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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학문 분야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곤 한다. 이는 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사람들은 성경에 성소수자에게 억압적이며 차별적인 내용이 담겨 있으리라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오히려 소수자의 입장에서 성서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며 성소수자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라는 시선도 있다. 바로 '퀴어 신학'에 대한 이야기다.

올해는 보수 개신교계의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가 강렬하게 표출되었던 시기였고 이는 크나큰 사회적 문제로 불거졌다. 그런만큼 종교가 차별과 혐오가 아니라 평등과 사랑을 이야기 한다는 '퀴어 신학'의 존재는 너무나 소중했다. 고상균 목사님은 한국에서 오랜 시간 퀴어 신학을 연구하고 공부해오셨으며 '퀴어성서주석'의 번역에 참여하고 계시기도 하다. 또한 성소수자를 비롯해 세입자, 노동자 등 다양한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연대 활동을 펼쳐오시기도 하셨다.

비온뒤무지개재단은 종교에 기반 한 혐오와 차별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으며 또한 성적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모으는 '나는 앨라이입니다' 캠페인을 진행 중이기도 하다. 이런 활동의 일환으로 올해는 성적소수자의 편에서 연대 활동을 해온 '종교인 앨라이'들을 만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런 앨라이들 중 한 사람인 고상균 목사님을 만나 퀴어 신학과 종교 그리고 소수자와 함께하는 일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했다.

-우선 인터뷰를 읽으실 분들을 위해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우선 이런 자리에서 인사를 드릴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고 반갑습니다. 저는 사실 좀 게으른 사람이고요 그리고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재밌게 놀 수 있는 세상,  놀아도 크게 비난받지 않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편이고요. 맥주와 성서를 굉장히 사랑하는 애주가이자 신앙인입니다. 그리고 박사과정 중에 있는 학생이기도 합니다."
 
 종교인 앨라이 인터뷰에 참여 중이신 고상균 목사님
 종교인 앨라이 인터뷰에 참여 중이신 고상균 목사님
ⓒ 비온뒤무지개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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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의 시작부터 다소 무거운 질문을 드려볼까 합니다. 올해는 유독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다양한 문제들이 폭발적으로 드러난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뿐만이 아니라 세습과 같은 내부 문제도 불거졌죠. 목사님께서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보시나요?   

"사실 한국 교회가 직면한 문제가 너무 많아서 '무엇이 문제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죠. 지금 교회는 사회의 상층부로 올라가는 것과 종교적 구원이라는 것을 거의 혼동하고 있어요. 굉장히 상부지향적인 가치를 가진 반면에 낮고 작은 존재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어요. 그리고 또 합리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굉장히 비합리를 넘어서 몰합리적인 수준이죠. 민주성이라는 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비민주적인 데다가 굉장히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죠. 뭐랄까 전근대적이고 보수적이라기보다는 반동적인 느낌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신학의 부재라고 생각해요. 신앙생활 하다보면 궁금증이 발생할 수 있잖아요.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이런 거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삼위가 일체일 수 있는지 등등 말이지요. 그런데 한국 개신교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아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안 되고 신앙의 눈으로 봐야 한다'라는 식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람인데 어떻게 사람의 눈으로 안 볼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결국은 모든 질문을 차단시켜버리고 아무런 질문이 없는 상태를 최고의 신앙으로 인식하지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교회는 사회와 단절된 채, 자신들만의 언어에 갇힌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신학'의 부재는 결국 교회가 발전하지 못하고 후퇴하는 결과를 낳게 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는 신자들이 질문하지 못하도록 만들까요? 

"교회 현장에서 교인들이 많이 알고 많이 질문하면 목사들은 힘들어질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모두가 자기 말만 듣고 순종하는 좀비들로 만들어 놔야 아주 편하겠죠. 헌금 내라면 헌금 내고 집회 나가서 혐오하라고 하면 혐오하고 할 테니까요. 그 결과 지금의 한국교회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은 신학적 사유가 거세된 상태이죠. 즉 신학적 고민이 없는 상태. 신앙적 성찰이 부재한 상태이기 때문에 본인이 저지르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반사회적이고 반 인권적인지조차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지 않을까 싶어요. 이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 대한 목사님의 시선이 궁금해서 미리 자료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올해 한국여성신학을 통해 발표하신 글 '다양한 소수성(小數性)의 친구로서의 여성신학'에서 목사님은 '교회가 소수자를 배척하는 것을 거대권력을 지향하기 때문이고 자본과 권력의 상부구조 편입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란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려주셨어요. 이는 저 역시도 고질적으로 느껴온 문제점인데요, 어쩌다 한국 교회는 이런 성격을 지니게 되었을까요? 

"한국의 개신교가 유독 권력에 집착하는 데는 교회사적 배경이 있다고 생각을 해요. 아시겠지만 가톨릭과 개신교의 한반도 전례방식은 굉장히 독특하죠. 선교사 이전에 성서가 먼저 들어와서 번역되고 읽혀졌잖아요. 먼저 성서를 공부하다가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개신교 같은 경우도 중국과의 국경지역에서 상거래 하던 사람들이 성서를 번역해서 보급하면서 시작되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후에 들어왔었던 서구 선교사들이 자생적으로 전파되었던 조선의 선교를 부정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본인들의 교회를 세웠죠. 그 교회에서 조선인들은 목회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사실상 계급이 발생했던 겁니다. 선교사는 상부 계층이고 그렇지 않은 이 사람들은 피지배 계층처럼 된 거죠. 부자나라 선교사와 가난한 현지인... 이 구도 속에서 자연스럽게 상부지향적인 가치가 이식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 다음에도 보면 그렇게 들어왔던 선교사들 대부분이 조선인들에 대해서 배우거나 조선인의 역사에 대해서 알 생각이 없었죠. 미개하게만 여겼기 때문에 굉장히 제국주의적 선교를 추진했지요. 이러다보니 역시나 상부지향적일 수밖에 없죠."  

-사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인데요, 한국 교회의 태동에서도 그렇지만 이후에도 권력 영합적인 면은 자주 보였다고 생각해요. 

"그렇습니다. 이후에 일제에 의해서 점점 침략이 노골화되고 결국 식민지배가 시작이 됐을 때, 서구 선교사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포교의 안정적인 여건을 보장받으려고 했고, 그 결과 일제의 식민정책에 동조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상동감리교회인데 그 곳 청년회 조직들에서 소위 선각자라고 불리는 독립 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되곤 했어요. 그런데 교회의 수장으로 있던 외국인 선교사가 청년회를 폐쇄시켜 버렸습니다.  

이후에도 개신교는 자기들의 이익에 반하면 없애고 반대로 이익을 위해서는 철저하게 상부랑 결탁하는 방식을 취했어요. 미군정 통치기에 이승만 정권이 거기에 결탁하고, 교회는 그 정부와 결탁했죠. 그 이후에 군사정권 때는 저희가 다 알 듯이 국가조찬기도회가 열리고 교회가 독재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축복을 합니다. 그것을 통해 암묵적인 이권을 얻어냈던 것이죠. 개신교의 급격한 양적 성장은 권위주의적인 정치권력과의 결탁이 처음부터 횡행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것과 종교적 구원이란 게 분리하기 어려운 단계까지 와있다고 생각해요." 

앞서 이야기 했듯, 성소수자 인권포럼에서 퀴어 신학 세션에서 발표를 맡으실 만큼 고상균 목사님은 그 분야에 관심이 많으셨다. 뿐만 아니라 오래 전부터 '퀴어성서주석' 번역작업에 함께하고 있으시기도 하다. 또한 목사님의 이력을 살펴보다 기독교계 여성단체나 학회에서도 한동안 함께하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퀴어 신학과 여성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앞서 제가 질문에 인용한 글이 '한국여성신학'에 실려 있어서 흥미로웠는데 찾아보니 여성신학회와 기독여민회에서도 한동안 계셨던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나름 흥미로운 이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글의 주요한 내용도 여성신학과 퀴어 신학의 연결고리이기도 해서 목사님께 두 신학이란 어떤 것인지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먼저 고백을 드리자면 제가 여성신학회 간사나 기독여민회 팀장으로 있었던 건 사실 특별한 일이 아니었어요. 여성신학회 때는 저를 사사해주신 선생님의 제안으로 일을 맡았고요. 기독여민회 같은 경우는 그 때 기여민이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일손이 필요하다보니 좀 와달라고 해서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웃음) 때문에 혹여나 제 이력을 보고 '너 거기에 꽤 관심이 있는 거 같다'고 누가 물어본다면 전 사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아무튼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교회의 오랜 역사에서 남성이 곧 인류였고,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은 인간이지 못했지요. 사실 여성뿐만이 아니었죠. 어린이, 장애인도 '미숙한 존재'로 치부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가장 유의미한 신학적 문제제기가 여성신학의 성과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회의 지배적인 가치에 파열음을 냈던 그것이 여성신학의 태동이자 성과였고, 지금도 지향하고 있는 가치라고 생각해요. 

한편 이성애 중심적 시각에서 성에 대한 모든 것을 규정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퀴어 이론, 퀴어 신학의 출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여성 신학과 퀴어 신학 혹은 여성학과 퀴어 이론이라고 하는 것이 일정 부분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주디스 버틀러 같은 경우에도 본인의 학문적 정체성을 얘기할 때 자신은 급진적 페미니스트고 퀴어라고 말하기도 했잖아요." 

-퀴어 이론과 여성학이 조우하고 교섭하며 발전해나가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신학에서도 비슷한 일이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처음에 퀴어 이론이 처음 등장했을 때 기존의 여성학에 대해 가진 문제의식들이 있었잖아요. 그것에 대해서 여성학은 처음에 당혹스러워했지요. 또 사람들에 따라 반발하거나 반성하거나,  혹은 포용하는 방식으로 반응했었다고 봅니다. 한국의 여성신학은 어떨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여성신학 주류에서 퀴어 신학을 논의하는 것 같진 않고, 오히려 약간은 불편하게 여기지 않을까하는 게 개인적인 입장입니다. 아니라면 미리 사과를 드리고 싶고요.(웃음) 

그래도 이제는 여성신학에 기반을 갖고 계신 선생님들 중에서 퀴어 신학에 접근하시고 공부하시고 해석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성신학과 퀴어 신학 간에 동지적 연대가 모색되는 단계이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퀴어 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한 김에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성서를 활발히 연구하며 재해석하고 그것을 페미니즘이나 퀴어 이론의 틀에서 읽으려는 시도는 많죠. 하지만 또 반면에 성서에 기반 하여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고,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으면 과연 소수자 친화적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를테면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얘기들을 놓고 볼게요. 그 이야기를 보면 일단 어떤 존재들이 마을에 왔죠. 이후 그 존재들을 어떤 이가 맞아들였고. 그리고 그 날 밤에 성에 살고 있는 남성들이 찾아와서 그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잖아요. 이것이 본문상의 팩트죠. 그런데 이에 대해 그동안 교회는 '남성들이 찾아와 남성들을 내놓으라고 했으니 남성 간에 섹스를 하겠다는 얘기, 즉 동성애다'라고 말해왔습니다. 그건 해석이죠. 이 사실은 굉장히 중요해요. 

수천 년 동안 기독교가 전면에 내세운 것이 성서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특히 한국 교회는 그게 더 심하죠. 이걸 문자주의라고 하지요. 표면적인 내용 그대로를 받아들여야지 그것을 해석하는 건 신앙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보셨듯이 교회가, 특히 한국의 개신교가 이미 성서를 해석해서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본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보수적이고 고루한 가치를 통해서 말이지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게 동성애 때문이라는 건 이와 같은 해석의 결과입니다. 그래놓고 이건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침 그대로라고 말하죠. 팩트라고 말해온 거예요. 이건 틀렸습니다." 

-결국에 문자주의 자체가 깨어지지 않는 한은 계속해서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될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이 문제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결국 처음에 얘기한 신학적 부재에서 출발한 문제라고 봐요. 성서 자체를 문자주의로 바라보는 가운데 특정 교리가 계속해서 답습되고 있죠. 그리고 이런 문제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지 않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회가 막아온 질문을 계속 해보는 거죠. 즉 성서는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환기시켜야 되는 겁니다. 모든 성서는 해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써져 있으니 그대로 믿자는 건 의미가 없어요. 

성서를 누가 썼습니까? 결국에는 사람들이 썼죠. 그럼 우리는 거기서 또 물을 수 있겠죠. 그는 어떤 배경을 갖고 썼을까요? 아니면 그는 남성인가요? 여성인가요? 이것도 물어볼 수 있겠죠. 그는 결혼한 사람인가요? 아닌가요? 질문할 수 있겠죠. 그는 나이가 많은지 아닌지. 이런 걸 물어본다면 성서는 거의 대부분 나이가 많은 남성 중에 종교적 기반을 가지고 있거나 상당히 권력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의 글일 가능성이 크죠. 그렇다면 그들에게 가난한 사람, 작은 사람, 억압받는 사람, 어린이, 여성, 노인, 성소수자에게 관심 역시 없을 가능성이 클 겁니다. 말하자면 그렇게 배제된 사람들이 있고 이런 상태에서 기록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말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거기서 선택해야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그 지배자 중장년 남성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에 의해서 배제된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지 말입니다. 

전자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렇게 믿으면 됩니다. 그게 문자주의죠. 근데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해석한다면, 그 당시에 배제되었던 이들과 하나님이 함께 계셨겠다고 우리가 믿는다면 성서는 전통적 교회의 해석, 지배자들의 담론과는 다르게 이해되겠죠. 그 해석 속에서 우리는 성서 속 혹은 성서에서 배제된 이들, 작은이들, 소수자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는 낮은 이들의 이야기를 담지하고 있죠. 그걸 발견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하는 거고요."
 
 종교인 앨라이 인터뷰에 참여 중이신 고상균 목사님
 종교인 앨라이 인터뷰에 참여 중이신 고상균 목사님
ⓒ 비온뒤무지개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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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학문을 오래 공부하고 살펴본 사람만큼, 그리고 그것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큼 '왜 그 학문인가?'에 대한 답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터뷰를 하는 나 역시도 사람들이 퀴어 신학에 관심을 많이 가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이번 기회에 사람들에게 퀴어 신학의 매력과 장점을 알려주시기를 부탁드리고자 했다. 

-목사님께서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퀴어 신학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기에 퀴어 신학의 장점이나 혹은 매력을 가장 잘 알고 있으시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혹시 그 부분을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일단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퀴어 신학은 교회와 성서 그리고 신앙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고대 인류는 일식이 벌어질 때 제사를 지냈죠. 신의 저주라는 생각에 태양을 돌려받아야 한다고 했던 것이지요. 혹은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했고요. 지배자들은 언제 일식이 벌어진다는 걸 알고 그걸 사용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일식이 우리에게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죠. 이제는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부분들이 신비로웠던 시기가 지나 과학적인 설명이 등장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렇게 보면 신화적인 시대에서 탈신화적 시대로 우리는 이미 진입해서 가고 있죠. 그렇게 보면 신비롭다고 해석되어온 성서의 많은 부분이나 일들도 이전에는 신비였으나 지금은 다르게 볼 수밖에 없는 거죠. 

근데 한국 교회에선 여전히 질문을 허용하지 않죠. 사람들이 합리적인 고민을 하지 않게 하니까 둘 중에 하나가 될 겁니다. 사유를 정지시킨 채 신앙생활하거나 아니면 계속 교회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가 떠나거나....... 그런데 제가 볼 땐 퀴어 신학이 그렇게 교회에서 멀어지는 이들에게 성서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도록 만드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한테는 그것이 단순한 신학적 카테고리가 아니라 제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저에겐 신학적 관심, 학문적 관심의 문제가 아니라 퀴어신학적 사유를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이 신앙인 것입니다."

-퀴어 신학이 단지 학문적 카테고리가 아니라 신앙이기도 하다는 말이 흥미롭습니다. 어떤 의미인지 조금 더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저의 신앙은 민중 신학에 근본을 두고 있어요. 소위 구원이라는 것이 위대한 그리스도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에게 와서 베푸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되겠지요. 무척 간편하긴 한데 대신 우린 객체가 되어버리잖아요. 그런데 민중 신학은 다르게 말합니다. 예수가 와서 활동할 때도 그와 더불어 있었던 민중이 있다. 즉 구원의 주체는 민중이다. 이렇게 얘기하죠. 이들이 그저 가난한 사람이나 피지배 계급이 아니라 자기들의 역사를 담지하고 있는 구원의 주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민중 신학의 핵심명제인 '예수는 민중, 민중은 예수'라는 주제가 도출됩니다.  

또 민중 신학에서는 민중들이 만든 사건이 먼저 있었고, 그걸 신학적으로 증언하면서 따라가는 과정에서 신학이 탄생한다고 보거든요. 그러니까 '민중 신학이 나의 신앙이다'라고 말할 땐, 스스로에게 '그렇다면 네가 담지하고 있는 민중의 사건은 뭐니?'라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그런 맥락에서 저에게 지금의 대표적인 민중 사건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편견과 혐오에 의해서 어려움에 처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요. 그래서 어떤 분들에 슬퍼하기도, 또 주저앉기도 하고 아니면 자기를 감추면서 살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한 많은 이들이 각성하고 그것을 통해서 자기뿐만이 아니라 이 사회가 갖고 있는 편견을 바꿔내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요. 그와 같은 노력이 분명한 성과를 내고 있기도 하고요. 사회적 진보라는 부분에서 봤을 때 한국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증언되어야 민중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마지막까지 성취해야 할 지점이기도 하고요. 이런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 퀴어 신학은 저에게 그런 매력이 있는 거죠."

-보다 개인적인 질문으로 넘어가보고자 합니다. 목사님께서는 '맥주에 스미는 인문학'이라는 칼럼을 연재하실 정도로 맥주를 아주 좋아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 술, 인문, 종교 혹은 신학 중 가장 자신 있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술'이라 말하겠다.'라고 첫 번째 칼럼에 적어주셨어요. 사실 맥주와 인문학, 잘 연결시키기 어려운 주제가 아닌가 싶은데요. 어떻게 탄생한 조합일지 궁금합니다. 

"한국이 갖고 있는 음주문화가 사실 굉장히 폭력적이고 권위적이죠. 술자리가 굉장히 위계적 이 잖아요. 술자리가 워낙 남성 중심적이고 성적 불평등 요소가 많다하니 성추행이나 성폭력도 너무 많이 발생하잖아요. 이런 것들이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굉장히 잘못된 부분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저는 생각해요. 저는 술자리에서 술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 술을 함께 마시는 사람에 대한 관심, 그런 게 필요하다고 보고요. 한국의 술자리는 대게 누가 술을 마셨나 안 마셨나, 왜 같이 마시는데 먼저 일어나느냐 뭐 이런 거에 관심이 많잖아요. 술을 따르는데 뭐 술잔이 비어있으면 안된다느니 두 손으로 해야 된다 이런 것 등 쓸데없는 짓 안했으면 좋겠어요. 술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할 수 있다면 저는 바뀔 수 있다고 봐요. 그렇게 해서 술자리가 평등해질 수 있으면 사회 어떤 부분들은 또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편 인문학의 사전적 정의가 '인간의 정치경제, 사회문화, 예술 이런 것들을 망라하여 연구하는 학문분야' 뭐 그런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봤을 때, 사실 술이 있다는 건 술을 재료가 되는 농산물을 재배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잖아요. 노동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빚어 술로 만들어낼 때 역시 노동이 발생하죠. 판매? 역시 노동이죠. 그리고 세금이 책정되어 가격이 정해질 때 어디가 하죠? 국가가 하죠.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술을 마실 땐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등 실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가지요. 결국 술에 대한 이야기엔 인문학이 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금 어려운 질문일 수 있습니다만, 저희가 지금 성적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고 연대를 선언하는 '나는 앨라이입니다' 캠페인의 일환을 인터뷰를 하고 있잖아요. 혹시 연대의 가치가 담겨 있거나 앨라이 캠페인에 어울릴만한 맥주가 있을까요? 

"맥주 두 가지가 생각이 나네요. 첫 번째로 런던 프라이드라는 영국 맥주가 있어요. 동명의 영화가 있기도 하지죠. 엘라이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맺는 연대잖아요? 영화 <런던 프라이드>에서는 성소수자가 탄광파업이라는 사회적 이슈에 연대하죠. 저는 연대란 상호간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한편 그 영화를 보면 연대의 손길이 거부되기도 하고 배척당하기도 합니다. 연대하는 사람이 가진 마음 속 어려움도 발견되고요. 하지만 연대를 통해서 상호간의 기쁨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이 프라이드, 즉 자긍심이라는 거죠.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울기도 했지만, 굉장히 행복했습니다. 특히 그 영화에서 같이 퀴어 퍼레이드 행진을 나가는 장면이 저는 너무너무 감동적이었어요. 근데 마침 런던 프라이드라는 술도 비슷해요. 그 술의 느낌은 굉장히 파워풀하지만 굉장히 달콤합니다. 첫맛은 굉장히 쌉싸름한 보리 같지만 뒷맛은 초콜릿처럼 달달한 느낌이에요. 이런 것들이 처음에는 이질적이지만 함께 어우러지면 달콤해지는 앨라이와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마트에서 런던 프라이드라는 맥주를 보면 벅찬 감정이 들것 같습니다. 두 번째 술은 무엇일까요? 

"두 번째 술은 벡스라는 독일 맥주입니다. 벡스는 브레멘이라는 도시를 대표하는 술입니다. 브레멘 하면 브레멘 음악대라는 동화가 생각나죠. 이 동화를 보면 굉장히 초라한 동물들이 등장해요. 당나귀인데 나이가 많아서 아무것도 못한다거나 닭인데 이제 알을 낳을 수 없다거나 이런 존재들이 등장합니다. 이런 존재들이 인간이 규정한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폐기될 위기에 몰린 건데 그래서 탈출을 감행하죠. 농장도 서커스단도 탈출해서 브레멘에는 자유가 있으니 거기로 가자고 그래요. 

그렇게 떠난 네 마리 동물의 여정 중 만난 숲에서 도둑들이 있는 집을 발견하곤 그들을 쫒아낸 다음에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살아가죠. 아까 말씀드린 그 초라한 존재들이 최선을 다해 각자의 역할을 하고 도둑으로 상징되는 어떤 존재들과 싸워 이기는 겁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사실 마음이 애잔해져요. 처음에 그들은 브레멘에 가기로 했잖아요. 근데 숲에 남습니다. 브레멘에 가지 못해요. 그 얘기는 절반의 성공이기도 하고, 그 약한 존재들이 싸우긴 했지만 끝내 이기지는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시대의 상황이 그 때 만들어지는 이야기에 반영되기도 하잖아요. 동물들은 왜 브레멘에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도시로 가고자 했을까요? 

"봉건질서가 지배하건 시절 한자동맹에 소속된 브레멘은 자유 시민들의 도시였죠. 그래서 이 도시는 왕과 귀족들을 몰아내고 시민들이 그 지역을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브레멘이라는 도시의 정식명칭에는 '프라이(Frei)' 즉 자유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유 한자동맹의 소속이었던 브레멘, 이게 정식명칭이거든요. 그러다보니 이 도시가 주변에 있는 군주들의 나라에게는 늘 눈엣가시였어요. 결국 독일 북쪽을 통일시켰던 강력한 군주국가 프로이센이 이런 자유도시들을 공격합니다. 대부분은 항복해요. 그런데 브레멘은 시민들의 논의 끝에 마지막까지 항전을 결정합니다. 그리고는 도시가 거의 날아갈 정도의 피해를 겪어요. 

브레멘 음악대는 그 이야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곳은 자유였고 그 곳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싸웠지만 끝내 이기지를 못했죠. 그런데 그 싸움이 무의미한가요? 그렇지 않죠.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의 말미에 그런 대사가 나오잖아요. 의병들에게 '당신들은 왜 싸우나요? 이길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아뇨. 우리는 질 겁니다, 그런데 노예로 사는 것 보다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싸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죠. 우리의 지금은 어떤가요? 올해 인천에서 퀴어퍼레이드가 열렸지만 다수의 개신교인들에 의하여 모욕당하고 방해받았으며 물리적 폭력을 겪기도 했죠. 그래서 거기에서 많이 참여하셨던 분들이 고통을 겪었죠. 신체적 고통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들이 있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만, 그것은 바라보는 내내 마음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날은 결국 무대를 제대로 세우지도 행진을 온전히 진행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럼 실패인가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그런 일들을 통해서 더 큰 전진을 하고 있다고 저는 정말 생각해요. 서울에서 우리가 매해 만들어내고 있는 퀴어퍼레이드의 처음은 정말 조그마했지요. 청계천을 한 바퀴 도는 것도 처음에 굉장히 힘들었고요. 그리고 신촌에서는 내내 막힘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시청 광장을 전부 채우고도 남지요. 해방된 공간에서 굉장히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있고요. 이건 수년 동안의 밀고 밀리는 싸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 실패처럼 보이는 일은 결국 성공으로 이어졌죠. 브레멘 이야기 그리고 벡스라는 술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자유의 정신을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인 앨라이 인터뷰에 참여 중이신 고상균 목사님
 종교인 앨라이 인터뷰에 참여 중이신 고상균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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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성소수자 인권 활동에 자연스레 흘러 들어오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또 종교인으로서 목사님께서는 일찍부터 연대에 함께 해주셔서 계기가 없을 것 같지는 않아요. 혹시 성적소수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저한테는 두 가지 정도의 삶의 변곡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학사장교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군 생활을 7년 정도 했어요. 그리고 중대장이란 직책을 가지고 일을 했던 때가 있었는데 제 부하가 어느 날 저에게 찾아와서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그 친구는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었고 굉장히 성실했습니다. 그리고 부대 안에서 상하관계나 친구관계나 매우 훌륭하고 자기의 후임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죠. 정말 멋진 친구였습니다. 저도 뭐 부하들 중에 안 아픈 손가락이 없지만 정말 더 아끼는 병사였지요. 근데 그 친구가 어느 날 밤에 상담을 하러 와서는 '실은 제가 게이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그 순간에 마음속에서 제가 뒤로 싹 빠지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좀 전까지 '어이구 일로 와 일로 와' 이런 마음이었는데. 그 순간에 너무 놀랐어요. 그렇게 특별한 경험은 아니지만 대학시절 어줍지 않은 운동권이었던 저는 스스로 '진보적인 사람'이란 자부심 같은 게 있었어요. 근데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하는 순간에 마음이 그 전과 달리 싸늘해지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왜 이러지? 나는 도대체 뭐였던 거지? 그런 생각을 했죠. 

이게 저도 모르게 제가 갖고 있던 마음속의 혐오를 발견한 계기였어요. 개인적인 문제라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이런저런 문제로 그 친구는 군 생활을 마무리 하고 싶어 했어요. 본인의 성적 지향도 이유 중 하나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러면서 제가 두 번째로 충격을 받았던 것은 그 친구의 고충을 해결해 주기 위해선 결국 성적 지향을 공식적으로 밝혀야했는데, 군 형법상 그는 그냥 범죄자가 되더라고요. 그 뒤로 군형법을 열심히 읽어보게 되었는데, 이건 너무 비합리적인 거예요. 기가 막혔습니다."

-그 때의 개인적인 경험이 지금의 활동으로까지 이어지셨군요. 

"그 때 고민이 시작되었어요. 제 마음의 무의식적인 혐오, 그리고 군이 갖고 있었던 혹은 군으로 대표되는 사회가 갖고 있는 혐오를 아주 극단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였어요. 그러면서 나는 누구이고 내 정체성은 무엇이며 왜 내 마음속에 혐오가 있었나를 생각했죠. 성소수자들이 나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는데. 그리고 사회는 왜 혐오하는가. 이것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신학을 공부했고 제 방법론은 신학적 해석학이니까 이 모든 게 결국 신앙적 고민으로 연결되었어요. 내 신앙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 고민을 가지게 되면서 반성을 많이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2007년의 차별금지법 정국에서 법무부가 제출한 법안이 누더기로 엉망진창이 되었다가 폐기가 됐잖아요. 그 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게 다수의 개신교 단위였죠. 보수 개신교 단위가 대놓고 혐오를 했어요. 그런데 그 때 언론을 봤을 때 보수 개신교계의 목소리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아니다. 이건 너무 너무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 때 저는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라는 곳에서 상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무작정 찾아다녔어요."  

-그 때는 지금보다도 더 성소수자에게 연대하는 종교인이 적었기도 했고 이 문제 자체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져서 함께하는 사람을 구하기 더 어려우셨을 것 같습니다. 어떠셨나요? 

"처음에는 외면을 당한 곳도 많았어요. 이 문제에 함께 대응해야하지 않겠냐고 그러면 관심 없다는 답이 돌아왔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당시에는 향린교회 부목사로 계시던 임보라 목사님을 포함해 몇몇의 개인과 단체를 만나 연대를 형성할 수 있기도 했죠. 이를 바탕으로 개신교에 혐오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연대단위를 조직하기 시작했고. 12월에는 차별하지 않으시는 야훼라는 이름으로 세미나를 개최했어요. 이때의 논의를 기반으로 2008년에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교인 연대(약칭 차세기연)'이 출범이 되었고요.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제가 군복무중 가졌던 고민이 드디어 땅에 닿게 되는 것 같았어요. 이후에는 우리가 신학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하는지 그리고 교회 현장에선 어떻게 대응해야하는지를 고민했죠. 특히 교회에서 아이들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교육할 때 이성애중심적인 내용이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거나, 결혼을 이성간의 결합으로만 이야기 한다거나하는 것이지요. 그런 부분들을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학교에서 이런 교육을 받고 오는 친구들은 교회가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여성 신학, 퀴어 신학, 인문학, 맥주 등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만큼 목사님이 연대를 위해 찾은 현장도 폭넓었다. 사전 조사를 하며 목사님이 소수자들을 위한 다양한 싸움의 현장에서 어려움을 맞이하고 이를 통과해온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목사님은 어떻게 그렇게 연대를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함이 들었다. 어쩌면 그 답이 성적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앨라이가 되려는 사람에게 큰 격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연대는 아름다운 일이라고는 하지만 또 핍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야하기에 험난하기도 하죠. 목사님께서는 성소수자 뿐만 아니라 노동자나 철거민들 편에서도 함께 연대를 하셨고 그 과정에서 큰 충돌 속에 부상을 입기도 하셨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어떻게 두려움을 돌파하고 끝까지 함께 하실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돌파했다는 표현은 저에게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 왜냐면 사실 전 겁이 되게 많거든요. 그리고 의지가 강하고 사명감이 투철해서 뭔가를 이끄는 그런 부류도 아니에요. 사실 그 자리에서도 너무 무서웠고요. 이게 상황이 어떻게 되었냐면 명동에 카페 마리라는 가게가 한창 철거문제를 겪던 때가 있었어요. 잘 아시겠지만 그런 곳에는 용역들이 들이닥쳐서 행패를 부리고 그러는데, 그 날도 용역들이 난입해서는 사장님을 끌어내고 길에 패대기를 치고 그랬죠. 그래서 그분이 다쳤어요. 다치셨는데 가게에서 나가면 안 된다고 버티신 거예요. 그러다 실려 가셨고....... 

그래서 제가 있던 교회 담임 목사님이랑 교인 분들이 가서 항의를 하고 용역들이랑 대치를 하게 된 거죠. 그 주변에 여기저기 흩어져서 향린 교회 교인들이 몰려왔고 저도 함께했죠. 그래서 용역들이 당황을 했죠. 일요일에 아무도 없으니까 빨리 정리하려고 했는데 어디서 이상한 사람들이 왔으니까요.(웃음) 용역들이 굉장히 강하게 밀어붙였어요. 사실 무서웠죠.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러고 저는 조금 있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하는 상황이었거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뜨지 않으셨던 이유가 있으신가요? 

"다른 건 아니고요. 아까 말씀드렸던 그 누워계신 분, 그냥 그거였습니다. 제가 서서 그 용역과 대치를 하고 있는데 다치신 사장님이 바로 뒤에 누워계셨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그 자리를 빠져나가면 그 분이 바로 용역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큰 상황이잖아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았어요. 그걸 연대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정말 컸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도 들었죠. 이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우리는 신이 전지전능하다고 그러잖아요. 전능, 그러니까 엄청 능력이 많죠. 전지, 다 알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순간에 엄청난 힘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용역이잖아요. 두드려 맞는 쪽이 아니라....... 그렇다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신은 용역 쪽에 계실 가능성이 크죠. 근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어요. 하나님은 그 순간에 그 누워계신 사장님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계신다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가서 그 곳에서 고난을 받고 계실 거니까, 그것이 저의 신앙이고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자리에 계시는데 믿는 이들이 떠날 순 없잖아요? 그래서 남았습니다. 결국 용역과 부딪혀서 충돌하기도 하고 갈빗대가 금이 가기도 했지만요. 

그 뒤로도 싸움은 수 일간 이어졌습니다. 교회가 근처니까 지나가면서 용역 깡패들이랑 매일 싸우면서 출근하고 싸우면서 퇴근하고 이런 상황이 이어졌죠. 하지만 그 순간마다 누워계신 그분의 아픔이 느껴졌기 때문에, 그 현장과 분리될 수는 없었습니다."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와 함께 하셨기에 계셨던 곳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함께 연대했던 사람들도 많으셨을 것 같고요. 기억에 크게 남았던 인상적인 순간 혹은 힘을 얻거나 보람을 느꼈던 때는 언제이신가요? 

"말씀 들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떠오르네요. 그 중에 하나를 정하자면 유성기업 노동자들을 들겠습니다. 알고 계시듯이 유성기업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싶어 했다는 이유로 일 하시던 분들을 쫓아냈죠. 그리고 오랫동안 싸워서 부당해고였다는 결정을 받아내서 다시 복직을 했는데 그러고 나서도 말도 안 되는 빌미를 잡아서 또 해고시켰죠. 너무 안타깝죠. 그래서 또 기나긴 싸움이 시작되었죠.  

그런데 그렇게 오랜 투쟁을 이어나가시는 노동자분들이 경제적인 어려움도 겪지만 정신적 어려움도 크게 가지게 되요. 고립감, 고독함, 그리고 이 싸움 우리가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한 두려움.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마음을 아프게 하죠. 그리고 직장에서 쫓겨난다는 건 단순히 일이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단절됨을 의미해요. 함께 일했었던 노동자들과 연락을 못하게 되니까요. 외로워지겠죠. 그래서 이 당시에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습니다. 그중에 수년 전에 한 분이 안타깝게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픔을 알리고자 유성기업 노동자분들께서 서울 광장에 와서 분향소를 조그맣게 설치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것조차 서울시와 경찰이 굉장히 폭력적으로 뭉개버렸어요. 차양을 설치하거나 이런 건 거의 바라지도 않았어요. 깔개 있잖아요. 그걸 깔고 앉아있으면 몸을 밀어트린 다음에 깔개를 뺏어가고 이랬어요. 비가 오는 날에도 그런 지경이었어요. 그러다 제가 일했던 교회에서 사회선교를 담당하는 부서가 이 현장을 발견하고 함께하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몇몇 분들이 그 곳에서 당하는 고난들을 저희에게 알려오기 시작했어요. 그분들이 이렇게 아파하신다고."

-아직 이야기를 전부 듣지는 못했음에도 얼마나 급박하고 열악한 상황이었는지 느껴집니다. 이후의 과정도 녹록치는 않았을 것 같아요. 

"많은 싸움이 있었습니다. 경찰이 밀고 들어오면 맞서서 싸웠고요. 저도 그랬지만 교우들과 목회자들 중에 여러 명이 다치기도 했습니다. 안경이 박살나거나 앰프 같은 장비가 파손되기도 했고요. 하지만 계속 싸워나간 끝에 조그만 분향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어요. 그리고 교인들에 대한 경찰의 폭력을 규탄하기 위해 남대문 경찰서 앞에 수백 명이 모여 기도회를 연 후, 시청 앞 분향소까지 행진을 벌였죠.  

그날 보슬보슬 비가 왔었습니다. 분향소에 가서 교인들과 제가 분향을 드렸죠. 그때 그 과정에 참여했던 노동자분들과 자리를 지켜내셨던 시민사회 활동가분들이 정말 많이 우셨어요. 거기서 그분들이 저에게 말씀해주셨던 것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그 자리에 오랜 시간 계셨거든요, 서울에 올라와서 거의 2주 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제대로 조문을 받아본 적이 없으셨다고요. 분향소를 열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이 자리를 지켜주고 그래서 외롭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해주셨어요. 정말 너무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뭉클했어요. 그때 저희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 느낌이 이 싸움에 우리가 계속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교우 중에 어떤 분들은 집회를 매주 가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도시락을 싸가서 식사를 나누기도 했죠. 그렇게 그 자리를 계속 지키면서 조금이나마 함께했어요. 언론에서 보셔서 아시겠지만 결국은 최근에 유성기업 노동자분들이 겪은 일이 부당했다는 것이 대법원 판결로 나왔죠. 아직은 더 싸워야 되지만 그렇게 작은 승리들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제가 한 일은 아니고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영광이었고 보람 있게 느껴졌어요."  

-다른 목사님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드리는 이야기지만 한국에는 지금 성적소수자의 편에 서는 종교인들의 존재가 절실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러 사례에서 보듯 성소수자에게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 교회나 관련기관에서 억압하고 배제하는 분위기가 있죠. 그래서 종교인들이 자기 소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고요. 

"사실은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분위기를 만든 게 저를 포함한 종교인들이 했던 잘못입니다. 제가 한국 개신교를 대표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지만, 그럼에도 이 점에서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먼저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개신교에는 전 세계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는 하나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의 교회든 아프리카 대륙의 교회든 우리는 하나의 교회인 거죠. 즉 교회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면 사실 그건 남의 일이 아니에요. 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개신교가 극단적인 혐오발언을 하고 있다면 사실 그건 제가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건 절대로 제가 어떤 권위를 갖고 있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사과를 드리고 싶네요." 

-그런 상황에서 최근에 든 생각은 그런 분들이 자괴감에 빠져있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조차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더 많이 다른 소수자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내가 용기가 없어서 내가 못나서 이러고 있다고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수는 강고하고 힘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소수인 어떤 존재는 굉장히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뭔가 한다고 해서 크게 세상이 바뀌지도 않죠. 사실 굉장히 힘들게 무언가를 해도 남는 결과가 없으면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뒷감당은 나 혼자 해야 하니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우린 영웅을 필요로 하는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힘 있는 존재가 나타나 모든 문제를 정리해주면 좋겠죠. 집회에서 앞에 막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을 어떤 존재가 싹 쓸어버려준다던가 하는 것이요. (웃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일정 부분 폭력이 발생할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던 가치일까요? 그건 아니겠죠. 작은이들이 함께 모여서 뭔가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가치잖아요. 강력한 한 사람이 나서서 정리하는 그런 방식은 우리가 취하지 않잖아요. 즉 우리는 영웅이 아니고 더불어 영웅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직은 주저하지만 성소수자의 편에 서고자 하는 예비 앨라이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실까요? 

"연대란 말 너무 어렵잖아요. 그리고 어떤 집단을 지지한다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죠.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요. 친구가 되어보는 것,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친구가 된다면 우리는 친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울 수 있고요.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친구는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죠. 연대는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는 다면 좋겠죠. 
 
체 게바라가 그런 얘길 했죠. 이 세상에서 불의가 저질러질 때마다 함께 분노할 수 있다면 당신과 나는 동지이다. 가령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혐오집단이 방해와 폭력을 저질렀을 때, 많은 이들로부터 그렇게 옳지 못한 일을 당했을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했어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응원을 보냈죠. 그렇게 세상이 정의로워지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단 걸 우리가 느낄 수 있다면, 사실 그런 현장에서 겪었던 아픔이 또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연대라는 말이 어렵다면 우리 친구가 됩시다. 저도 친구가 되려고 노력을 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함께 재밌게 무언가를 해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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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는 비온뒤무지개재단의 '나는 앨라이입니다' 블로그(https://blog.naver.com/i_ally)에도 실립니다. 보다 자세한 인터뷰는 블로그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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