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4회 우승과 유로 3회 우승에 빛나는 위대한 독일의 축구 역사에서 2018년은 지우고 싶은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1962년의 브라질 이후 56년 만에 월드컵 연속 우승을 노렸던 독일은 러시아 월드컵에서 멕시코와 한국에게 덜미를 잡히며 F조 최하위로 조기 탈락했다. 독일이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아시아팀에게 패한 것도,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것도 역대 최초였다.

독일은 월드컵이 끝난 후에도 전력을 수습하지 못했다. 독일은 올해부터 시작된 UEFA 네이션스리그에서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와 리그A의 1조에 포함됐지만 4경기에서 2무2패를 기록하며 1조 최하위로 다음 시즌 리그B 강등이 확정됐다. 특히 지난 10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네덜란드전 0-3 참패는 독일에게 월드컵에서의 한국전 패배 못지 않은 굴욕이었다.

독일이 최악의 2018년을 보냈다면 반대로 최고의 2018년을 보낸 팀도 있다. 바로 러시아 월드컵 우승팀 프랑스를 제치고 현존하는 A매치 최다 경기 무패 기록(16경기)을 이어가고 있는 동남아시아의 베트남이 그 주인공이다(역대 최고 기록은 스페인의 35경기). 한국의 '쌀딩크'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는 15일 스즈키컵 우승으로 화려했던 2018년의 정점을 찍었다.
 
하노이 미딘경기장 휘날리는 태극기 15일 베트남 하노이 미딘경기장에서 열린 2018 아세안축구연맹 스즈키컵 베트남-말레이시아 결승 2차전에서 베트남 팬들이 베트남 국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하고 있다.

▲ 하노이 미딘경기장 휘날리는 태극기 15일 베트남 하노이 미딘경기장에서 열린 2018 아세안축구연맹 스즈키컵 베트남-말레이시아 결승 2차전에서 베트남 팬들이 베트남 국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하고 있다. ⓒ 연합뉴스

 
AFC U-23 대회 준우승과 AG 4강으로 증명한 베트남 축구의 저력

작년 10월 한국의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대표팀의 사령탑으로 부임했을 때만 해도 한국은 물론 베트남 현지에서도 큰 화제가 되지 못했다. 물론 박항서 감독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중국 U-21 대표팀 감독)을 보좌해 한국의 4강 신화에 기여했고 2007년에는 신생구단 경남FC를 4위로 올린 적도 있다. 하지만 베트남에 부임하기 직전에는 내셔널리그의 창원시청을 맡으며 국내에서도 지도자로 성공적인 행보를 보이지 못했다.

하지만 박항서 감독은 동남아시아의 무명팀이었던 베트남의 체질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난 1월에 있었던 AFC U-23 축구 선수권대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2013년에 시작된 이 대회는 올림픽 예선의 예행연습 정도로 취급을 받기 때문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강국들은 좀처럼 정예 멤버를 보내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규모가 작은 대회라 해도 베트남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가 두각을 나타낼 거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베트남은 6일 베트남 하노이 미딘 국립 경기장에서 열린 2018 스즈키컵 준결승 2차전 홈 경기에서 필리핀을 2-1로 꺾었다. 사진은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박항서 감독.

베트남은 6일 베트남 하노이 미딘 국립 경기장에서 열린 2018 스즈키컵 준결승 2차전 홈 경기에서 필리핀을 2-1로 꺾었다. 사진은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박항서 감독. ⓒ EPA/연합뉴스

 
경기 지켜보는 박항서 감독 15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의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박항서 감독(가운데)이 이영진 코치와 함께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 경기 지켜보는 박항서 감독 15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의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박항서 감독(가운데)이 이영진 코치와 함께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호주, 시리아와 D조에 편성된 베트남은 한국에게 1-2로 패했지만 월드컵 단골손님 호주를 1-0으로 꺾고 8강에 진출했다. 베트남은 8강에서도 초대 대회 우승팀 이라크를 승부차기 끝에 5-3으로 꺾고 4강에 올랐다. 박항서 감독에 대한 베트남 국민들의 시선이 완전히 뒤바뀐 순간이었다. 베트남은 4강에서 카타르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고 우즈베키스탄과의 결승에서 폭설 속에 경기를 치르는 상황에서도 연장 접전을 벌이며 준우승을 달성했다.

베트남의 선전은 각 나라의 연령별 대표팀 정예 멤버가 출전한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베트남은 조별리그에서 시드 배정을 받지 못했음에도 일본을 제치고 D조 1위를 차지했고 토너먼트에 들어와서도 바레인과 시리아를 각각 1-0으로 꺾으면서 또 한 번의 4강 신화를 달성했다. 그리고 박항서 감독은 4강에서 조국 대한민국과 결승진출을 놓고 다퉜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대표팀 감독으로 베트남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지만 결사항전(?)의 각오로 아시안게임에 임한 한국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준결승에서 한국에게 1-3으로 패한 베트남은 3-4위전에서도 UAE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하며 노메달에 머물렀다. 하지만 아시안게임 4강은 베트남에게는 기대를 훌쩍 뛰어 넘는 훌륭한 성적이었고 박항서 감독은 일약 베트남의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스즈키컵 우승으로 만든 박항서호의 해피엔딩, 이젠 아시아의 복병
 
작전 지시하는 박항서 감독 15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의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박항서 감독이 교체선수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 작전 지시하는 박항서 감독 15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의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박항서 감독이 교체선수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 연합뉴스

  
경기 지켜보는 박항서 감독 15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의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박항서 감독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 경기 지켜보는 박항서 감독 15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의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박항서 감독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에게는 월드컵과 올림픽, 아시안게임, 아시아컵이 가장 중요한 축구대회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지난 2003년 동아시안 축구 챔피언십이라는 이름으로 창설된 EAFF E-1 풋볼 챔피언십(이하 동아시안컵)의 경우엔 상대적으로 큰 무게를 두지 않는다. 한국은 지난 8번의 동아시안컵에서 4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최다우승국이지만 한국축구가 동아시안컵 최다우승국이라는 타이틀을 업적으로 내세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스즈키컵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현실적으로 월드컵이나 아시안컵 같은 메이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힘든 만큼 동남아시아 축구연맹(AFF) 가입국들만 출전하는 스즈키컵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겐 '작은 월드컵'으로 불린다. 특히 라오스와 캄보디아, 동티모르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의 전력이 비슷한 편이라 모두가 우승을 노릴 수 있고 그만큼 우승은 쉽지 않다.

하지만 AFC U-23 대회 준우승과 아시안게임 4강을 통해 자신감을 부쩍 끌어 올린 베트남은 2008년 이후 통산 2번째 스즈키컵 우승을 차지했다. 베트남은 원정 1차전에서 두 골을 넣었기 때문에 2차전에서 0-0 혹은 1-1로 비기기만 해도 우승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항서 감독은 수비적인 전술을 지시하지 않았고 베트남은 전반 6분에 터진 응우옌 아인득의 결승골을 지키며 1-0으로 승리했다. 6승 2무라는 전적으로 만들어낸 완벽한 우승이었다.

박항서 감독은 우승이 결정된 후 인터뷰에서 "이 우승을 베트남 국민들에게 바친다"고 고마움을 전하면서도 "제 조국인 대한민국도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현지에 중계진을 파견하고 지상파에서 생중계할 정도로 국내에서도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스즈키컵 결승 2차전은 합산 시청률 21.9%(케이블 시청률 포함)를 기록하며 말 그대로 '대박'을 쳤다. 주관 방송사 SBS로서는 주말 드라마를 결방한 보람(?)이 느껴지는 결과였다.
 
  15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의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박항서 감독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15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의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박항서 감독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올해 출전한 3개의 국제대회에서 준우승과 4강, 우승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베트남은 2018년의 기쁨을 접고 내년 1월 아시안컵을 통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내년 3월에는 스즈키컵 우승팀의 자격으로 동아시안컵 우승팀 한국과 '2019 AFF-EAFF 챔피언스 트로피'에서 맞붙을 예정이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아시아 축구의 변방에 불과했던 베트남이 2018년 한 해 동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강호들을 위협하는 '복병'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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