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에 이어, 이번에는 '신대방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원풍모방 노조 터 - ②세왕전기 터 - ③한영섬유 노조 터 - ④보라매공원 - ⑤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한국학생건국운동공적비 - ⑥김마리아 동상 - ⑦동작청소년성문화센터 '더하기' 
 
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보라매공원) 충혼탑은 1989년 8월 15일 보라매공원 남서쪽 연못가에 세워졌다. 충혼탑 앞면에는 '반탁승리'라는 백범 김구의 휘호가 새겨져 있다.
▲ 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보라매공원) 충혼탑은 1989년 8월 15일 보라매공원 남서쪽 연못가에 세워졌다. 충혼탑 앞면에는 "반탁승리"라는 백범 김구의 휘호가 새겨져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과 '한국학생건국운동공적비'

보라매공원은 시립공원이라 서울시가 설립을 허용한 조형물이 공원 안 이곳저곳에 많이 있다. 그중 하나가 공원 남쪽 연못가에 나란히 설치돼 있는 '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反託反共殉國學生忠魂塔, 아래 충혼탑)과 '한국학생건국운동공적비'(韓國學生建國運動功績碑, 아래 공적비)다. 이곳에서는 매년 '순국·전몰학생 합동추모제'가 열린다.

충혼탑과 공적비는 (사)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가 설립한 조형물이다. 충혼탑은 광복 44주년을 맞는 1989년 8월 15일에 세워졌고, 공적비는 2004년 11월 19일에 건립됐다. 

두 기념비는 모두 해방정국에서 대표적인 우익 학생단체였던 전국학생총연맹(학련)과 그 위원장을 맡았던 이철승(1922~2016)과 깊은 연관이 있다. 두 조형물을 설치할 당시 기념사업회의 회장도 이철승이었다. 이철승은 해방 정국에서 김성수 등의 자금지원을 받아 대한민주청년총동맹의 유진산과 더불어 반탁반공운동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이철승은 1971년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의 공화당에 맞섰던 신민당의 대선후보 선출 과정에서 김대중·김영삼 후보와 더불어 3파전을 형성했던 40대 기수 중 하나기도 했다. 유신시절 당시 이철승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맞선 선명 야당을 요구하던 국민적 기대와 달리 중도통합론을 제기해 '사쿠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은 이름만으로도 그 건립 취지를 짐작케 하지만, 충혼탑 뒷면에 새겨진 글을 보면 구체적인 취지를 알 수 있다.

"조국과 민족자유와 독립, 그리고 자유와 민족주의를 지키기 위해 산화한 꽃다운 젊음이 여기 있다. 1945년 연합국이 일제로부터 한국의 해방을 돕는가 싶더니 38선을 그어 강토를 두동강이 내고는 마침내 자치능력이 없음을 들어 신탁통치를 후견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였을 때 조국의 젊은 지성들은 전국 도처에서 분연히 일어나 신탁통치 반대의 열화와 같은 결의를 내외에 선포하고 싸웠다.

이것이 곧 반탁운동이었으니 3·1항일운동에 이은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 신탁을 받아들여 이 나라를 외세의 멍에 아래 두려던 공산도배들의 흉계를 반탁으로 분쇄하고 민족사의 전통을 바로잡아 나라를 세운 뒤 1950년 김일성 집단의 6·25남침으로 대한민국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 했던 민족적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 백만 학도들은 궐기하여 붓 대신 총검을 잡고 나아가 싸워 국토와 민족,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를 끝까지 목숨으로 지켰다. (생략)"


해방정국의 반탁과 한국전쟁 당시 반공을 위해 목숨 바친 청년 학생들의 충혼을 달래기 위해 건립됐음을 알 수 있다. 충혼탑 옆에 있는 공적비는 좀 더 분명하고 구체적이다.

"대한민국은 신탁통치 반대와 반공의 승리로 건국되었다. 해방의 감격이 채 가셔지지 않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로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자주독립을 절규한 삼천만 동포는 남과 북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신탁통치 반대를 위해 총궐기하였다.

그러나 소련과 공산당세력이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좌우대립과 분열, 강토의 분단을 부르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백만 애국학도들은 1946년 1월 반탁전국학생총연맹을 결성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기까지 반탁 반공독립투쟁에 앞장서 이 나라 건국의 선봉대가 되었다.

반탁은 곧 반공운동이 되었으며 또한 자유민주운동이었다.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내세우며 자주독립국가의 수립을 방해하던 좌익계열은 학원소요 UN결의에 따른 남북총선거 저지운동과 테러 등 온갖 방법으로 남한사회의 혼란을 조장하였으나 전국학련을 선두로 애국청년학생과 반공 민족진영은 혈투로써 이들을 몰아내어 신생 대한민국을 탄생시켰다.

민족반역자 김일성의 6·25남침을 맞아 우리 전국학련구국대는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여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우리 백만학도의 반탁반공운동이야말로 3·1운동에 버금가는 독립운동이었다. (생략)"


이를 통해 우리는 보라매공원의 충혼탑과 공적비가 '대한민국은 3·1운동에 버금가는 독립운동(또는 제2의 3·1운동)인 반탁반공운동의 승리로 건국되었다'는 이철승을 위시로 하는 (사)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의 인식에 기반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반탁반공건국학생공적비(보라매공원) 공적비는 2004년에 세워졌다. 전면에는 이승만의 '남북통일', 뒷면에는 김구의 '진충보국'이라는 휘호가 새겨져 있다.
▲ 반탁반공건국학생공적비(보라매공원) 공적비는 2004년에 세워졌다. 전면에는 이승만의 "남북통일", 뒷면에는 김구의 "진충보국"이라는 휘호가 새겨져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대한민국이 반탁반공의 승리로 건국됐다고?

그런데 이상하다. 대한민국 현행 헌법(10호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된다. 

1948년 7월 17일에 선포된 제헌헌법 전문에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로 시작된다. 

대한민국 헌법은 1919년 3.1운동의 결과 대한민국이 이미 건립됐고, 1948년 8월 15일은 해방정국에서 대한민국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대한민국 정부를 정식으로 '수립'한 날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3·1운동의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사상과 이념을 떠나 일제로부터 자주독립에 동의하는 모든 세력과 인사들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반공'을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로 내세울 수 없다는 점도 명백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를 이끈 사회주의자였으며,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지명하는 등 국내에서 '한성임시정부' 구성을 주도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알리는 국민대회를 이끈 인물의 하나도 저명한 사회주의자 김사국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 반탁반공운동의 승리로 건국되었다'고 보는 보라매공원의 충혼탑과 공적비의 시각은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로써 우리는 박근혜 정부 시절 추진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과정에서 제기된 '8월 15일을 건국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건국절 논란을 불러일으킨 인사들과 보라매공원의 충혼탑과 공적비가 궤를 함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2019년이 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라는 점을 상기해볼 때 충혼탑과 공적비의 이러한 시각은 비판적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반탁'은 과연 절대선이고 정의였을까?

충혼탑과 공적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또 발견된다.

충혼탑 아랫단에는 백범 김구의 '反託勝利'(반탁승리) 휘호가 쓰여져 있고, 공적비 아랫단에는 우남 이승만의 '南北統一'(남북통일) 휘호와 김구의 '盡忠報國'(진충보국) 휘호가 앞뒤로 새겨져 있다. 이철승이 백범 김구의 '反託勝利'(반탁승리) 휘호를 1946년 1월 반탁학련 결성 직후 경교장에서 받았다고 증언(<한국현대사증언 TV자서전>, KBS)한 것으로 보아 다른 휘호도 이승만과 김구로부터 직접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해방정국에서 김구와 이승만의 노선이 달랐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두 사람의 휘호가 충혼탑과 공적비에 함께 새겨져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국 현대사는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아픈 역사를 만들어냈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여전히 우리의 지상 과제로 남아 있다. 이런 점에서 학계는 물론 현행 역사 교과서도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반탁반공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재평가의 핵심은 '반탁'을 절대화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점이다. 당시 반탁운동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미·영·중·소 4대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실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본격화됐다. 

이를 계기로 좌우갈등이 본격화됐고, 결국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남과 북에 두 개의 나라를 세우는 결과로 귀결되고 말았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동아일보의 오보 기사(1945. 12. 27)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발표되기도 전에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는 제목의 오보(가짜뉴스)를 냈다. 이는 미군정과 맥아더 태평양사령부의 '공작'의 결과물이었다.
▲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동아일보의 오보 기사(1945. 12. 27)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발표되기도 전에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는 제목의 오보(가짜뉴스)를 냈다. 이는 미군정과 맥아더 태평양사령부의 "공작"의 결과물이었다.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동아>와 <조선>의 가짜뉴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해방 직후에는 좌우를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조선의 즉각 독립에 찬성했기 때문에 신탁통치 반대가 '반소·반공'과 결합될 여지는 없었다. 그런데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소식이 잘못 전달되면서 '반탁'이 '반소·반공'으로 급격히 치닫게 됐다. 그 중심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오보사건'이 있었다.

<동아일보>는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조선에 관한 결정'이 발표되기도 전인 12월 27일 1면 톱으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렴/ 미국은 즉시 독립주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반탁 운동을 격화시키는 도화선 역할을 했고, 이후 상당 기간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조선에 관한 결정' 보도에 대한 국내 신문의 태도와 그 방향을 결정했다.

"번즈 미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조선의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1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至急報))."

하지만 이 기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맞는 말이 하나도 없는 '가짜뉴스'였다.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당연히 번즈 미국무장관이 받은 훈령은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조선의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번즈는 '최대 10년간 신탁통치 실시'(5년 실시 5년 연장 가능)라는 미 국무성안을 들고 모스크바로 떠났다. 미국이 "카이로 선언에 따라 국민투표로 정부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사실도 없었고, 소련이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1국 신탁통치를 주장"한 사실도 없었다. '적절한 과정을 거쳐(적절한 시기에)' 조선이 독립될 것임을 약속한 카이로 선언에 '국민투표를 통한 정부형태 결정'과 같은 내용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다.

소련은 오히려 "조선인들로 구성되는 조선임시민주정부 수립'을 관철하고, 최대 10년의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미국에 대해 "조선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발전과 독립국가의 수립을 원조 협력할" 5년 이내의 "4개국 후견제(신탁통치)"를 주장해 신탁통치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한편 그 기간도 대폭 축소했다.

한마디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소설을 쓴 셈이었는데, <동아일보>는 '탁치문제의 혼선을 보고'라는 제목으로 1946년 1월 11일부터 1면에 연재한 설의식(주간)의 글을 통해서도 "신탁통치는 소련이 주장"했다는 '가짜뉴스'를 반복해서 내보냈다. 그런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이 보도는 두 언론사의 순수 창작물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실제로 <동아일보>의 기사는 도쿄에서 발행되는 미국 <태평양 성조기>의 12월 27일 자 기사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했다. 하지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난 날짜 역시 27일인 점을 감안할 때 두 언론이 미국 <태평양 성조기> 기사를 인용했다기보다는 미국 <태평양 성조기>와 국내 언론에 영향력을 동시에 행사할 수 있는 세력의 '공작'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동아일보>가 기사의 출처를 <태평양 성조기>가 아닌 '워싱턴 25일발 합동'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공작'의 배후는 미국 정부의 입장과 달리 반탁운동을 반소·반공운동으로 몰아가려고 했던 하지의 미군정과 맥아더의 미태평양사령부로 압축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한국 언론의 이 '오보 소동'은 소련이 타스통신을 통해 모스크바 현지 시각으로 1946년 1월 24일 "삼상회의에서 신탁 통치의 원래 제안자는 미국이었다"라면서 미국 측 제안 내용은 물론 협상 전말까지 자세히 공개하는 강수를 둔 다음에야 일단락될 수 있었다(<한반도 신탁통치안>, 정용욱).

백범 김구의 '반탁'과 우남 이승만의 '반탁'

김구와 이승만은 그 누구보다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반탁'운동에는 다른 점이 있었다. 백범 김구가 즉각적인 자주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대의를 위해 반탁운동에 앞장섰다면, 이승만은 자신의 정국주도권 확보를 위한 과정에서 반탁운동을 철저히 활용했다.
 
백범 김구와 우남 이승만(1946 창덕궁) 김구와 이승만은 서로 손을 잡고 있지만, 해방정국에서도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목표로 했던 김구와 자신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목표로 했던 이승만의 정치적 지향은 서로 달랐다.
▲ 백범 김구와 우남 이승만(1946 창덕궁) 김구와 이승만은 서로 손을 잡고 있지만, 해방정국에서도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목표로 했던 김구와 자신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목표로 했던 이승만의 정치적 지향은 서로 달랐다.
ⓒ 한국역사연구회

관련사진보기

 
실제로 백범 김구는 반탁의 열기를 임정법통론에 입각한 정부수립운동으로 연결시켰다. 임정은 자신이 주도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를 통해 '임정의 절대 수호'와 '외국 군정 철폐'를 요구했고, 12월 31일의 반탁 시위 대회에서는 "3천만 전 국민이 절대 지지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우리의 정부로서 승인함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국민총동원위원회는 전국 총파업을 결의했고, 임정의 내무부장 신익희는 '국자(國字) 1⋅2'호 포고를 발표해 정권 접수를 선언했다.

하지만 백범 김구의 즉각적인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은 이를 '쿠데타'로 규정한 미군정의 반격으로 무산되고 만다. 미군정의 압력으로 임정의 엄항섭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신들의 반탁운동은 미군정에 반대하는 운동이 아니라고 공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미·소 합의하에 통일정부가 들어서면 자신이 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이승만은 미군정과 갈등을 빚기 보다는 반탁운동이 반소·반공운동으로 발전하도록 유도하면서 이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적절히 활용했다.

해방이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힘으로 이뤄지지 않았고, 남과 북에 각각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실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반탁운동이 반소·반공운동으로 발전하는 순간 이는 결국 분단정부 수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그걸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결국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자신의 구상을 현실화시켜내는 데 성공했다.

반면, 백범 김구는 임정이 남한을 장악하고 만주에 파견한 박찬익, 김학규, 김홍일 등 한국독립당 멤버들이 장개석과 협력해 만주의 한인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면, 양자 협공으로 북한에 진주한 소련과 공산당 세력을 몰아내고 자주적인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이뤄낼 수 있다는 구상을 실천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김구는 1948년에 이르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에 나서지만, 애석하게도 분단을 막기엔 때가 늦은 상화이었다. 

해방정국에 대한 회한과 반성,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물론 한국인의 자치역량을 무시하고 즉각적인 독립을 보장하지 않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탁치)은 결코 환영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절대지지!" 입장을 밝힌 조선공산당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삼상회의의 결정을 수용하는 것과 독립 달성은 결코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은 이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만약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수용하면서 전민족의 역량을 결집해 '조선임시민주정부'를 만들어냈다면 분단과 전쟁으로 얼룩진 민족사의 비극을 피하는 것은 물론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통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의 길이 열리지 않았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충혼탑과 공적비 앞에서 다시 생각에 잠긴다. 서로 접근법이 달랐던 김구와 이승만의 휘호가 함께 있는 보라매공원의 충혼탑과 공적비는 민족진영 내부의 상황마저 정확히 보여주지 못하는 조형물이다.

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반탁반공운동을 1919년의 3·1운동에 이은 제2의 독립운동'으로 보는 충혼탑과 공적비의 시각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정신과 헌법정신에 맞춰 바로잡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입니다.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