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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에 이어, 이번에는 <신대방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원풍모방 노조 터 - ②세왕전기 터 - ③한영섬유 노조 터 - ④보라매공원 - ⑤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한국학생건국운동공적비 - ⑥김마리아 동상 - ⑦동작청소년성문화센터 '더하기'

사망 당시 제2의 전태일로 불리기도 했던 김진수(1949-1971)의 한이 서려 있는 스웨터 보세 가공공장 ㈜한영섬유는 신대방동에 있었다. 하지만 그 ㈜한영섬유는 2002년에 폐업하였고, 지금 그 자리에는 2005년부터 보라매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어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한영섬유 노동자 김진수는 1971년 6월 25일 전태일의 묘가 있는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의 김진수의 묘 한영섬유 노동자 김진수는 1971년 6월 25일 전태일의 묘가 있는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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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불사른 전태일의 유산... 한영섬유 노조 결성

600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던 ㈜한영섬유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것은 1970년 12월 28일이었다. 당일 점심 식사를 마친 직후 식당에 모인 400여 노동자들은 회사의 감시를 따돌리고 식당 문을 걸어 잠근 채 기습적으로 전국섬유노조 서울의류지부 산하 한영섬유분회 결성식을 일사천리로 거행하였다.

한영섬유의 노동조합 결성은 한 달 전 자신의 몸을 불살라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세상에 알린 전태일의 충격적인 분신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전태일의 분신은 경제발전 논리에만 빠져 있는 한국사회의 주류나 정치 민주화를 주장하던 비주류 모두에게 그동안 외면해왔던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였고, 특히 민주화운동 세력에게는 노동에 기반한 민주주의에 대해 깊이 성찰할 것을 요구하였다.

전태일의 분신은 한영섬유 노동자에게도 곧바로 영향을 미쳤다. 한영섬유에는 전태일의 분신이 있기 전부터 김용욱, 고석민, 이장원, 장은수 등이 노조를 만들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태일 분신 사건이 있은 얼마 후 이를 보도한 신문 기사를 오려 동료들이 돌려볼 수 있도록 식당에 몰래 배포했다.

이중 분회장이 되는 김용욱은 이미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가 주최하는 <노사문제 쎄미나>(1970년 12월 6일)에서 '편직계의 발전을 위한 노사협력방안-근로자의 입장에서'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기도 하고, 한영섬유분회 설립 8일 전인 12월 20일에는 전국섬유노조 서울의류지부 결성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이로 볼 때 이들은 회사 건너편 신길동에 있었던 천주교 돈보스꼬 청소년센터나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의 지원을 받아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영섬유 노조는 신대방동 일대 노동조합운동사에서 1970년대 민주노조의 상징 원풍모방 노조의 민주화 투쟁(1972) 이전에 결성되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신대방동 일대에는 1968년에 이미 파업의 경험이 있는 외국인 투자기업의 세미코어 노조와 롯데공업(현 농심) 노조도 민주노조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일만 알던 농민의 아들, 노동운동에 눈 뜨다

1968년 8월 한영섬유에 입사한 김진수도 이때 이들이 배포한 신문 자료를 통해 전태일 분신 사건을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고, 평소 사용자의 횡포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있던 상황에서 민주노조 결성에 참여하여 열성 조합원이 된다.

전북 임실이 고향인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던 김진수는 1966년 2월 홀어머니를 모시고 둘째 누나와 함께 경기도 안양으로 이사하여 낮에는 타일공장에서 일을 하여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밤에는 안양공고 야간부에 다니는, 그야말로 주경야독을 한다.

그런데 타일공장에서 담당한 프레스 일은 야간학교를 다니는 어린 김진수에게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왼손 가운뎃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산재를 당하게 되고, 그해 연말에 또다시 산재를 당하자 큰 충격을 받은 김진수는 타일공장을 떠나게 된다.

김진수가 새롭게 선택한 길은 3개월 속성과정의 편직기술학원(당시에는 요꼬학원이라고 불렀다)이었다. 당시 편직 기술자들은 대개 도급제로 계약하여 하기에 따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나아가 돈을 벌어서 기계 몇 대를 가진 하청공장을 운영하면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다. 김진수 역시 그런 꿈과 기대를 가지고 선택한 길인데, 그 길이 결국 김진수를 한영섬유로 인도했다.

뚝섬에 있는 작은 공장에서 경력을 쌓은 김진수가 한영섬유 편직부에 입사한 것은 1968년 8월 15일이었다. 김진수는 뚝섬 공장에 다닐 즈음 이미 안양공고 야간부를 중퇴한 것으로 보인다. 하루 15시간 노동에 철야를 밥 먹듯 하는 상황에서, 더군다나 회사가 자신의 안양 집에서 상당히 먼 상황에서 야간학교를 계속 다니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진수는 잘 생긴 외모에 항상 책을 옆에 끼고 다녀 동료들에게 인기도 높았다고 한다.
▲ 김진수 김진수는 잘 생긴 외모에 항상 책을 옆에 끼고 다녀 동료들에게 인기도 높았다고 한다.
ⓒ 추모단체연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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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비교적 가깝고 회사 규모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한영섬유에서 김진수는 첫 월급으로 1만 2000원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1968년 당시 우리나라 노동자 평균임금은 9120원이었다. 김진수에게는 1969년에 둘째 누나가 결혼을 하면서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더 커진 책임감과 아울러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성과 연애를 하면서 결혼까지 대비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그런 김진수였지만, 노동현장에서 끊임없이 부딪치는 관리자들의 폭언과 횡포, 일요일도 쉬지 못하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한영섬유는 근무시간에 외출은커녕 면회조차 허락되지 않는 회사였다. 그러다 보니 1970년 12월 김용욱 등이 주도하여 한영섬유 노조를 결성할 때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던 '안양 패거리'들을 대표하여 사전 준비모임에서부터 기꺼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멈추지 않던 '노조 파괴'... 꽃다운 나이에 지다

노조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회사는 노조결성을 막지는 못했지만, 민주노조를 파괴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움직였다. 곧바로 직장 폐쇄 방침을 발표하면서 노동자들의 사직을 유도하는 한편, 다음 해 1월 4일에는 김용욱, 고석민, 이장원, 장은수 등 노조 간부를 강제 해고하는 등 부당노동행위를 벌인다.

김진수도 회사의 방침에 속아 다른 동료 200여 명과 함께 12월 31일자로 회사를 그만두었다가 노조의 진정으로 근로감독관이 "헌법에 보장된 노조활동을 인정하라"고 지시하면서 다음해 1월 10일 재입사 형식으로 다시 한영섬유에 들어온다.

그럼에도 회사의 노조 파괴 책동은 멈추지 않는다. 중앙노동위원회가 김용욱 등 해고자 4명에 대한 구제 명령을 내린 것에 대해 회사는 불복하여 곧바로 재심을 청구하면서 이번에는 열성노조원들에 대한 회유와 협박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이에 맞서 노동조합은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며 쟁의발생 신고를 하지만, 회사의 탄압은 그칠 기미도 없었다.

이때 회사의 노조 와해 책동의 행동대 역할을 한 인물이 최홍인, 홍진기, 정진헌 등 3인이었다. 이들 3인은 노조가 만들어지기 직전인 12월에 다른 폭력사건으로 회사에서 해직된 인물이었는데, 노조와해 행동대 역할을 시킬 목적으로 1월 초에 재입사된 인물이었다.

이들은 공장장 유해풍의 지시를 받아 조합원들을 협박하여 "노조 때문에 휴업을 하게 되었으니 다시 일을 하게 해달라"는 내용의 진술서와 노조 탈퇴서를 받아내는 것도 모자라, 김윤기, 함성길 등 노조 핵심멤버에 접근하여 일부러 시비를 붙어 폭력을 유도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회사는 심지어 노조파괴를 위해 진오와 창수라는 이름의 대방동 깡패를 채용하기도 했다.

유해풍은 이들 3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신변보장 각서(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즈)까지 써주면서 독려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각 서

성 명  유 해 풍

상기 본인은 홍진기, 최홍인의 진술서에 대하여 차후에 신변에 어떠한 지장을 가져올 시에는 힘이 최대한 있는 데까지 보장의 책임을 질 것을 각서합니다.

1971. 1. 5
유 해 풍"


문제의 1971년 3월 18일, 오후 작업을 마친 직후에 이미 회사 근처 가게에서 소주, 포도주, 막걸리 등을 마셔 술에 취한 상태의 홍진기 최홍인 정진헌 등 3인은 노조 일에 적극적이던 김진수에게 접근해 노조탈퇴를 종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조 탈퇴를 거부하는 김진수의 머리를 정진헌이 드라이버로 찔러 2.5cm가 머리가 박히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김진수는 직장동료에 업혀 급히 대림성심병원으로 이송되지만,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는 회사 측이 '공원끼리 다투다가 넘어졌다'고 거짓말을 하여 의사도 제때 손을 쓰지 못하고 말았다. 이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긴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세브란스 병원에서는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여 2차에 걸쳐 뇌수술을 하지만, 이미 뇌 전체가 오염된 이후였다. 결국 김진수는 두 달간 사경을 헤매다 5월 16일에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마석모란공원 김진수의 묘에 설치된 묘비 뒷면에는 김진수의 삶에 대한 기록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 김진수 묘, 묘비의 뒷면 마석모란공원 김진수의 묘에 설치된 묘비 뒷면에는 김진수의 삶에 대한 기록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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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용노총의 왜곡, 언론도 외면한 진실... 지난한 싸움

사고 후 유가족과 노조는 노동조합 활동보장과 단체협약 체결을 거듭 요구하면서 '김진수 중태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촉구하지만, 회사는 '동료 간의 싸움으로 발생한 우발적 사고였다'고 진상을 왜곡하면서 최소한의 보상 합의조차 거부하였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다가올 대선과 총선에서 '김진수 중태 사건'이 정치적 쟁점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에만 골몰했고, 어용노총이었던 한국노총(당시 위원장 최용수)은 자체 조사 결과라면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한국도시산업선교협의회로부터, 한영섬유주식회사의 부당노동행위에 의하여 종업원 김진수가 상해를 입고 중태에 빠져 있다는 진정서를 접수, 즉각 섬유노조와 합동하여 진상조사를 착수한 결과 본 사건은 회사 측의 부당노동행위와는 직접적인 관계없이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었음이 판명되었다. 노총은 본 사건의 정확한 진상파악 및 가해자에 대한 응분의 조치와 피해자에 대한 회사 측의 충분한 보상을 관계 당국에 요청하였다." (<1970년대 노동현장과 증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노총은 철저히 회사 편이었다. 사장 한익하는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발생한 일까지 책임을 지고 보상해 준다면 기업이 무슨 자선사업 하는 곳이냐"고 반문하면서 회사 측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김진수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것도 사건 발생 후 23일이나 지난 4월 10일의 한국일보와 매일경제신문 등이 처음이었다.
  
한영섬유 노조를 해체시키고자 하는 회사 측의 사주를 받아 협박하다 1971년 3월 18일 발생한 '김진수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것은 그로부터 23일 후인 4월 10일이었다. 그나마 소극적 보도로 일관했다. 그만큼 언론도 사회적 역할을 외면했다.
▲ 종업원 찔러 중태(매일경제, 1971. 4. 10) 한영섬유 노조를 해체시키고자 하는 회사 측의 사주를 받아 협박하다 1971년 3월 18일 발생한 "김진수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것은 그로부터 23일 후인 4월 10일이었다. 그나마 소극적 보도로 일관했다. 그만큼 언론도 사회적 역할을 외면했다.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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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맡은 노량진경찰서나 검찰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검찰은 '공소 사실'에서 "피고인 정진헌은 .... 편직실에서 동사 직공인 피해자 김진수 등 23명에게 노조 결성을 하지 말아달라고 권유하다가 동인이 이에 불응한다는 이유로 동소에 있던 흉기인 드라이버로 동인의 두부를 찔러 상처를 입힌 것이다"라고 했으면서도 공장장 유해풍에 대해서는 "노조 방해 내지 파괴 지시를 정진헌 등에게 한 사실은 인정하나 그 지시와 정진헌의 상해 치사 행위 간에 직접적인 인과 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해 버렸다.

사건이 벌어진 바로 다음날인 3월 19일 노조는 150여 명이 참석하여 조합원 총회를 개최하고 회사 측의 테러행위를 규탄하면서 농성에 돌입했지만, 상급단체의 비협조와 김진수 사건에 충격을 받은 다수 조합원들이 회사를 떠나는 사태에 직면하여 큰 어려움에 봉착한다.

이에 조합원과 유족들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비롯하여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를 비롯한 여러 사람과 단체의 도움을 받아가며 재차 투쟁에 나섰다. 4월 15일에는 박건영, 신양우 등 9명의 한영섬유 노동자들이 '김진수를 살려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한국노총 농성을 벌인다. 그럼에도 한국노총의 비협조로 이들은 결국 경찰에 연행되었고, 이 중 박건영은 구속된다.
  
한영섬유 노동자들은 김진수가 회사측의 사주를 받은 정진헌에 의해 드라이버로 머리를 찍혀 사경을 혜매는 상황에서 진상규명에 노총이 적극 나서줄 것을 요구하며 9명이 4월 15일 농성을 벌이다 전원 경찰에 연행되었으며,그 중 김진수와 가까웠던 박건영은 구속되었다.
▲ 한영섬유 노동자들의 노총 농성 보도(경향신문, 1971. 4. 16) 한영섬유 노동자들은 김진수가 회사측의 사주를 받은 정진헌에 의해 드라이버로 머리를 찍혀 사경을 혜매는 상황에서 진상규명에 노총이 적극 나서줄 것을 요구하며 9명이 4월 15일 농성을 벌이다 전원 경찰에 연행되었으며,그 중 김진수와 가까웠던 박건영은 구속되었다.
ⓒ 경향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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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5일에는 김진수의 어머니 윤길순이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함께 "내 아들 김진수를 누가 왜 죽였나" 라고 쓴 플래카드를 내걸고 광화문 연좌시위를 벌인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회사는 움직이지 않았고, 박정희 군사정권은 이를 철저히 외면하였다.
 
김진수는 약 두 달간 사경을 헤매다 결국 사망하였는데, 회사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장례비용조차 거부하였다. 이에 김진수의 어머니 윤길순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함께 광화문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 김진수 어머니의 광화문 농성(동아일보, 1971. 06. 16) 김진수는 약 두 달간 사경을 헤매다 결국 사망하였는데, 회사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장례비용조차 거부하였다. 이에 김진수의 어머니 윤길순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함께 광화문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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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측의 책임 회피로 제때 치를 수 없었던 장례식은 결국 한 달이 넘은 6월 25일에야 치러졌다.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가톨릭학생연맹 등 종교단체들과 대학생이 가세하여 세브란스 병원에서 장례식이 치러진 후 김진수의 시신은 전태일이 묻혀 있는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된다.

관련 단체들은 장례식이 끝난 후에도 회사 측의 책임을 묻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을 간직한 채 노동조합 활동 보장 등을 요구하는 만장을 들고 시위를 계속했다.
  
'김진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전태일의 정신을 간직한 채 활동하고 있던 '연합노조 청계피복지구 고 전태일 동지회'는 김진수 사건이 터지고 한 달 후 성명서(1971. 4. 19)를 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회인 여러분의 끊임없는 성원과 격려를 받고 그때 그때마다 두 주먹을 굳게 쥐고 오직 전태일 동지의 뜻을 이어받아 노동자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자는 일념으로 아직까지 청계지부를 이끌어왔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힘만으로는 너무나 벅차고 힘든 일임을 새삼 느꼈습니다. 더구나 지난 18일의 한영섬유노동조합의 김진수 사건은 저희들의 가슴을 또 한 번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제2, 제3의 전태일이 계속 나타나고 있으니 미약한 저희들 노동자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김진수 사건이 한 달 동안이나 매장되었다가 이제야 그 진상이 조금씩 밝혀진다는 것은 저희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이 어려움을 타개해 나갈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즈).


성명서는 김진수 사건을 회사 측의 노조 파괴에 맞서다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의 노동 현실을 처음으로 알린 전태일 분신 사건에 견줘 김진수를 제2의 전태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럼에도 김진수 사건이 '개인 간의 다툼 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 사건'이 아닌 '회사 측의 노조파괴 책동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사실이 종교 단체 등의 끈질긴 활동으로 그나마 한 달 만에야 언론에 보도되는 상황에 직면하여 힘없는 노동자로서 느끼는 절망감이 그대로 배어 있어 마음을 무겁게 한다.
 
1971년 6월 25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열린 김진수 영결식. 장례식에는 머머니와 여동생, 누님과 처남 등 유족과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가톨릭학생연맹, 한영섬유노조, 대학생 등이 참석하였다.
▲ 김진수 장례식 장면 1971년 6월 25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열린 김진수 영결식. 장례식에는 머머니와 여동생, 누님과 처남 등 유족과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가톨릭학생연맹, 한영섬유노조, 대학생 등이 참석하였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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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인식은 김진수 장례식(1971. 6. 25)에서 발표된 '조사'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노동투사 김진수씨! 당신은 기어이 숨지고 말았습니다.

작년 11월 평화시장의 전태일씨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뼈저린 유언을 우리 모두에게 남기고 분신자결 하였을 때 우리는 두 번 다시 그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 어둡고 더러운 현실과 철저히 투쟁하여 300만 노동자들의 지옥과 같은 생활고를 기어이 해결하고야 말겠다고 그의 영전에서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말이 끊어지고 가슴이 막히고 있습니다.

전태일씨의 죽음을 공모타살로 규정하고, 기업주, 정부, 노총, 지식인, 모든 사회인을 그 5대 살인자로서 고발했던 우리는 다시 당신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다시 5대 살인집단에 대하여 항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즈)


이 조사는 학생 대표로 참석한 최영희(당시 이대 사회학과)가 낭독하였다. 이 조사에서도 김진수는 비록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할지라도 제2의 전태일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김진수가 사망한 지 47년이 지난 지금 김진수를 제2의 전태일로 기억하고 있는 이가 많지 않은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최근의 삼성그룹 사태, 유성기업 사태에서도 확인되듯이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인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가 전면 보장되었다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본가의 노조 파괴 책동에 당당히 맞선 '김진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기에 더더욱 그렇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태그:#동작 민주올레, #신대방길, #한영섬유, #김진수,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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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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