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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사태 당시 거리로 나와 한일협정 조인 반대를 외치는 시민과 대학생들. 6.3사태 당시 거리로 나와 한일협정 조인 반대를 외치는 시민과 대학생들.
▲ 6.3사태 당시 거리로 나와 한일협정 조인 반대를 외치는 시민과 대학생들. 6.3사태 당시 거리로 나와 한일협정 조인 반대를 외치는 시민과 대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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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 다시 시대의 먹구름이 몰려왔다. 

박정희는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걸었던 경제개발에 대규모 투자재원의 확보를 위해 일본자본을 유치하고자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미국이 소련의 팽창을 견제하고자 한일관계 정상화를 요구하면서 이해가 맞닿았다.

박정희는 한일회담을 강행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밀사로 파견하여 '김ㆍ오히라 메모'를 통해 굴욕적인 회담을 밀실에서 진행하고, 이같은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한일관계는 한국인들에게는 지극히 민감한 분야다.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는 일제 35년 동안 저질렀던 온갖 만행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일본에 구걸하다시피 매달렸다. 
 
 오히라(大平)일본외상과 회담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 부장(62.10.20)
 오히라(大平)일본외상과 회담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 부장(62.10.20)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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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박정희의 실체와 처한 상황을 훤히 꿰고 있기 때문에 더욱 고자세를 취하였다. 심지어 일본 측 한일회담 대표 쿠보타가 "일본의 통치는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따위의 망언을 하였다. 

밀실의 한일회담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에서는 1963년 신학기부터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굴욕회담을 비판하는 시위가 전개되었다. 야당과 재야에서도 가세했고 시민들도 나섰다. 학생들의 반대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고 5ㆍ16 이후 폭압정치에 눌려 있던 국민이 굴욕회담을 계기로 다시 폭발하는 형국이었다.

정부가 1965년 2월 20일 굴욕적인 내용을 그대로 둔 채 한일기본조약을 가조인하자 학생시위는 6월 3일에 절정을 이루었다. 서울에서는 6월 3일 학생과 시민 1만여 명이 경찰저지선을 뚫고 박정희 퇴진을 요구하면서 광화문까지 진출하여 청와대 외곽의 방위선을 돌파하였다. 
  
 1962년 11월12일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무장관이 대일 청구권 문제를 타결지을 당시 작성된"김-오히라 메모"원본.
 1962년 11월12일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무장관이 대일 청구권 문제를 타결지을 당시 작성된"김-오히라 메모"원본.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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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이틀 앞선 6월 1일 원주에서는 대성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벌였다. 원주고생 300여 명은 굴욕외교반대 플랭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와 "배고픈 우리살림 6억 원(실제는 무상 3억, 상업차관 2억 달러ㅡ필자)으로 잘살 수 없다", "이완용 2세들아 각오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원주시청 앞까지 진출하였다. 

대성고등학생들이 전국의 고등학생으로는 처음으로 시위에 나선 것이다. 학생들은 장일순 이사장이 노랫말을 붙힌 교가를 힘차게 부르며 교문을 나섰다. 

 힘차라, 대성의 명랑한 건아야!
 희망이여, 크거라, 세계를 위하여!
 이상을 닦아라, 인류를 위하여!


학생들은 시청 앞 광장에 모여 "굴욕외교를 즉시 중단하라"는 결의문을 채택한 다음 다시 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은 출동한 경찰의 제지를 받고 30분간 연좌 데모를 하다가 학교로 돌아왔다. 이 시위로 대성고 학생대표 7명이 퇴학처분을 받았다. 

장일순은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이사회에 사표를 냈다. 김재복 교장도 뒤를 따랐다. 명분은 '도의적 책임'이었지만 학교를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경찰은 시위 주도 학생들을 체포하고 "배후가 장일순 이사장 아니냐"고 닦달했다. 제자 최정옥의 증언. 

시위를 마치고 교문에 들어서려는 순간 주동자 7명을 순식간에 체포한 거에요. 제가 제일 먼저 잡혔죠. 제가 주동자인줄 알고 저부터 딱 찍어놨겠죠. 귀신같이 알더라고요. 회장까지 7명이 원주경찰서로 바로 잡혀갔어요. 밤새 취조를 받았어요. 배후가 누구며 플랭카드 만드는 돈은 어디서 났는지 집요하게 묻고 추궁하더라고요.

특히 무위당 선생님이 배후가 아니냐며 다그치는 거에요. 이미 경찰들은 무위당 선생님을 시위의 배후 조종자로 만들려고 각본을 짜놓고 있었던 거 같았어요. 저희들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시위를 한 거지, 누구의 조종을 받아서 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죠.

원주경찰서장이 해병대 중령 출신이었는데 저희가 배후를 불지 않는다고 생각하고는 7명을 한 사람씩 독방에 가둬놓고 취조를 했어요. 취조원들이 배후를 밝혀내지 못하자. 경찰서장이 제가 있는 방에 들어오더니 "이 빨갱이 같은 새끼!" 라면서 연탄집게로 내 등을 후려치는 거예요. 눈이 번쩍하더라고요.

더 맞기 전에 배후가 누군지 순순히 말하라는 거예요. 내가 "배후가 없습니다. 학생들이 순수한 마음에서 데모한 겁니다. 우리는 장일순 선생님을 만난 적도 없다"고 악을 썼죠. "플랭카드도 우리끼리 돈을 모아서 만든 거다"라고 말했어요. 다른 학생들도 저와 똑같은 얘기를 했어요.
(주석 1)

박정희 정권은 6월 3일 시위대가 청와대 앞까지 이르자 극도의 위기감에서 이날 저녁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주도 학생들을 구속하면서 휴교령을 내리고, 굴욕회담의 협상 내용을 국회에서 공화당의원만으로 비준했다. 

장일순은 대성학교의 이사장은 물론 이사직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정부 당국이 정보기관을 앞세워 학교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었다. 학생들의 데모를 선동하지는 않았지만 이사장의 교육정신ㆍ민주주의와 참된 인간이 되라는 실천교육은 학생들이 불의에 도전하는 정의감으로 발현되고, 이것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고등학생들의 시위로 나타났다. 

참된 교육자가 되고자 했던 장일순의 꿈은 독재정권의 칼날 아래서 접어야 했다. 이후 전개한 사업(일)이 큰 테두리에서 보면 '교육'에 속하지만, 이로써 일단 '일선교육'의 현장에서는 물러나야 했다.

학교를 세운 장일순은 춘추 학기에 나오는 공자님의 교학상장(敎學相長)을 강조했다. 이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나뉘고 고정된 것이 아니며 교육의 본질은 인간다운 삶을 함께 배우고 느끼는 의식의 상호작용이라는 의미였다. 그의 교육철학은 '어미 닭과 병아리가 동시에 알을 쏜다'는 줄탁동시(啐啄同時)의 관점에 서 있었다. 

"알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해 안에서 쪼는 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 닭이 새끼가 알에서 나오는 것을 돕기 위해 바깥에서 쪼는 것을 탁이라고 하거든. 그 둘이 맞아야 한다. 이 말이야. 어린아이가 신이 나서 하게 해야지, 부모가 억지로 당긴다고 되나? 안되지!" (주석 2)

주석
1> <최정옥 선생님 인터뷰>, '무위당 사람들' 제공.
2> 이창언, 앞의 책, 2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위당 장일순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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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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