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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피는 여자'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노래 가사의 일부분은 이러하다.
 
담배 피는 여자 욕하지 말아요/ 사랑의 상처가 많은 여자니까요/ 그렇게라도 안하면 가슴이 너무 아파서/ 눈물만 흘리니까 그런 여자이니까(담배 피는 여자 -란)
 
 나는 담배를 피운다, 나는 여성이다. 이 두가지 사실은 특별할 것 없다. 아무 문제없이.
  나는 담배를 피운다, 나는 여성이다. 이 두가지 사실은 특별할 것 없다. 아무 문제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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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성이고 담배를 피운다

흡연을 처음 시작한 건 꽤 오래 전 일이고, 여전히 담배 피우는 순간을 꽤 좋아한다. 그러나 위 노래 가사와 차이점이 있다.

첫째, 나 역시 사랑의 상처가 생긴 후 담배를 피울 테지만 그건 원래 흡연자이기 때문이지 상처를 받아서가 아니다.

둘째,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내리 눈물만 흘리기에는 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눈물이 없는 아이로 정평이 나 있다. 웬만해서는 울지 않는데 이로 인한 이점은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별로 없다. 울지 않는 남성의 경우 강인하고 냉철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여성의 경우 '피도 눈물도 없는' 표독스러운 여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위 노래 가사 전문에 언급되어 있듯이, 현실에서 담배 피우는 여자에 대한 인식은 냉혹하다. 담배를 피우는 행위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행위자가 남성이 아닌 여성일 경우 더욱 그렇다.

길거리에서 걸어다니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주위의 눈총을 받기 쉽다. 속칭 '길빵' 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내 경우 여성 흡연자가 '길빵'을 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여성 흡연자가 남성 흡연자보다 특별히 윤리적인 인격을 가져서 그럴까?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바쁜 아침에도 늦은 밤에도 눈에 띄지 않는 골목이나 차 뒤에 꽁꽁 숨어서 담배를 피우는 걸까?

언젠가 애인과 함께 골목 한 쪽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지나가던 어느 노인께서 내게 이런 말을 하셨다.
  
"여자가 담배를."

부당했다. 똑같이 흡연을 하는 남성 애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나만을 노려보는 것이다.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노인의 셔츠 주머니에는 버젓이 담배와 라이터가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이도 어리고, 여자니까, 생면부지인 행인에게 경멸의 제스처를 받아도 마땅한 걸까?

담배를 피울 때면 남몰래 엄청난 죄를 짓는 것처럼 자주 주위를 샅샅이 훑는다. 내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없기를. 여성도, 남성도. 젊은이도, 노인도. 그 순간 담배를 피우고자 하는 내 순수한 욕망은 굴욕적인 태도를 갖게 되고, 내 취향과 자아를 부정 당한다. 

담배 피우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묻지 마라

많은 남성이 법이 개정된 이후 실내 흡연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에 불만을 토한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 실내뿐 아니라 실외에서도 마음 편히 흡연할 수가 없다. 담배를 입에 무는 순간 언제, 누구에게서든 경멸 어린 시선을 받을 수 있다, 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언젠가 내게 남사친이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밤에 여자들 때문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정황을 물어보니, 친구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집에서 나와 거리를 서성이면 종종 으슥한 골목이나 차 뒤에서 여성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그 여자들은 얼마나 더 무섭겠니. 어둠 속에서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려면. 너는 어딘가에 숨어서 피우지 않아도 되잖아."

애초에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여자가 술을 마시면 위험에 처하기 쉬우니 술을 마시지 마라" 고 하는 바와 같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논리가 아니던가? '치마 입은 여자는 성범죄에 연루되기 쉬우니 바지를 입고 다녀라.' '네가 너무 자주 웃기 때문에 남자들에게 성범죄 여지를 주는 것이다.'
 
   여성이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폭력적인 언어를 들어야 하는 씁쓸한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여성이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폭력적인 언어를 들어야 하는 씁쓸한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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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구가 다니는 모 여대에 놀러 갔다.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학교 바로 인근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장소에는 꽁초가 수북했다. 친구가 도착하고 나서 내가 말했다. "흡연자가 엄청나게 많나봐. 꽁초가 수북하네." 그때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싸 보인다고 할 남자가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

나는 친구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첫 번째 이유는 남자가 있는 곳에서는 편견 때문에 쉬이 담배 피우기 꺼리는 여자들의 모습이 너무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 버렸다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그 편견이라는 것이 담배 피우는 여자들은 남자들로부터 '싸 보인다'는 표현을 듣는다는 현실이 씁쓸해서였다.

싸 보인다, 는 표현은 여성에게 상품처럼 값어치를 매기고, 그 값을 지불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여성이라는 극악무도한 편견과 혐오를 담은 표현이다. 여자대학이라는 것과 무관하게 그저 통계적으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많은 것일 수도 있고, 꽁초가 많은 게 그저 우연일 수도 있다. 가능성은 무한하다. 하지만 친구가 한 말에도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임신에 방해되는 행위라 '싸 보인다'는 걸까?

같은 대학에 다니지만, 학과가 다른 내 친구 중 하나는 나에 대해 소문으로 먼저 접했다고 한다. "문예창작과에 예쁜 애가 있는데, 담배를 피우더라." 그러니까 그 학과 남자 학생들은 나를 예쁘장해서 호감이 가지만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자격 미달인,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사람으로 평가한 것이다.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면 나는 또 어떤 식으로 점수가 매겨졌을까?

담배를 피우면서 한 번도 꽁초를 바닥에 버려본 적이 없다. 담배는 성인 누구나 원하면 피울 수 있는 기호 식품이다. 그런데 왜 흡연에 있어서 여자에게만 훨씬 강박적인 잣대가 주어지는 것일까. 생물학적으로 임신을 할 수 있어서 임신에 방해되는 행위를 하기 때문에 '싸 보이는' 존재로 불리는 것일까? 혹은 여성의 대표 이미지인 청순하고 가련한 여성과 반대되는 모습이라서? 비혼과 비출산을 결심했다 얼굴에 써 붙여놓기라도 하면 좀 더 자유롭게 담배를 피울 수 있을까? 그러면 해결될까? 정말로?

덧붙이는 글 | 서울청년정책LAB 블로그 및 페이스북을 통해 2018년 12월 15일 발행된 칼럼입니다.


태그:#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서울청년정책LAB, #담배, #담배피는여자,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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