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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찬이가 가르쳐 준 것>의 표지에는 휠체어에 앉아 천진한 얼굴로 웃고 있는 마른 남자 아이가 그려져 있다. 표지에 이어진 면지에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질문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쟤가 동생이냐고, 목이 왜 저러냐고, 걷지를 못하냐고, 사람들은 의아한 얼굴로 다소 꺼림칙해 하는 표정으로 묻는다. 그들의 질문과 표정이 표지의 남자 아이를 향해 있다는 것은 짐작이 간다.
 
표지
▲ <찬이가 가르쳐 준 것> 표지
ⓒ 한울림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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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이'는 '뇌병변' 장애인이다. 뇌병변은 중추신경의 이상으로 인한 것이며 보행이나 일상 동작이 불가능하다. 때로 언어 장애가 동반되기는 하나, 대부분 지능과는 관련이 없다고 한다.

찬이의 상태에 대해 그림책은 서지도 걷지도 혼자서는 물도 마시지 못한다고 안내한다. 찬이는 도움을 받지 않으면 오줌도 가리지 못하는, 모기가 물어도 긁지도 못한다. 그림과 글을 따라가다 보면 찬이의 상태에 누구보다 괴로운 것은 찬이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혼자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지만 그런 상황을 자각한다면 때로 찾아드는 모멸감에 괴로울 것이다. 제 몸의 작은 안녕조차 도모하지 못하는 찬이. 그런 찬이를 보며 감사를 생각하는 것조차 미안하고, 미안하다는 생각조차 부끄럽기만 하다.

이어지는 건 찬이 엄마의 고단한 일상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찬이의 수족이 되어주어야 하는 엄마의 하루는 쉴 틈이 없다. 엄마와 찬이의 자잘한 일상이 두 페이지를 가득 채운다. 얼마나 고단하고 힘에 겨울지, 이어지는 페이지의 사람들이 독자의 마음을 대변한다. 걷기라도 하면, 말이라도 하면, 이 엄마는 무슨 낙이 있을까...

찬이 엄마의 대답은 단순하다. 아프지 않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존재만으로도 감사하단다. 우문현답의 적절한 예시이다. 더 바랄 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함께 있는데, 이렇게 내가 도움이 되는데, 찬이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인 것을. 찬이 엄마의 대답은 바라지도 않은 걱정과 관심이 도대체 누굴 위한 것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누구든 이런 '무례한 오지랖'은 정중히 사양할 터이다.

물론, 찬이 엄마가 아픔없이 모든 것을 감사로 감수할 수만은 없다. 그림책은 엄마의 감사 뒤에 숨은 아픔과 슬픔도 놓치지 않는다. 괜찮다지만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 괜찮기만 한 일이 어디 있으랴. 웃는 만큼 울었을 찬이 엄마의 눈물에 숙연해진다. 슬픈 얼굴에 방울진 찬이 엄마의 눈물은 그녀가 감당해야 할 아픔과 고단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눈물에도 불구하고, 찬이 엄마는 '찬이가 가르쳐 준 것'을 말한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제 손으론 아무 것도 해내지 못하는 찬이는 존재함으로 엄마에게 삶의 가치를 가르친다. 찬이 엄마는 영문도 모르고 주어진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있었다. 변화와 개선을 위한 노력들이 거의 무용한 찬이의 삶을 통해 변화하고 있었다. 이미 결론난 스토리에 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기쁨을 찾아내는 과정을 부여하고 있었다.
"찬이 때문에 엄마는,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법을 배웠어."
"찬이 때문에 엄마는,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고, 천천히 세상을 즐기는 법을 배웠어."
"그리고 찬이 덕분에 어려울 땐 가족이 큰 힘이 된다는 걸 알았지."
                                                         <찬이가 가르쳐 준 것> 중에서

눈물을 흘리는 시간들 사이사이 찬이 엄마는 찬이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삶의 고단함에 지쳐 나가 떨어지는 대신 찬이와 함께 사는 것이 주는 기쁨을 터득하고 있었다. 녹록지 않은 삶 속에서, 때로 눈물이 나는 시간 속에서 찬이 엄마는 저리 많은 것을 깨닫고 있었다. 누구보다 더 힘겨울 삶을 살고 있을 사람의 독백같은 대사는 부끄러움을 넘어서는 감동을 전해준다.

찬이 엄마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찬이가 가르쳐 준 것>은 어쩌면 눈물을 흘리며 웃는 것이 삶이라고 이야기한다. 쉽지 않지만, 편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배워가는 것이 삶이라 말한다. 힘든 것을 힘들다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삶의 몫을 힘들다만 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의미의 존재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삶 속에서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 삶의 가치는 조금쯤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어쩌면 찬이 엄마의 눈물은 어찌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자포자기의 끝에서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순응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해도 눈물뿐이지 않아 좋다. 눈물과 함께 하는 것이 하루이고 감사이고 가족이라는 단순한 명제는, 삶이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라는 반증인 것만 같다. 찬이와 찬이 엄마는 가르쳐 준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 할 것을 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느낄 것을 느끼는 것이 삶이다. 삶은 하루이자 감사이며 힘이 되어주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다.

또한, <찬이가 가르쳐 준 것>은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이 그림책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처우를 개선할 것을 교훈처럼 남기지 않는다. 찬이와 가족의 삶을 단순하고 사실적인 그림으로 그려낼 뿐이다. 그들이 마주한 고통을 강조하기보다는 불편을 대동하는 시간을 요란스럽지 않게 보여준다. 찬이도 찬이 엄마도, 찬이의 누이인 '나'도 각자의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조망된다면 특별해지는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일상들이다. 그 일상 안에는 찬이 가족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다.

때론 속상하지만, 엄마가 찬이는 찬이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우친 '나'의 마지막 문장은, 그들이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름없는 '우리'임을 환기시킨다.
무엇보다 사랑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란 걸 배웠다. 모두 찬이가 가르쳐 주었다.
                                                     <찬이가 가르쳐 준 것> 중에서

그들도 모두처럼 살아가고 있다. 장애인들에게 우선될 것은 동정어린 시선과 특별한 혜택이기 보다는 다수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림책의 면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앞 면지의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불편한 시선을 던지며, '얘가 정말 니 동생이야?', '목이 왜 저래'?'라고 질문한다. 하지만 뒷 면지의 사람들은 '안녕?'하고 인사를 건넬 뿐이다.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시선이 건네지는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불편하지 않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모두가 편안해진다.

세상에는 여러 방식의 삶과 다양한 사람이 존재한다. 존재의 양상은 다를지라도 모두는 어떻게 그렇게 존재하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살아가는 동안 이루어지는 선택에 따른 책임은 지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선택과 무관한 우리의 존재 자체에 책임이나 탓이 불필요하듯, 구분하고 불편해하는 것 또한  불필요하다. 자신의 삶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모두가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세상의 편안함, 찬이와 찬이 엄마는 가르쳐 준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


찬이가 가르쳐 준 것

허은미 지음, 노준구 그림, 한울림스페셜(2017)


태그:#찬이가가르쳐준것, #허은미노준구, #있는그대로받아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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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한민국 한 귀퉁이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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