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윙키즈> 포스터.

<스윙키즈> 포스터. ⓒ 안나푸르나필름

 
배우들의 대사 못지않게 탭댄스 발소리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배우 도경수 주연의 영화 <스윙키즈>는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미군 병사의 리드 하에 북한·중국군 포로와 남한 민간 여성이 '스윙키즈'라는 팀을 만들어 탭댄스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작사가 공개한 '제작 노트'에 따르면, 영화의 모티브가 된 단서는 스위스 사진작가 겸 종군기자 베르너 비숍(Werner Bischof)이 남긴 한 장의 사진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복면을 쓴 포로들이 춤을 추는 사진을 보고 영화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춤을 췄다면, 공산 포로 중의 반공포로들이다. 복면을 쓴 것은 친공포로들에게 신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영화 속의 스윙키즈 단원 중에서 남한 여성과 미군 병사를 제외한 나머지도 외형상 반공포로들이다.
 
주인공 로기수(도경수 분)는 사실 반공포로가 아니라 친공포로이지만,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잠입한 인민군 장교의 밀명을 받고 스윙키즈에 합류한다. 밀명은 '공연 때 수용소장을 죽이라'는 것. 하지만 기수는 그런 것보다는 그냥 춤이 좋아 공연 준비에 참여할 뿐이다.
 
스윙키즈 단원은 다섯밖에 안 되지만, 이들의 이해관계는 꽤나 복잡하다. 단원들의 국적도 남한·북한·중국·미국 4개국이나 된다. 처지도 제각각이다. 감시자 입장인 미군도 있고, 피감시자 입장인 북한·중국 포로도 있고, 제3자인 남한 민간인도 있다.
 
3명밖에 안 되는 포로들 사이에도 이해관계 대립이 존재한다. 로기수는 겉은 반공포로이지만 사실은 친공포로, 나머지는 반공포로들이다. 이렇게 각종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얽힌 사람들이 탭댄스라는 예술 장르를 통해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이 영화 속에서 전개된다.
 
복잡한 이해관계를 빠트리지 않고 탭댄스 안에서 녹여내고자 했지만, 이 영화에서 빠진 중요한 게 하나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을 이 영화는 빼놓았다. 바로, 반공포로 문제에 대한 남한 정부의 입김이다.

탭댄스로 화합하는 포로들 
 
 <스윙키즈> 스틸컷.

<스윙키즈> 스틸컷. ⓒ 안나푸르나필름

 
영화에서는 포로수용소를 책임진 미군 소장이 자본주의와 미국의 우월성을 보여주고자 탭댄스 공연을 지시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미군에 맞섰던 북한·중국군 포로들이 반공포로로 입장을 바꾸고, 자본주의 문화인 탭댄스에 빠져드는 것을 국제사회에 보여주고자 반공포로들을 공연에 동원한다.
 
남한군보다 미군이 우위에 있었고 작전지휘권도 미군에 있었으니,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의 궁극적 책임을 미군한테서 찾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당연하다. 하지만 반공포로 문제와 관련해서는 그렇지 않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미군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이승만 정권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 극히 사대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반공포로 문제와 관련해서는 지극히 '자주적'인 면모를 보였다. 휴전협정을 1개월여 앞둔 1953년 6월 18일에는 부평·논산·영천·대구·상무대·마산·부산 등지의 포로수용소 대문을 미군 몰래 열어주어 반공포로들이 탈출하도록 만들었다. 반공포로 석방을 그런 식으로 실현시킨 것이다.
 
미군이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해 추격에 나섰지만, 반공포로들이 민가에 숨어들어 옷을 갈아입는 바람에 3만 5600여 명 중에서 8000명밖에 붙잡지 못했다. 미국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뒤에 포로들을 석방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런 미국의 방침을 어기면서까지 반공포로들을 미군 몰래 석방했으니, 반공포로 문제와 관련해서는 미국뿐 아니라 남한의 의중도 함께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승만은 반공포로들을 대북투쟁에 활용하겠다는 나름대로의 계획을 갖고 있었다.

포로들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 진실은 
 
 <스윙키즈> 스틸컷.

<스윙키즈> 스틸컷. ⓒ 안나푸르나필름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공산포로들이 반공포로와 친공포로로 갈렸다는 사실이 너무도 익숙하다. 매우 오랫동안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흔히 일어날 만한 일이 결코 아니다. 전쟁 중에 붙들려 열악한 상황에 놓인 포로들이 수용소 안에서 자기들끼리 '사치스럽게' 이념 대결을 벌이며 반공과 친공으로 갈렸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다.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는 것은 '인공적'인 것이 가미됐음을 의미한다. 이승만 정권의 반공포로 정책이 수확을 거둔 결과였던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전갑생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연구원이 2010년 3월호 <민족 21>에 기고한 '최초 발굴: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숨겨진 진실'에 따르면, 공산군 포로 출신들한테 이런 증언이 나왔다고 한다. 아래의 나이는 2010년 기준이다.
 
박진우(81세): "내가 있을 때만 해도 친공포로니 반공포로니 하는 구분도 없었고"
박정해(80세): "처음엔 몰랐어. 1951년 여름에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가 나뉘어져 서로 싸운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지."
홍이문(78세): 수용소에서 연락병으로 일했는데, 반공포로 조직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어. 나중에 석방되어 나오니까 정보원이 공작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
 
이처럼 처음 한동안은 반공포로니 친공포로니 하는 구분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런 구분법이 생거난 것은 전쟁이 1년 정도 지난 1951년 중반 이후였다. 그 시점에서 수용소 내부에 모종의 일이 벌어지고 그것이 포로들의 분열로 이어졌던 것이다. 
 
 <스윙키즈> 스틸컷.

<스윙키즈> 스틸컷. ⓒ 안나푸르나필름

 
그간 남한 정부는 공산 포로들이 저절로 감화되어 반공 이념을 갖게 되었노라고 선전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 일은 남한 정부의 의도 하에 벌어졌다. 거제도 수용소의 공산 포로들이 반란을 일으켜 후방에서 반격을 가할 위험성이 있는데도 미군이 자유방임식으로 풀어주고 있다는 남한 정부의 염려로부터 시작된 일이다.
 
1951년 7월 26일 대통령비서실에 보고된 조진만 법무부 장관의 보고서 '거제도 포로수용소 포로 동향에 관한 건'에서 조진만 장관은 "수용소 내에는 노동당 중앙조직부 부책 등 간부들이 일개 전사로 위장하고 있음"이라며 이들이 폭동을 일으켜 한반도 남부를 장악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뒤, 대비책으로 "경비를 강화할 것"과 더불어 "수용소에 공작원을 파견할 것"을 건의했다. 공작원을 파견하라는 것은 포로들을 분열시킬 프락치들을 파견하라는 건의였다.
 
남한 정부는 거제도 수용소에 대한 미군의 감시가 너무 느슨해서 포로들을 단속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미군은 이미 충분히 잔혹하게 포로들을 다루고 있었다. 포로들을 신체적으로 학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포로들의 소지품까지 갈취할 정도였다. 1992년 6월호 월간 <말>에 실린 '거제 포로수용소의 미군 만행'에 이런 대목이 있다.
 
"포로들의 작업을 감시하는 흑인 미군 병사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포로들을 발로 차거나 주먹으로 때리는 것을 예사로 했다. 당시 거제도에는 미군들을 쫓아 들어온 '양공주'들이 미군 헌병초소인 MP 다리에서 강둑을 따라 송정까지 판자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미군 병사들이 이들 양공주와의 하룻밤을 위해 포로들의 금반지나 물품을 갈취하기도 했다'고 전하고 있다."

미군은 이미 충분히 공산포로들을 괴롭히고 있었지만, 이승만 정권의 눈에는 '너무 신사적인 대우'로 보일 뿐이었다. 저렇게 잘 대해주다가는 포로들이 폭동을 일으켜 큰 사단이 날 거라고 우려했다. 그래서 벌인 일이, 공작원들을 밀파해 반공포로들을 만들고 이들을 이용해 포로들을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잠입시킨 공작원들은 거제도 수용소에서 이렇게 활동했다. 위의 전갑생 기고문에 나오는 대목이다.
 
"수용소 내에 파견된 공작원들의 역할은 인민군 포로 중 남쪽 출신 의용군들을 이용하여 친정부적 포로를 조직하고 수용소 내에서 사상 전쟁을 부추기는 데 있었다."
 
 <스윙키즈> 스틸컷.

<스윙키즈> 스틸컷. ⓒ 안나푸르나필름

 
공작원들이 우선적으로 포섭한 대상은 인민군 내의 남쪽 출신들이다. 이들을 먼저 조직한 다음에 북한 출신 인민군 쪽으로 포섭 작업을 확대했다. 이런 공작이 어느 정도 진행된 뒤 이런 일이 벌어졌다.
 
"반공포로들은 공작원이나 프락치의 명령에 따라 함께 수용돼 있던 막사로 찾아가 폭력을 행사하면서 각각의 수용소를 점령했다. 그 결과, 반공포로들은 28개 수용동 중에서 73·74·81·82·83·91·93·94·96(인민군 수용소), 60·65·84(남쪽 출신 의용군 수용소) 등 총 12개 수용소를 장악하게 됐다."
 
이승만 정권의 의도는 반공포로들을 양산해 친공포로들을 견제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의 의중을 거스르고 반공포로들을 석방한 뒤에는 이들 중 일부를 국군이나 경찰로 편입시켰다. 인민군 경력 때문에 반공을 더욱 더 소리 높여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이들의 처지를 활용해, 남한 사회의 반공 이데올로기 확산과 이승만 정권의 권력 강화에 이용했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멍들게 한 반공 이데올로기의 확산에 반공포로들이 적잖게 이용됐던 것이다.
 
이처럼 반공포로 문제에는 미국뿐 아니라 이승만 정권의 이해관계도 깊숙이 개입돼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이승만 정권은 미국과의 충돌도 불사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문제를 다룬 영화 <스윙키즈>가 반공포로 문제에 관한 미국의 입장만 소개하고 문제의 핵심 당사자인 이승만 정부의 입장은 조금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스윙키즈 거제도 포로수용소 반공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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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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