만, 어머니는 거의 반응이 없이 단지 흐느끼기만 하셨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전번에 뵈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심하시진 않으셨는데...

방 안으로 부축해 들어가서 아랫목에 눕혀 드렸지만, 자꾸 일어나서 나가려고만 하셨다. 나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어른거렸다. 어머닌 날 알아보긴 하셨지만, 반가워하시는 표정을 짓지는 못하셨다. 단지 초점이 흐린 눈으로 멀뚱멀뚱 보기만 하셨고, 남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반복해서 따라할 뿐이었다. 57세가 되신 어머니는 올해 2월 남동생의 대학 졸업식에서 뵐 때만 해도 멀쩡하셨다. 그런데 별다른 사고가 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이렇게 되시다니... 건강하시던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손수 화장실을 가시긴 하셨지만, 지극히 불안한 걸음걸이로 왔다 갔다 하셨고, 과거 건강하셨을 때 했던 행동을 습관적으로 반복하시곤 하셨다. 막내 준이가 차려 준 식사를 하시다, 갑자기 일어나 밥공기를 들고 나가더니, 뜰에 있는 개에게 남은 밥을 갖다 주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부축하고 따라다녔다. 그리고 부엌에서 구정물을 버리더니, 그 찌꺼기를 닭장 쪽으로 가서 기르던 닭들에게 모이로 주기도 하셨다. 그러다가 틈 만 나면 마루를 걸레로 닦곤 하셨다. 어머니의 그런 행동은 마루가 '더러워서' 라기보다는 건강할 때의 습관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어머니를 자꾸 방에 편히 누워계시게 하려는 나의 행동은 헛수고였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셨을까? 울산으로 시집간 여동생(29세)을 들먹이더니, 마중 가야겠다며 자꾸만 밖으로 나가시려고 하셨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동네 어귀로 향해 갔다. 마을 골목을 지나는데, 평소에 친하게 지내시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안됐다는 듯 혀를 찬다.

"어디를 간다 그러까?"
"여동생이 온다고 나가 보신다 그래서요..."
"오메, 그래 잉... 쯧쯧"


어머니를 마을 어귀까지 모시고 갔다가, 다시 돌아왔으나, 어머니는 방 안에 누워 계시다가도 자꾸 여동생 이름을 부르며 나가시려고 하셨다. 그때 친척인 당숙모께서 잠깐 들르시더니 안타까워 하셨다.

아버지는 답답하신 듯 자꾸 술만 드시다가 화가 난 듯, "왜 차라리 죽지, 살아서 나까지 귀찮게 하냐?"며 소리치곤 하셨다. 아버지의 그 말이 서운했다. 하지만, 정말 어머니의 행동을 보니, 그동안 옆에서 계속 돌보신 아버지 역시 안타깝긴 했다. 아버지는 병문안 오신 당숙모에게 다른 사람들은 자주 들여다보는데, 동네 친척들은 얼굴도 안 비친다며 불평하기도 하셨다.

어머니는 끊임없이 옆에서 누가 하는 말을 반복하셨고, 마치 한두 살 어린애처럼 행동하셨다. 시골에 계속 살면서 부모님과 같이 지낸 막내 준이는 정말 참을성 있게 행동하면서 능숙하게 어머니를 대했다. 우린 마치 고집 부리는 아이를 재우려는 듯 어머니를 눕히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나는 동생이 TV 코미디 프로를 보고 있는 것에 화가나 티브이 끄라고 소리치니 껐다. 그러자 옆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는 "티브이 켜라!"고 웅얼거리듯 반복하셨다. 그때서야 나는 티브이를 보는 동생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정말 어머니에게만 신경 쓰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밤중까지 계속 어머니와 실랑이를 벌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3년 전의 모습이다
▲ 딸의 결혼식에서 함께 한 어머니와 아버지(1984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3년 전의 모습이다
ⓒ 이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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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밖으로 나가려는 어머니에게 딸한테 전화 올 테니 방에 계시라고 거짓말을 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어머니는 자꾸 정상적인 행동을 하고 싶으시지만, 머리와 몸이 안 따라 줘서 힘든 모양이었다. 한번 생각 난 게 있으면 기어이 그걸 행동으로 옮기고 마셨다.

막내 준이는, 그 모든 상황에 익숙한 듯, 자기 방으로 가지 않고 복잡한 큰 방에서 태평하게 잠을 자기도 했다. 작은 방에 가서 자면 더 편하게 잘 수 있을 텐데 어머니가 걱정 돼서 그런 것 같았다. 어리지만 참 속 깊은 동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 형수님의 전화가 왔다. 이전에 며칠간 시골에 계시다가 오늘 아침 일찍 나와 임무교대하며 서울 올라간 것인데 어머니 걱정이 되어 전화한 것 같았다. 밤늦게 어머니는 약을 드시고 주무셨다. 아버지는 옆 마룻방에서 술을 드시며 혼잣말로 뭐라고 떠들고 계셨다. 이러다가 아버지까지 병드시는 걸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정말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어머니도 그렇지만, 아버지도 불쌍하시다. 더구나 요즈음 매우 바쁜 농사철인데, 어떻게 농사일을 하시는지...

난 밤에 어머니가 몰래 빠져 나가는 걸 막기 위해 옆에 같이 누웠다. 그런데 어느새 깨어났는지, 옆에 누우신 어머니는 문득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정국아!'하고 내 이름을 부르며 펑펑 우셨다.

나도 그런 어머니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어머니를 꼭 안으면서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정말 고교 시절 이후, 눈물은 나약함의 증거라고 생각해서, 눈물 흘린 적이 드물었다. 그동안 나는 영화 공부를 하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얼마나 냉정하고 독하게 살아왔던가? 감상적인 걸 싫어해서 눈물을 흘린 적이 거의 없던 내가 병드신 어머니 앞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머니 인생이 너무 가여웠다. 5남 1녀의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평생 고생 하시며 농사일을 해오시다가 자식들이 장성하여 편할 만 해지자 병드시다니... 한참 자다가 어머니가 일어나 나가시는 걸 보고 나도 일어나 슬그머니 따라가 보았다. 어머니는 마당 건너편 화장실에 갔다 오시더니, 다시 돌아와 조용히 잠자리에 드셨다.

(*다음 편에 계속)

[남을 울린 내 영화, 나를 울린 어머니 ②] 자꾸 밖에 나가자시는 어머니... 애처로웠다
[남을 울린 내 영화, 나를 울린 어머니 ③] 어머니 생전에 한번도 못해본 말, 이제야 합니다

태그:#어머니, #편지, #일기,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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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세종대영화예술학과 교수/ 영화는 나, 우리, 사회,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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