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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두 지도를 봅니다.

첫 번째 지도는 오늘날로 치면 스페인의 발렌시아 출신 이슬람 지리학자이자 시인이며 여행가였던 이븐 주바이르(Ibn Jubayr, 1145~1217)가 1180년대 중반에 여행했던 경로입니다. 두 번째 지도는 조선 초의 세계지도 '강리도'의 재현본에서 따왔습니다.

믿어지지 않지만 12세기 주바이르가 방문했던 곳의 대부분의 지명 즉, 발렌시아, 알렉산드리아, 카이로, 바그다드 다마스커스, 메카 등이 강리도에 뚜렷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예전에 소개한 바 있습니다.
  
팔레르모 등이 나타난다
▲ 이븐 주바이르 여로 팔레르모 등이 나타난다
ⓒ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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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리도 재현본의 부분도
▲ 강리도 강리도 재현본의 부분도
ⓒ <대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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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첫 번째 지도를 봅니다. 지중해 한 가운데에 팔레르모(Palermo)라는 지명이 보입니다. 이곳은 27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古都)로서 지중해 최대의 섬 시칠리아(시실리)의 중심 도시입니다. 과연 강리도에는 시칠리아와 팔레르모가 나와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시칠리아는 어떤 곳?

먼저 시칠리아로 떠납니다.
 
오, 나의 시칠리아
내 기억속에서 그대를 향한 절망적인 그리움과
내 젊은 날의 우행이 되살아 난다.
또다시 나는 본다
잃어버린 행복과 그 빛나던 친구들을
오, 내가 추방된 낙원이여,
돌아오지 않는 빛이여!
- Ibn Hamdis(~1130)
  
지중해 일대
▲ 지중해 일대 지중해 일대
ⓒ connectedmediterranean.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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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는 제주도의 1.4배 정도되는 매우 비옥한 섬. 예로부터 많은 인종이 살아왔고 로마제국이 곡창으로 삼은 이래로 지중해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제국 멸망 후 비잔틴 제국에 속해 있다가 9세기 말에 이슬람에 정복당했습니다.

그때 현지인들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 하나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금을 내며 비무슬림으로 살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더러는 개종하고 더러는 하지 않으면서 공존했습니다.

무슬림 통치는 2세기 후에 끝납니다. 11세기 말에 이르러 노르만족이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시실리 왕국을 세웁니다. 무슬림을 배척하지 않았던 초기 시실리 왕국은 무슬림, 기독교인이 혼거함으로써 비잔틴, 아랍, 라틴 문화가 공존하는 일종의 용광로가 되어갔습니다. 이를 잘 반영해주는 건축물이 1132년에 로저 2세 치하에 건설된 팔라틴(Palatine) 예배당입니다. 비잔틴 모자이크에 아랍풍 궁륭과 천장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문화의 교배가 낳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저 2세는 돌출적인 개방 군주로서 시실리 왕국에 다문화의 황금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는 모로코의 세우타 출신 이슬람 학자 알 이드리시를 궁정에 초빙해 세계지도 제작을 위촉했습니다. 1154년 팔레르모 궁정에서 세계지도의 압권이 나왔던 배경입니다. 그로부터 약 250년 후 조선의 한양에서 강리도라는 세계지도의 걸작이 만들어집니다. 유라시아의 서와 동에서 긴 시간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이 두 지도는 서로 통하는 점들이 있습니다.
  
시칠리와 한국
▲ 알 이드리시 지도 시칠리와 한국
ⓒ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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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와 한양
▲ 강리도 시칠리와 한양
ⓒ 류코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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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이드리시는 우리나라를 여섯 개의 섬(아래 그림에서 우측 위쪽)으로 그리면서 '실라(신라)Sila'라 표기했습니다. 중화권 밖에서 최초로 우리나라를 그린 세계지도가 바로 이 지도입니다(훗날 유럽인들도 한반도를 지도에 그리게 되는데 상당기간 동안 섬으로 나타냄). 물론 강리도도 알 이드리시의 고국 모로코와 그 도시들을 표시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예전에 소개한 바 있습니다.
  
중국남부와 신라
▲ 알 이드리시 지도 중국남부와 신라
ⓒ 옥스포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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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이드리시 지도의 지명 중에 많은 것들이 강리도의 서방 지역(아프리카, 중동, 유럽)에 공유돼 있습니다. 나일강의 수원과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도 두 지도가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알 이드리시지도와 강리도
▲ 나일강의 수원 알 이드리시지도와 강리도
ⓒ 김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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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개명 군주 로저2세와 이슬람의 대학자 알 이드리시가 만나 종교와 민족을 넘어 세계지도를 낳았던 시칠리아 및 팔레르모. 그 유서깊은 곳이 강리도에 나타나 있지 않다면 허전할 것입니다. 아래 그림을 먼저 봅니다.

강리도 속 시칠리아
  
강리도의 두 판본
▲ 시칠리아 강리도의 두 판본
ⓒ 김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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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는 강리도의 15세기 모사본(류코쿠본)이고 두 번째는 16세기 모사본(혼코지본)인데 카자흐스탄의 룰란이 지명을 해독해 놓고 있습니다. 보다시피 혼코지 본의 동그라미 안에 (撒哈里那, '사하리나')라는 지명이 적혀 있습니다. 눌란에 의하면 이 지명이 시칠리아를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고 합니다. 아랍어 (발음) '시칼(할)리아Siqalia'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죠.

신기하게도 시칠리아는 중국 남송시대의 지리서 <제번지諸蕃志>(1255)에도 등재돼 있습니다(Nurlan Kenzheakhmet <The Silk Road 14(2016)> 114쪽). 늦어도 13세기 중반에는 시칠리아가 중국에 알려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 지도에서 동그라미의 지리적 위치가 시칠리아 섬과 부합하지 않는 점이 의아스럽습니다. 동그라미는 어쩜 섬의 형상이라기보다는 단지 오른쪽 시칠리아 섬의 이름을 별도로 표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태리 아래의 섬(시칠리아 섬의 위치)을 몰타 섬으로 보는 룰란의 해석은 오류가 됩니다. 어쨌든 강리도가 시칠리아의 지명을 적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고 이 점이 충분히 인상적입니다.

이제 시실리 왕국의 수도였던 팔레르모를 찾아볼 차례입니다. 보다시피 위의 지도에서 섬에 아무런 지명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류코코본과 혼코지 본 말고 다른 판본이 둘 존재합니다. 16세기 중·후반에 조선에서 제작된 것으로서 하나는 일본 나라시의 텐리(天理) 대학, 다른 하나는 구마모토(熊本)시의 혼묘지(本妙寺)에 소장돼 있습니다. 이 두 판본에는 팔레르모라는 지명으로 추정되는 글자가 적혀 있다고 합니다(일본 교토 대학 스기야마). 그중 텐리대학 본(부분도)을 여기 가져와 봅니다.
 
강리도 텐리대본 부분도
▲ 강리도 텐리대본 강리도 텐리대본 부분도
ⓒ <대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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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축소된 이미지라서 식별하기 힘들지만 지중해 가운데 있는 섬에 몇 개의 지명을 적어 놓았습니다(붉은 화살표). 거기에 法里桑('파리상')이 적혀 있는데 팔레르모로 추정된다는 것이지요. 만일 '桑' 이 '莫'의 오기라면 '파리모'가 되어 발음이 더욱 근접하게 됩니다(스기야마).

하지만 '파리상'으로도 개연성이 다분합니다. 桑은 발음과 관계 없이 중국과 우리나라의 옛 지도에서 알 수 없는 먼 곳의 지명에 나오는 글자이기도 합니다(이를테면 '扶桑'). 시칠리아 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팔레르모인 점을 고려하면 이걸 빼 놓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세계지도의 요람 중의 하나로서 팔레르모는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다음은 1184년 이곳을 방문한 이븐 주바이르의 목격담입니다.
 
"이곳은 여기 섬들의 대도시이다. 재화로 가득차고 광채로 빛난다. 고색창연하고도 우아한 도시이다. 웅장하고 품격이 있으며 매혹적이다. 탁 트인 공간과 전원 지역 사이에 당당히 서 있는 이 도시에는 대로와 소로가 많이 나 있다. 도시의 완벽함이 눈을 황홀하게 한다.…… 이 도시의 기독교 여성들은 무슬림 여성의 패션을 따라하고 유창하게 아랍어를 하며 외투를 몸에 두르고 너울을 쓰고 있다."

조선에 나타난 무슬림들

이븐 주바이르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기독교 노르만 왕의 치세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보았던 것은 진정한 다문화 왕국의 모습이었습니다. 세계지도의 산실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강리도를 탄생시켰던 고려말 조선 초의 문화적 풍토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세종 실록에 이런 대화가 보입니다.
 
조회를 받고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시강관(侍講官) 설순(偰循)에게 묻기를, "너의 선조가 중국에 있을 때에 어디에서 살았으며, 어느 때에 벼슬하였느냐." 하니, 순이 대답하기를, "신의 선조는 서번(西蕃) 회골(回骨) 땅에 살았사오며, 원(元)나라 태조(太祖) 때에 비로소 벼슬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너의 숙부(叔父)는 나이 몇 살 때에 여기에 왔으며, 우리 나라의 언어를 알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숙부 장수(長壽)는 나이 19세에, 미수(眉壽)는 나이 17세에 여기에 왔사오며, 언어는 대강 알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석가모니가 천축(天竺)에 살았다는데, 어느 곳에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천축도 역시 서방에 있습니다." 하였다. -1425년(세종 7년) 1월 16일-

여기에서 서번(西蕃) 회골(回骨) 땅이란 현재 중국의 신장지역을 가리킵니다. 세종의 측신이었던 설순 가족은 그곳의 위구르 족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부친 설경수 형제들은 여말 선초에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고 높은 벼슬을 하고 외교업무를 수행했습니다. 또한 다른 기록을 보면, 조선초기까지는 이슬람 복장을 하고 코란경을 읊으며 살아가는 무슬림 집단이 우리 땅에서 공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조에서 건의하기를 "회회교도(回回敎徒)는 의관(衣冠)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들이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나라 사람인 바에는 마땅히 우리나라 의관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또 대조회(大朝會) 때 회회도(回回徒)의 기도(祈禱)하는 의식(儀式)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 -세종 9년(1427)4월 4일-

여기에서 회회교도란 물론 회교도 즉 무슬림입니다. 그들은 무슬림 고유의 복장을 착용하고 궁중의 큰 의식에도 참가해 기도하고 독송하였음을 이 기록은 말해줍니다. 세종이 이슬람의 역법, 천문 지리학, 과학기술을 수용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2세기 세계지도를 낳은 시칠리아의 팔레르모가 이문화간의 소통 교류가 활발했던 것처럼 고려말 조선초까지는 우리 땅에서도 개방성과 다양성의 전통이 이어져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획기적인 세계지도가 나오기 어려웠을 겁니다. 오늘날 구글 지도가 미국에서 나온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강리도 이후 조선의 문화와 가치관은 주자학으로 고착·획일화되어 갔고 그에 따라 지리적 시야도 축소됐습니다. 더 이상 강리도와 같은 세계지도는 나올 수 없게 됩니다. 중화주의에 눈이 어두워지자 중화권 밖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배타적 사고로 과거 우리민족이 어떤 대가를 치루어야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강리도의 발자취는 우리의 흥망성쇄를 보여주는 묵시록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태그:#강리도, #알 디드리시, #시칠리, #팔레르모, #다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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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만남이길 바래 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제2의 코리아 여행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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