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18 09:52최종 업데이트 18.12.18 09:52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은 오래도록 밀주 동네의 그늘 속에 살아왔다. 그 오래된 그늘이 이제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있다. 어떻게 한산에 밀주가 보존될 수 있었을까 흥미롭다. 그것은 세무서의 단속보다도, 한산 사람들의 부지런한 생활력이 더 힘있게 작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산은 모시를 보존하여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모시나 삼베를 짜는 일이 이 땅에 살았던 여성들의 보편적인 노동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내 외할머니도 베틀에 앉았고, 어머니도 어려서 베틀에 앉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라졌지만 한산에는 남아 있다. 최후까지 남았던 조선의 보부상도 한산이 포함된 저산팔읍(모시가 생산되던 충청도의 여덟 개의 읍 - 부여, 임천, 한산, 홍산, 서천, 비인, 남포, 정산을 말함)의 보부상이다.

시절이 달라져 한산 모시를 짓는 곳이 100가구 이하로 떨어져 문화재로 보호받아야 할 상황이 되었지만, 지금은 모시를 짜던 손들이 움직여 한산 소곡주를 빚고, 모시송편을 만들어 소득을 올리고 있다. 나라 안에 땅을 기반으로 살아가야 하는 농촌 중에서 한산만큼 생산력 있는 고장을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한산소곡주 사업단의 이천희 팀장은 "한산은 인구가 줄지 않는 특별한 농촌 마을입니다, 소곡주 제조장이 65개가 생겼고 앞으로도 더 많은 한산 소곡주 양조장이 생겨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0여년 전에 서천군청 마당에 진지처럼 쌓여진 수매 요구 시위용 쌀더미 사이를 지나 서천군청의 나소열 군수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산에 술 빚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를 양성화시키면 군청 앞에 쌀을 쉽게 소비할 텐데요, 그 농가에 쌀을 나눠주고 술로 돌려받아 정월 대보름에 축제를 하면 단번에 해결할 텐데요"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세월이 흘렀고, 한산에 술 잘 빚는 이들이 면허를 내고 이제 당당하게 술을 빚고 매출을 올리는 상황이 되었다. 그 매출의 규모가 얼마나 될까? 100억 원은 넘어선 것으로 보이는데, 앞으로 더 늘어날 게 분명하다.

술의 선진지 일본에 가다
 

쌀을 담는 천이 줄에 걸려있고, 왼편엔 쌀자루를 옮기는 크레인이 있다. ⓒ 막걸리학교

 
나는 지난 11월 한산 소곡주 4회 축제에 참여하여 한산 소곡주를 맛보았고, 이번에는 한산 소곡주 대표 14명과 함께 선진지 견학으로 일본 니이가타 양조장들을 방문하게 되었다.

일본은 술의 선진지인가? 선진지라 할 만하다. 일본은 음식이라는 상품을 가지고 사치스러울 정도로 요란하게 포장하고, 다양하고 섬세한 제품들을 만들어내는 나라다. 그 음식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게 디자인되어 판매되는 것이 일본술이다.

일본술과 우리술은 주재료가 쌀이라는 점에서 서로를 비교하며 살펴볼 만하다. 한국술은 조선 시대까지는 중국 대륙의 영향을 받았고, 개항기 이후에는 서구 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일본의 영향을 받아 우리 것을 형성해 왔다. 우리를 살피려면, 중국과 일본의 술 기술과 문화를 함께 관찰함으로써 서로의 비교 우위와 차별된 지점을 포착할 수 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일본의 니가타현이었다. 니가타현은 해마다 3월 두 번째 토요일과 일요일에 사케노진 축제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신간센 열차가 서는 에치고유자와 역에 폰슈칸이라는 니가타 술 전문 판매장을 열어 관광 상품화했다.

또 고햐쿠만세키나 코시탄레이와 같은 양조쌀을 개발하여 지역 술을 차별화시켰고, 달달한 일본 술 시장을 담백한 맛으로 변화시켰다. 한국 시장도 적극적으로 공략하여 쿠보타, 하카이산, 코시노칸빠이 브랜드를 진출시킨 고장이다. 한 가지 더 흥미롭게도 니이가타현 오치야시는 모시로도 유명한 동네로, 이미 한산 모시 조합과 교류하고 있었다.

니가타 공항에 내려 처음 찾아간 곳이 타카라야마주조(宝山酒造)였다. 1885년에 창업하여 4대째 운영하고 있는, 살림집이 함께 있는 목조 건물의 양조장이었다. 창업 초기의 목조 건물 안에서 전통을 지키며 술을 빚고 있었다.

술통은 나무통에서 법랑통으로 바뀌었고(지금은 스테인리스통이 대세가 되어 법랑은 이미 옛날 장비가 되었지만) 현대식 여과기가 들어와 있었다. 다만 큰 시루에서 고두밥을 찌는 모습은 예전 방식과 크게 달라지지 않아 보였다.

우리 일행은 고두밥 찌는 모습을 눈여겨 보았다. 소규모 수제로 술을 빚을 때에 가장 힘든 것은 쌀을 옮기고, 뜬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거듭하여 씻고, 물에 한동안 불리고, 솥에 담아 가열하여 충분히 찌고, 냉각대에 옮겨 빨리 식히고, 술통에 담는 연속된 과정이다.

이를 어떻게 단순화시켜 노동력을 절감시키고 있는가가, 거대한 가마솥을 보는 순간 모두들 궁금해졌다. 견학로의 경계선 밖으로 벗어나지 말라는 주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그 솥 가까이 걸음이 옮겨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고두밥은 어떻게 퍼서 식힐까' 했더니

고두밥을 찌는 솥은 물 끓이는 증기솥과 쌀을 앉히는 시루로 분리된다. 일본은 코시키(甑)라는 나무 찜기가 1600년대에 보급되어 대량 생산 체계를 구축하였다. 오래된 증기솥 옆에 레일이 깔려 있고, 그 레일 위로 시루가 열차처럼 움직였다.

시루를 들지 않고, 솥에 물을 부을 수 있게 했고, 고두밥 식히는 곳까지 이동하게 했다. 그렇다면 고두밥은 어떻게 퍼서 식힐까? 시루 옆에 고두밥을 담을 수 있는 컨베이어벨트가 설치된 운반통이 있었다. 하지만 타카라야마주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증기솥 위에 큰 시루를 올려 고두밥을 찐다. 시루를 옮기는 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 막걸리학교

 
남겨진 의문은 다음날 찾아간 눈더미 속에 숙성실을 갖춘 타마카와주조(玉川酒造)에서 풀렸다. 타마카와에서도 증기솥 옆에 레일이 있고, 시루가 레일을 타고 다니는 점은 같았다. 그런데 천정에 긴 레일이 달려있고, 크레인이 레일을 타고 이동하면서 쌀자루를 들어올리고 내리도록 설비되어 있었다.

쌀자루에 한번 쌀이 담기면 그 안에서 씻어지고, 크레인으로 들어올려 물빼기를 하고, 시루에 옮겨지고, 냉각대로 옮겨지는 것까지 모두 해결했다. 전 과정을 자동으로 처리하는 증미기가 나와 있지만, 그들은 옛 것을 고치고 보완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타카라야마주조(宝山酒造)는 1년에 방문객이 1만6천명이 된다고 하니, 하루 평균 40명 넘게 찾아오는 곳이다. 양조장 견학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다다미방 시음장에 들어갔다. 다다미방 문 위에는 "儉則可以傳子孫(검소해야 자손에게 이어진다)"이라고 쓰인 액자가 걸려 있었다. 검소함이 4대째 130년을 이어올 수 있는 동력의 하나였다.

양조업은 대를 이어가기 좋은 사업이다. 한번 이름을 얻긴 힘들어도, 이름을 얻고 나면 술은 익숙하게 소비된다. 술을 소비하는 경향을 보면 처음 본 술은 경계하지만, 익숙한 술은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한산 소곡주 양조장들은 문화재 소곡주 한 곳을 제외하고는 창업한 지 5년 안팎의 양조장들이다. 신생 양조장들이지만, 부모 때부터 술을 빚어온 저력을 지니고 있다.

부모가 하는 일을 자식에게 잘 물려주지 않고, 자식은 부모가 하는 일을 잘 물려받지 않으려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는 부모가 좋아하는 일을 즐기면서 하지 못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자식을 키우기 위해 마지못해 일하다보니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하인에게 넓은 농토를 맡기고 양반은 글을 읽거나 짓는 문화 속을 통과하다보니, 몸을 움직여 노동하는 일에 높은 가치를 두지 않았다. 공부해서 과거 보듯이 시험을 보고 대기업에 들어가고 공무원이 되는 가치를 우월하게 두었지, 단련된 기술로 노동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런 관습들이 가업을 승계하는 문화를 약화시켰고, 술 빚는 기술을 소중하게 다루지도 않는 쪽으로 작동해 왔다.

한산 소곡주 양조장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날개를 펴고 날기 시작한 한산 소곡주 양조인들에게는 너무 멀고 성급한 질문일 수 있다. 하지만 멀리 보고 나는 것과 당장의 먹이감을 찾기 위해서 나는 것은 다르다.

100년이 넘는 집에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해왔던 일을 이어받아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양조업은 대를 이어갈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양조업은 오래된 노동이고 오래갈 노동이기 때문이다.
 

다다미방에서 일본 청주를 시음하는 한산소곡주 양조인들. ⓒ 막걸리학교

 
다다미방 시음장 탁자 위에 우리가 시음할 술 8종이 놓여졌다. 만드는 방법이 다른 술들인데, 원주도 있고, 갓 짜낸 생주도 있었다. 술에 대한 설명서가 탁자 위에 친절하게 붙어 있었다. 시음비는 따로 없다. 우리는 양조장 안주인의 설명을 들으며 술을 시음하기 시작했다. 이 집에서 백년 넘게 해온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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