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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산중 백발옹이 고요독좌 향남봉이로다
바람 불어 송생슬이요 안개 걷어 학성홍을 주곡제금은 천고한이오 적다정조는 일년풍이로다 누구서 산을 적막다하는가 나는 낙무궁인가 하노라."

 

평시조 한 곡을 약 5분 동안 부르는 시조창을 한번쯤은 들어봤으리라. 요즘같이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참 느리기 짝이 없는 읊조림 쯤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고유의 성악이라 할 수 있는 정가의 일종이다.
  
서양의 성악과 같은 줄 알고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국악고에 들어간 박종순 선생은 우리나라 성악인 정가를 알게 됐고 이제는 그녀의 인생이 됐다.
▲ 정가의 여인이 되어 소리를 하는 남계 박종순  서양의 성악과 같은 줄 알고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국악고에 들어간 박종순 선생은 우리나라 성악인 정가를 알게 됐고 이제는 그녀의 인생이 됐다.
ⓒ 박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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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갈하게 차려입은 한복에 두 손을 모으고 쪽진 머리에 눈을 다소곶이 바라보며 청아하게 부르는 정가는 처음엔 지루할지 모르지만 귀를 기울이다보면 사람의 몸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그 무엇을 느끼게 한다.

우리 한국인의 심오함이 소리에 채워진 정가를 고등학교 때부터 전문적으로 배우고 오랫동안 정가의 여인으로 살아온 박종순 선생(57세). 그녀를 처음 만난 건 2003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주제공연인 <에밀레- 천년의 소리>(김아라 연출)에서다. 제자와 함께 무대 한 켠에서 정가를 부르던 그녀의 소리에 반해 인터뷰를 청했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 대신 앞이 보이지 않아 목소리가 더욱 구슬프고 청아하다며 맹인학교에 다니던 제자의 인터뷰를 권했다. 인터뷰 하는 동안에는 제자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주며 쉽고 편안한 자리가 되도록 유도했다. 보도자료 형식의 인터뷰가 나가자 꽤 많은 언론사에서 정가를 부르는 맹인학생가수에 대한 취재가 쇄도했다. 그땐 참 좋은 스승을 만나서 잘됐구나 하고 생각만 했었다.

쪽물에 반하고 소리에 살고

그런데 십 수년이 지난 후에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여름 인사동에서 쪽빛 스카프의 싱그러운 색에 반해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너무나 반갑게 내 이름을 또렷이 부르는데 처음엔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연이어 툭툭 치며 '나 박종순이예요' 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 곱게 빗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단아하게 정가를 부르던 바로 박종순 선생이었다. 두 손을 맞잡는 그녀의 손이 쪽색에 물들어 있었다. 마음에 들어 만지작거렸던 하늘빛 쪽염 스카프가 바로 그녀가 만든 거라는 소리에 다시 놀랐다.

"이젠 뭐 노래하라고 불러주는 곳도 자꾸 줄어들고 먹고 살아야지요." 3년 전부터 쪽염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그녀는 '남계아트 쪽드림'이라는 생활쪽물옷 가게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왠지 그녀의 얘기를 들을수록 애잔했다. 그녀는 가슴을 울리는 최고의 소리꾼이기 때문이다.
 
2000년에 낸 정가 음반 (박종순선생의 페이스북에서 퍼왔다)
▲ 정가 음반  2000년에 낸 정가 음반 (박종순선생의 페이스북에서 퍼왔다)
ⓒ 박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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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 '남계'인 박종순 선생은 국립국악고등학교에서 정가를 전공하고 이화여대 국악과로 진학해 정가를 전문으로 공부한 1세대 국악정가 전공자다. 어릴 적 성악가가 되려던 그의 꿈을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국악으로 바꿨다. 교회성가대 출신으로 국악도 양악의 성악과 같은 노래인 줄만 알았던 그녀는 처음 정가를 접하고는 충격에 싸여 방황했다고 했다. 당초에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그녀를 국악고등학교에 보낸 건 단 하나였다.

"한국 사람이 한국 걸 해야지 남의 나라 걸 왜 하냐, 성공하려면 한국 걸 해라"

학교에 들어가니 목소리 좋은 사람을 뽑아서 노래를 시켰는데 그녀가 뽑힌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낯선 국악의 성악에 거부감을 느꼈다. 1학년 동안의 긴 방황. 거부한다면 전학을 가야했고 국비장학생으로서의 위치도 놓아야만 했다.

결국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2학년 때부터 별도의 선생님으로부터 레슨까지 받으며 열심히 기량을 쌓았다. 덕분에 이화여대에 특기장학생으로 뽑혔고 문화예술진흥원 전액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장학금 덕에 여유가 생겨 여행도 많이 다녔는데 특히 한 달에 두 세 번은 부산 태종대에 가서 소리연습을 했다. 멀었지만 바다가 있는 태종대에서 연습하면 잘 되는 것 같았다는 그녀는 물을 보며 연습하는 걸 좋아해 행주산성 등에도 자주 갔다고 한다.

대학 졸업반 때는 시립국악관현악단에서 이강덕 선생이 작곡한 조지훈 작 승무를 초연했을 만큼 인정받았지만 그 당시의 자료가 없어져 지금은 다른 사람이 초연한 걸로 나와 있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소리는 그녀를 살게 하는 숨

누구나 그렇듯 결혼은 그녀에게 힘겨움과 행복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큰 아이에 대한 연민과 키워내기 위한 고통도 컸던 그녀에게 소리는 살 수 있는 힘이었다. 그때 소리가 없었다면 자신은 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만큼 소리는 그녀를 단단하게 해줬다.

아이를 키우고 전국을 다니며 공연하느라 힘들었지만 소리를 노래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이자 숙명이라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소리는 그녀가 살기 위해 꼭 쉬어야할 숨이다. 그래서 자신의 노래 정가는 숨소리라고 생각한다. 그게 그녀의 내면의 철학이기도 하다.

아이들과 생활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연을 다녔고 소리를 중심으로 일했다. 최초로 경기시조합창단을 결성하고 13회 정기공연까지 했다. 한국정가원을 만들어서 시조창을 보급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여러 지원사업과 공모사업들의 지원금이 적어지면서 점점 공연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시조창을 제대로 불러보기 위해 93년도부터 2005년도까지 매진하고 시조창 23곡을 음반으로 냈고 시조창 보급을 위해 저작권을 걸지 않았지만 그녀는 점점 무대에 서는 것이 어려워졌다.
 
자신의 피를 받은 둘째 아들 심유종씨도 대학에서 정가를 전공했다. 아들은 체격부터 소리까지 정가 가수로서의 조건을 다 갖췄다고 생각한다.
▲ 2대가 함께 정가공연  자신의 피를 받은 둘째 아들 심유종씨도 대학에서 정가를 전공했다. 아들은 체격부터 소리까지 정가 가수로서의 조건을 다 갖췄다고 생각한다.
ⓒ 박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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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경력 40년, 나이는 젊지만 경력으로 치면 원로 격에 속하다보니 설 때가 점점 줄어들었다. 후배들도 설 자리가 없는데 그녀가 무대에 선다는 것이 조금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쪽염색이다. 푸른빛의 쪽은 소리로 치면 정가를 닮았다고 했다. 정가는 인간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정시키는 기운이 있는데 색으로 치면 쪽색의 느낌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심연에서 올려져 입을 통해 세상에 울림을 주는 정가의 소리가 하늘의 청한 색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소리의 화두는 '평온'인데 이는 시조창의 화두인 평온사상과도 통한다는 그녀는 할머니가 평생 함지박에 담아 보관했던 수의가 쪽염색을 하게 된 시발점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할머니는 쪽색, 하늘색, 녹색, 미색 등 다양한 수의를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는데 볕 좋은 날이면 햇빛에 잘 말렸다가 다시 넣어두었다고 한다.

풀칠해서 만든 수의의 부패를 막기 위해 봄과 가을, 가장 볕 좋은 날을 골라서 수의 말리는 일을 가장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때 본 수의는 정말 아름다웠다. 할머니가 가장 소중하고 귀하게 여겼던 분홍빛 한지에 싼 통, 그리고 그 안의 모시로 된 수의가 그녀는 늘 부러웠다고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빨랫줄에 걸렸던 수의가 그녀의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더욱 그리워졌다. 그래서 바느질을 배우기 시작했다. 바느질이 몸에 붙으면서 염색을 배웠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그리고 쪽염의 위력을 알게 됐다. 살균과 항균력 등 다양한 효능이 있는 쪽염색에 푹 빠진 그녀는 비싼 옷감보다는 일반옷에 쪽염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입었으면 했다.
  
푸른 쪽염이 몸을 치유하는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듯이 정가 또한 마음을 치유한다고 생각하는 박종순 선생은 소리와 염색을 접목시킨 '소리명상 염색전'을 일주일간 연다
▲ 푸른 쪽에 청아한 소리로 세상 시름을 잊고저  푸른 쪽염이 몸을 치유하는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듯이 정가 또한 마음을 치유한다고 생각하는 박종순 선생은 소리와 염색을 접목시킨 "소리명상 염색전"을 일주일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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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을 살리는 쪽염, 마음을 살리는 정가

천연소재의 일반 옷을 사다가 쪽염을 해서 판매하고 그 돈으로 다시 옷을 사서 쪽염을 했다. 쪽염된 옷을 판매하는 그녀를 본 사람은 그녀가 정가를 부르는 가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만큼 한동안 쪽염색에 매진했다. 좋은 물이 필요한 쪽물을 들이기 위해 산청과 함양에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가서 작업한다.

쪽염의 신비로움에 반한 그녀는 정가와 쪽염을 접목해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찾아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시도하는 것이 '소리명상 염색전'이다. 정가에는 명상과 기공의 장점이 다 들어있다. 쪽염 또한 쪽이 자라고 이를 염색물로 내리기까지의 노력과 공이 명상과도 같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사람의 몸을 살리는 쪽염과 사람의 마음을 살리는 정가, 이 둘을 결합해 그녀는 소리명상의 자리를 편다. 현대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위로하고 싶어서다. 쪽염색인 시각과 소리인 청각을 병행햐는 '소리명상 염색전'은 오는 1월 24일부터 31일까지 인사동 신상갤러리에서 연다.

자신이 아는 예술인들이 하루에 두 차례씩 춤과 낭송, 퍼포먼스, 노래와 연주 등으로 염색전의 공간을 채운다. 모두 그녀를 위해 마음 내준 예술인들이다. 그녀의 뒤를 이어 대학에서 정가를 전공한 아들 심유종씨도 함께 참여한다. 2대의 정가 가수가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이다.

종로에 있는 한국정가원에서 지금도 수업을 하고 있는 그녀는 말한다. "나의 노래는 그저 숨이고 호흡이다. 그냥 자신이 가는 길을 갈 뿐이다." '푸른 쪽에 청아한 소리로 세상 시름을 잊으려는 그녀의 눈빛이 푸르게 반짝였다.
  
사람의 몸을 살리는 쪽염과 사람의 마음을 살리는 정가, 이 둘을 결합해 그녀는 소리명상의 자리를 편다. 현대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위로하고 싶어서다. 쪽염색인 시각과 소리인 청각을 병행햐는 ‘소리명상 염색전’은 오는 1월 24일부터 31일까지 인사동 신상갤러리에서 연다. 자신이 아는 예술인들이 하루에 두 차례씩 춤과 낭송, 퍼포먼스, 노래와 연주 등으로 염색전의 공간을 채운다.
▲ 소리명상 염색전  사람의 몸을 살리는 쪽염과 사람의 마음을 살리는 정가, 이 둘을 결합해 그녀는 소리명상의 자리를 편다. 현대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위로하고 싶어서다. 쪽염색인 시각과 소리인 청각을 병행햐는 ‘소리명상 염색전’은 오는 1월 24일부터 31일까지 인사동 신상갤러리에서 연다. 자신이 아는 예술인들이 하루에 두 차례씩 춤과 낭송, 퍼포먼스, 노래와 연주 등으로 염색전의 공간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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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가 , #박종순 , #쪽염, #소리를 닮은 색, #시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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