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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에이씨!"
 

앞 차가 깜빡이도 켜지 않고 갑자기 앞으로 치고 나왔습니다. 너무 놀란 저는 브레이크를 급하게 밟고 차를 멈춰세웠습니다. 다행히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순간 화를 버럭 냈습니다.

"딸, 운전할 때는 화 내지 마..."

뒷좌석에 앉아있던 엄마가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엄마는 아마도 딸이 운전하다 분노를 참지 못해 다툼이나 사고가 일어날까 봐 걱정이 되셨나 봅니다.

"엄마, 나는 너무 화를 안내서 문제야. 화를 내야 할 상황에도 참는 데 익숙해져 있어. 화를 표현하지 못해서 마음의 병이 쌓인 것 같아..."
 

예전의 저라면, 엄마의 말에 '화를 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자책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감정들 중에 분노를 표현하는 게 가장 두려우니까요. 분노는 허용할 수 없는 나쁜 감정이었습니다. 속 깊은 딸이 되어야 하고, 착한 여자 더 나아가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자아상이 강하게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특히 관계에서 분노를 표현하는 건 후과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관계가 틀어지고 어색해지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으니까요. 갈등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충분히 경험해보지 못한 탓일까요. 갈등과 다툼을 외면하고 회피하면서 차곡차곡 쌓아두는 데 익숙했더랬습니다. 그러고는 비난의 화살을 제 안에 쏘아대곤 했지요.

내 감정을 바라보는 데는 무뎌진 반면, 상대방의 감정을 눈치채는 데는 예민해졌습니다. '혹시 내 말과 행동으로 화가 난 것일까...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일까...' 겁이 나는 일이었습니다. 불필요한 감정노동은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자존감을 추락시키더군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감각도 사라져 갔습니다. 외부의 시선과 기대에 몰입하는 삶은 공허하고 무기력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 분노는 어떤 감정입니까
 당신에게 분노는 어떤 감정입니까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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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평생 마음껏 울어본 경험을 하지 못했다고요. 슬픔을 꺼내놓기 위해서 자신을 때려보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남자에게 슬픔이란 감정을 허용하는 데 인색합니다. 눈물은 남자답지 못하다는 통념이 자기 감정을 통제하게 만들곤 하지요. 반면 여자는 분노를 표현하는 게 어렵습니다. 거칠거나 강하면 여자답지 못하다는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모든 감정은 제 역할이 있는데, 그 감정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건 안타깝고 때로는 위험한 일입니다. 감정은 부정하고 억압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어떤 감정은 좋고 어떤 감정은 나쁘다고 딱 잘라 평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은 내가 조절하고 활용할 수 있는 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는 부당한 일이나 공격을 당했을 때 그것을 바로잡고 원래의 나, 평화롭고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되돌리는 힘을 가진 감정입니다. 그래서 화를 억누르거나 외면하면 외부의 공격에 위축되고 두려워하는 상태로 나 자신이 변형되어 버립니다." -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
 
공감이 갔습니다. 외부에서 공격하지 않아도 외부의 눈치를 살피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화를 너무 오랫동안 외면하고 억누른 결과입니다. 분노를 인정하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는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정을 알아차리는 감각은 상황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해결하는 시작이 아닐까요?

오늘은 운전을 하면서 화가 나는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가슴을 두드려주었습니다. 속이 뻥 뚫리고 시원했습니다. 그렇게 풀고 나니 화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잘했어!" 칭찬해주었습니다.

억압된 감정을 건강하게 해소하는 나만의 방법이 필요합니다. 분노는 조절하지 못하는 것도 해롭지만, 무작정 쌓아두는 것도 위험합니다. 여러분에게 분노는 어떤 감정입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 - 소녀들을 위한 페미니즘 입문서

정희진 외 지음, 우리학교(2017)


태그:#스트레스, #감정조절, #젠더,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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