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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가 100개라면 100개의 운영방식이 있다. 맞는 말이다. 한 동네에 살며 옆집 밥 숟가락 수까지 속속들이 알던 옛날 공동체와는 사뭇 다른 현대의 공동체는 존재방식이 매우 다양하다.

함께 거주하면서 공동생산 공동분배를 이루는 형태가 있는가 하면, 공통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 형태를 띠기도 한다. 한 아파트의 주민들이 교류하며 도시공동체를 이루기도 하고,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을 고민하는 부모들이 모여 공동육아로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한다. 세상과는 거리를 둔 채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험하는 곳도 있고, 세상속에 녹아들어가 한 마을 전체를 공동체의 방식으로 재조직하는 데 열정을 바치기도 한다.   

방식은 다양하지만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는 대체로 비슷하다. 채움보다는 비움을, 소비보다는 나눔을, 이윤보다는 가치를, 혼자보다는 함께를 추구하며 세상을 점진적으로 바꿔나간다. 각양각색의 공동체들 안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이 있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균질한 집단이 아니다. 공동체를 이루겠다고 모여 획일화를 추구한다면 모순이다. 두 사람만 모여도 다툼이 있을진대, 하물며 다양한 생각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부대끼면서 갈등이 없을 리 없다.  

숙명같은 갈등을 짊어지고

나 또한 농촌시골에서 마을공동체 운동을 하면서 실패를 반복해왔다. 우선은 도시에서만 살다가 처음 살아보는 시골살이에 삶을 꿰어 맞추려니 고역이었다. 자급자족까지는 아니더라도 씀씀이를 줄이고 작게라도 텃밭을 일구며 좀 소박하게 살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반복되는 풀과의 전쟁에 호미 하나 달랑 들고 덤벼들었다가 나가떨어지기 일쑤였고 10년째 하는 텃밭농사는 여전히 엉망이다. 시골살이의 불편함에 어느정도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나는 여전히 도시에서 살던 습관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터전을 잡고 들어간 마을의 원주민들 속에 스며들어 어울리는 것도 녹록치 않았다. 함께 하는 이들간의 대립과 반목으로 힘든 날들을 보내거나 심지어 동지라고 믿었던 이가 한순간에 적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텃밭에서 실패할 때는 땅의 위대함 앞에 겸손해졌지만, 사람 가운데서 실패할 때는 존재의 연약함에 절망하며 상처를 입고 불면의 밤을 보냈다.

<한겨레> 조현 기자의 마을공동체 탐사기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를 읽으면서 다른 공동체들을 봤다. 이 책은 공동육아, 공유주택, 마을교육공동체, 영성공동체, 마을만들기 운동 등 내로라 할만한 공동체 운동의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노예적 삶이 아니라 돌봄과 친밀한 관계를 통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삶의 대안은 '공동체'라고 강조한다. 

외람되지만 기자의 시각으로 해석되고 다듬어진 저 아름다운 공동체를 일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땀과 투혼을 바쳤을까 생각했다. 뜻이 좋다고 언제나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공동체는 수없이 많은 갈등을 겪으면서 성장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갈등은 공동체의 숙명과도 같다. 공동체의 속살은 의외로 상처가 많다. 공동체 내면의 서사에는 즐거움과 행복만큼 아픔과 고통도 짙게 배어 있기 마련이다. 숙명같은 갈등을 짊어지고 기꺼이 불편함을 무릅쓰며 마을공동체를 일구는 사람들의 마음이 책 마디 마디 글의 행간에서 느껴졌다.
 
"함께 하는 것은 변화를 촉진한다. 감자와 고구마 당근을 씻을 때 한 바가지에 넣고 씻으면 서로 부딪치며 빨리 씻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씻기는 과정은 좀 더 세련되고 원만해지는 과정이자 아픔의 여정이기도 하다."(238쪽)

돌아보니 기쁨도 슬픔도 모두 사람에게서 나왔다. 공동체의 처음도 끝도 다 사람이다. 그 자체로 살아있는 유기체다. 그 형태가 세모이든 네모이든 '관계의 총합'이 바로 공동체다. 함께 어울리며 부딪치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못했을 경험이다. 인간의 삶이란 더불어 함께 하는 가운데 성장해나갈 때 가치있게 빛난다는 진리를 공동체 운동을 하면서 조금씩 깨달아간다.

공동체, 희망과 절망 사이

사실 이 서평을 쓰는 데 꽤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책장을 덮었는데 뭔가 불편한 느낌이 가시지를 않았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일까.
 
"마을공동체는 주거, 비혼, 출산, 육아, 교육 등 우리 사회 가장 골치아픈 문제와 직결돼 있다. 간디는 평생 마을공동체에서만 살았다. 인도의 독립보다 마을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간디는 '마을공동체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했다. 이 책의 생생한 증언은 국가적 난제 해결에도 큰 영감을 줄 것이다.

누군가는 고독사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복지는 강화될수록 좋지만, 모든 것을 국가가 해결하기도 어렵거니와 그에 따른 엄청난 세금 부담을 감당하기도 어렵다. 일차적으로 공동체가 서로 의지하며 돌보는 사회야 말로 가장 건강한 사회다. 행정비용과 복지예산 10억 원으로도 만들기 어려운 '행복한 마을'을 마을 사람들의 자발적인 협력으로 거의 돈을 들이지 않고도 만들어내는게 마을공동체의 신비다." (24쪽)

마을공동체의 절실한 필요성을 역설하는 저자의 진심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공동체가 서로 의지하며 돌보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공동체는 선인가?'라는 질문이 자칫 '공동체만 선이다'로 귀결되지 않도록 경계하며 늘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는 세상의 진보와는 별 상관 없는 '그들'만의 자족적인 실험에 머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인간다운 삶을 찾아나가는 하나의 여정이다. 나는 공동체가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노예적 삶을 극복하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안이 과정의 언어이듯이 공동체도 과정일 뿐, 세상사 문제에 대한 딱 떨어지는 정답이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여러 대안 중 하나일 뿐이고 그마저도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국가가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가진자들의 이익만을 대변하므로 생기는 말도 안되는 문제들이 산적하다. 모든 문제를 국가가 책임질 수 없다고 말하기 전에, 국가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것을 책임지지 않으므로써 파생되는 참혹한 사회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시야가 '공동체'에만 갇혀 좁아지면 자칫 이런 국가의 무책임함과 무능력함에 의도치 않게 면죄부를 주게 될 수도 있다. 마을공동체 운동을 하는 내가 끊임없이 시선을 공동체 밖으로 두려는 이유다. 

21세기 대안적 삶으로 마을공동체를 주목하면서 민간 뿐만 아니라 정부부처들도 경쟁적으로 마을만들기 사업에 뛰어들었고 각종 공모사업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마을공동체를 칭송하고 그 모델을 만들어보겠다는 장밋빛 전망들은 넘쳐나는데 우리네 삶의 현실은 그다지 달라지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앞다퉈 마을만들기 사업이 벌어지면서 '공동체'라는 말이 너무나 가볍게 소비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여러모로 공동체는 한국사회 희망과 절망 사이 그 어디쯤에 있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길은 '사이'에 있다"고 했다. 나는 다만 다른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 운동이 우리 사회가 절망에서 희망쪽으로 옮겨가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조현 기자의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를 읽는 독자들이 공동체의 생활 방식에 매료되어 다른 삶을 기획해보는 용기를 내기를 바란다. 그건 충분히 가치있고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공동체의 명과 암을 같이 보고, 공동체를 둘러싼 한국사회의 현실과도 연관지어 입체적으로 보기를 바란다. 시골살이가 마냥 낭만이 아니듯이 공동체도 마냥 유토피아가 아니기에.

덧붙이는 글 |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조현 지음 / 휴 펴냄 / 2018.8 / 20,000원)


태그:#마을공동체, #공동체, #마을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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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골 농촌에서 하루 하루 잘 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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