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29 14:37최종 업데이트 19.01.29 14:37
제주에 술 만드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농업회사법인이 있어 연초부터 일주일 간격으로 제주를 두 번 찾아갔다. 그중 하루 시간을 내서 겨울 들판에 움처럼 돋아나는 제주의 술을 보았다.

제주의 양조장을 꼽아보니 얼추 20개 정도 됐다. 제주 올레 코스와 비슷한 숫자다. 제주에서 이름을 얻은 술로는 한라산 소주, 제주 생막걸리, 고소리술, 오메기술, 감귤주 등이 있다. 제주의 유명한 술들에 비해선 아직 덜 알려졌지만, 나름의 실험을 이어가고 있는 술과 술의 공간들을 찾아 길을 나섰다.

[제주바당] 제주 키위로 술을 빚다
 

제주바당에서 만든 키위증류주의 상표, 한라산을 배경으로 키위처럼 생긴 키위새가 키위주를 먹고 있단다. ⓒ 막걸리학교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술도가 '제주바당'이 있다. 제주 바다를 양조장 이름으로 끌어들였다. 프리미엄 탁주 한바당과 약주 맑은바당을 내고 있다.

임효진 대표는 제주가 고향인 남편을 따라와 제주에 살면서 술을 빚고 있다. 그냥 살아도 될 것을, 군대에서 예편한 남편은 농사를 지으면서 마을 동장 일을 맡고 있고, 그녀는 두부 전문점 '황금콩밭'을 운영하면서 양조를 하고 있다. 제주 사람이 부지런한 것인지, 제주에 가면 부지런해지는 것인지, 부지런히 살아간다.


임 대표는 곧 출시하게 될 키위 증류주와 백도라지 증류주를 따라주며, 술 만든 얘기를 풀어놓았다. 키위새가 한라산의 키위주를 맛보는 술 상표 삽화가 인상적이다. 과일 발효향이 잘 담긴 키위주를 맛보면서, 제주에서 키위가 많이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백도라지 증류주는 가수 최백호를 좋아하는 임 대표가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가사를 연상하며 만들었다고 한다.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술이 완성되면 서울로 가수를 만나러 갈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술 이름도 '제주낭만'이다. 양조장 앞으로 올레길이 지나고 있어, 여행자들이 마치 심부름하듯이 쌩쌩 지나간다.

[술의 식물원] 나무와 열매의 향이 나는 술

제주바당에서 중산간 마을로 들어간다. 용눈이오름을 지나 당오름이 있는 송당마을에는 '술의 식물원'이 있다. 술의 식물원이라니, 궁금하다. 식물원에 술이 들어 있다는 것일까, 술에 식물들이 담겨있다는 것일까?
 

술의 식물원을 운영하는 한유석 대표. <술마시고 우리가 하는 말>의 저자다. ⓒ 막걸리학교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니, 식물들이 진을 치고 있는 술 카페다. 40년 전에 지어진 제주의 평범한 집을 정갈하게 마감하고, 천장을 열어 들보와 서까래를 노출시켰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제주살이를 시작한 한유석 대표는 카페의 작은 방 하나에 소규모 주류제조장을 넣겠다고 한다.

정교한 것은 한번에 되는 게 아닌가 보다. 작은 방에 제주의 붉은 술항아리를 어떻게 들일 것인지 고민하는 한 대표의 모습은, 어젯밤 쓴 시를 다듬는 소녀 같다. 이곳에서는 계절맥주와 쇼비뇽블랑과 아와모리를 잔술로 마실 수 있고, '제주 감자와 당근으로 만든 감자사라다' 안주를 3천 원에, '상큼함과 고소함이 절묘한 제철과일과 치즈' 안주를 5천 원에 곁들일 수 있다.

한 대표가 직접 만들어 선보이게 될 술을 맛보니 구상나무향이 돌고 유자향이 돌아, 혹여 그곳이 술의 식물원인가 싶기도 했다. 한 대표는 제주에 내려오기 전에 수필집 <술 마시고 우리가 하는 말>을 펴냈다. 그 책에서 "이제야 좋은 사람에게 술 한잔 건네고 찬찬히 당신이 하는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술의 식물원 담장에 그려진 초록 우주 속의 흰 새 한 마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제주 길에 나선다. 제주의 바람이 육지의 바람과 달라서인지, 제주에 오면 육지의 삶이 기억나지 않는다. 제주의 특별함에 마음이 쓸려다닌다. 특별한 풍경을 찾고, 특별한 분위기에 접어들려고 한다.

남원읍 신흥리와 위미리의 동백나무 군락지를 맴돌았다. 동백이 진 것인지 아직 피지 않은 것인지, 동백꽃이 보이지 않는다. 제주 동백나무는 육지 것보다 훨씬 크다. 제주의 집과 부엌과 술항아리는 육지 것보다 작은데, 제주의 자연과 동백은 육지 것보다 크다.

육지에서 먹지 못했던 보말과 몸국을 먹고, 장터에서 빙떡과 마농 치킨을 바라보며 식욕을 억누르다가 쥐치조림집에 앉아 한라산 소주를 마신다. 그런데 온전하게 빠져들어가지 않는다. 잠시 머문 새로운 상념도 맵찬 바람에 튕겨나가 제 자리로 돌아온다. 화가 이중섭이 피난 내려와 살았던 1.4평 작은 방이 든 서귀포 집을 지나 다시 불빛 휘황한 네거리로 나온다.

[제주약수터] 가지각색 제주 술이 한자리에
 

서귀포에 있는 제주맥주 테이크아웃 전문점, 제주약수터. ⓒ 막걸리학교

 
술집이 하나 보인다. 제주에서 생산되는 맥주를 파는 '제주약수터'라는 테이크아웃 전문 주점이다. 주점 안에는 2인용 탁자가 3개가 놓여있고, 의자는 4개뿐이다. 숙소로 들고 가든 바닷가로 나가든 도도하게 나가드시라는 맥줏집이다.

전체 평수는 8평 정도 될까, 정면 3m, 깊이는 9m 정도 된다. 맥주 탭을 길게 세우기 위해서 바를 비스듬히 놓았다. 벽에는 수제 맥주 포스터들이 붙어있고, 정면 벽면에는 만화 영화가 움직이고 있다. 52인치 텔레비전을 세로로 세워 메뉴판으로 쓰고 있다. 그 안에 제주 맥주 양조장인 제주맥주, 맥파이, 제주지앵, 탐라에일의 제품이 모여 있다.

수제맥주의 유행이 감귤만큼이나 친숙하게 서귀포에 터를 잡고 있다. 맥주 이름도 제주위트에일, 제주펠롱에일, 올레길, 곶자왈포터 등 제주를 담고 있다. 귀엽게도 작은 냉장고에 제주바당 탁주와 약주, 제주샘주의 약주, 신례명주의 증류주가 들어있다.

술은 내 안에 숨은 흥을 일으켜 세운다. 마시면 차분해지는 차(茶)와 선명하게 다르다. 술에 취한 기분은 회오리 바람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큰 독수리가 나를 물고 날아간다. 떨어져도 전혀 다치지 않을, 무섭지 않은 기분 속으로 술은 나를 데려간다.

[주류면허지원센터] 한국 양조장의 태실
 

서귀포 주류면허지원센터 마당의 동증류기. ⓒ 막걸리학교

 
서귀포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서귀포시에 가장 새뜻한 건물인 국세청 주류면허지원센터를 찾아갔다. 원래 서울 마포에 있던 주류면허지원센터가 제주살이를 시작한 지는 벌써 5년이 됐다. 마포의 백 년 넘던 터를 너무도 허무하게 팔아버린 뒤 이곳에 내려와 살고 있다. 그때 느꼈던 아쉬운 마음 때문에 오고 싶지 않았던 곳이다.

1909년 대한제국 탁지부 소속 양조시험소로 출발, 1970년 국세청 기술연구소 이름을 바꿔 활동하다가 2010년부터 주류면허지원센터가 된 이곳은 한국 양조장의 태실이다. 옛날엔 군림했지만, 지금은 아주 나긋나긋해졌고 친절해졌다.

마당에 동증류기가 전시돼 있고, 1층에 한국 양조사를 읽을 수 있는 술병들이 전시돼 있다. 술을 마셔 주세를 많이 낸 주당들은 이곳 1층 전시실을 찾아와 주인처럼 관람하고 가도 좋다. 2층에 맛을 가늠하는 관능검사실이 있고, 3층에는 최첨단 분석 장비들이 들어찬 분석감정실이 있다.

양조 면허를 내려면 이곳에 술의 샘플과 제조 방법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그것이 주세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면허는 쉽게 내준다. 주류면허지원센터의 창밖으로 서귀포의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바다가 금빛으로 눈부시게 반짝인다. 하지만 마포 백 년 역사의 터가 포클레인에 허물어지던 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커피수목원] 커피로 술을 만들다
 

커피증류주를 만드는 양조장 커피수목원. ⓒ 막걸리학교

 
제주 차 전문가로부터 '커피수목원'이라는 양조장이 안덕면 사계리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곳에서 커피와인과 커피증류주를 낸다고 했다. 커피, 와인, 증류주가 원래 따로인데, 이것들을 한데 섞은 게 나온다고? 그제야 커피가 식물 열매이니 와인이 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커피 좋아하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상술일까, 창의적인 도전일까? 그곳에 가보기 전에는 어떤 판단도 할 수 없었다.

운 좋게 양조장 김영한 대표가 외출하러 문을 나서는 순간 양조장에 들어섰다. 잠시 선 채로 이야기를 들었다. 커피 과육에 22브릭스의 당도가 있어 커피로 발효주를 빚는다고 했다. 뒤편 하우스로 안내받아서 커피를 재배하고 동증류기로 증류하는 현장도 보았다.

김 대표는 2012년 예순네 살에 제주살이를 시작했고, 커피숍을 운영하다가 '제주도에서 커피 농사를 지어서 커피를 국산화하고 나아가서 커피 응용 제품을 수출하는 일'을 꿈으로 삼고 구현하게 됐다고 한다. 나는 커피 묘목을 보고 나서도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지, 커피로 술을 만들 필요가 있는지 수긍이 되지 않았다.

작은 교회당처럼 지은 김 대표의 양조장 창밖으로 대정향교가 보이고, 산방산이 보인다. 양조장 앞에 투명 유리로 지어진 길가 커피숍이 있다. 커피숍 안의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서너 사람이 앉을 공간이 있다. 밤이면 별을 보기 좋고, 멍 때리고 있기 좋다고 한다.

다음으로 향하는 곳은 제주의 술, 오합주를 빚는 할망이 사는 마을이다. 서울에서부터 약속하고 왔는데도 할망은 어깨가 아프다며 찾아오지 말라고 전화로 나를 떠민다. 그래도 나는 간다. 지금 아니면 그 술을 맛볼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오합주 빚는 할망의 집 문을 연다. 거실에서 할망이 무채를 썰어 양념하고, 메밀 전을 부치고 있다. "거친 메밀이 그게 소화가 되겠어요?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무채를 넣어서 먹었수다. 장터에서 파는 것은 옛날 방식과 달라." 할망은 내가 온다고 제주 전통의 빙떡을 만들고 있었다.

오합주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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