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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를 기각한다. 상고 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5초 남짓의 대법원 판결이 내려졌다.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은 10대 나이에 일본에 끌려갔던 1944년 이후 74년 만에 이 두 문장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 피해유가족, 관련 시민단체회원들이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와 유족이 일본 전범기업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희훈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29일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 4명과 유족 1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관련 기사 : 대법 "미쓰비시도 징용피해 배상... 청구권 인정된다"). 이날 원고 중 유일하게 대법원을 찾은 김성주(90) 할머니는 "평생 한을 품고 살았다"며 그동안 겪었던 고통을 토로했다.
 
한 많은 74년의 세월에도 김 할머니가 가장 많이 한 말은 "감사합니다"였다. 청력을 거의 잃은 김 할머니는 취재진의 질문과 상관없이 그동안 자신을 도와준 이들에게 연신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승소해) 기분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모든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제가 감기가 와서 말을 제대로 못 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선생님들 뜻으로 인해 제 마음이 이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를 도와주시고 이렇게까지 끌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합니다."
 
"5초 판결 듣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 피해유가족, 관련 시민단체회원들이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와 유족이 일본 전범기업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하고 만세를 외치고 있다. ⓒ 이희훈
 
1944년 5월 일제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부족했던 노동력을 조달하기 위해 광주·전남, 대전·충남 지역에서 10대 여성 약 300명을 강제 징용했다. 피해자들은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상급 학교에도 갈 수 있다"는 일본인 교장의 말에 속아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에 끌려가 혹독한 노역에 시달렸다(근로정신대는 노동력을 착취당했다는 점에서 성노예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와 다르다 - 기자 주).
 
일제는 이들에게 임금은 물론 제대로 된 숙식도 제공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수시로 있었던 공습 때문에 공포에 떨어야 했고, 1944년 도난카이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는 6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날 승소한 할머니들도 이런 고통을 겪어야 했다.
 
1999년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할머니들은 2008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하고 만다. 이후 2012년 한국 법원에 다시 소송을 제기했는데, 1·2심 재판부는 모두 할머니들의 손을 들어줬다. 그리고 이날 대법원의 최종 선고가 내려졌다. 근로정신대 사건으로는 최초 대법원 판결이다.
 
오랜 시간 할머니들의 소송을 지원한 이국언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상임대표는 "참 기쁜 날이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드는 날이다"라고 소감을 내비쳤다. 특히 이 사건은 양승태 대법원과 박근혜 정부 간 재판거래의 희생양이었다는 의혹도 받아 왔다.
 
그는 선고 직후 <오마이뉴스>와 만나 "강제로 일본에 끌려간 지 74년, 법정투쟁을 시작한 지 19년, 대법원에 사건이 계류된 지 3년 4개월 만에 판결이 내려졌다"라며 "이 5초 남짓, 두 문장의 말을 듣는 것에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는지 무거운 마음이 든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긴 시간은 어떠한 것으로도 보상이 되지 못한다"라며 "많은 사람들이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 피해유가족, 관련 시민단체회원들이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와 유족이 일본 전범기업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희훈
 
실제로 원고인 양금덕(90)·이동련(89)·박해옥(89) 할머니와 김중곤(95) 할아버지(고 김순례 할머니 오빠)는 건강이 좋지 못해 현장에서 대법원 판결을 듣지 못했다. 유일하게 대법원을 찾은 김성주 할머니도 휠체어를 타고 등에 업힌 채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최근까지 가장 건강했던 양금덕 할머니(광주 거주)는 얼마 전부터 병원 신세를 지게 됐는데, 병원 측은 결핵으로 인해 할머니의 외출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대표는 "새벽부터 일어나 서울에 가시겠단 의지를 밝히셨는데 병원의 만류에 크게 실망하셨다"라고 전했다(관련 기사 : 할머니, 여차하면 병상 박차고 300km 대법원으로).
 
이날 재판에는 많은 일본인들도 참석했다.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의 다카하시 마코토(77) 공동대표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1986년 처음 근로정신대의 존재를 알게 된 다카하시 대표는 "아주 기쁘고 마음이 놓이지만 화가 날 수밖에 없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선고 직후 <오마이뉴스>와 만나 "그동안 참 많은 피해자들이 돌아가셨다"라며 "74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는 무얼 했나"라고 지적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아직도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이유로) 이미 해결된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라며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들의 과오에 일본 국민으로서 가해 책임까지 통감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전원 사망' 히로시마 조선소 피해자 5명도 승소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 피해유가족, 관련 시민단체회원들이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와 유족이 일본 전범기업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희훈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 피해유가족, 관련 시민단체회원들이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와 유족이 일본 전범기업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희훈
 
한편 1944년 미쓰비시중공업 히로시마 조선소에 끌려간 할아버지들도 이날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은 박창환·이근목·이병목·정창희·정상화 할아버지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준 원심을 확정했다.
 
1999년 일본 법원에 소송을 냈으나 2007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한 할아버지들은 이와 별개로 2000년 한국 법원에도 소를 제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변호사 시절 이들의 소송을 대리했다. 할아버지는 1, 2심 재판에서 패소했지만 2012년 대법원 파기환송 후 다시 진행된 재판에서 승소했다. 그리고 이날 최종적으로 승소가 확정됐다.
 
하지만 원고 5명은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이다. 이날 아버지 대신 대법원을 찾은 박재훈(고 박창환씨의 아들)씨는 "이겼지만 착잡한 기분이다"라며 "원고들이 생존했어야 했는데 다 돌아가시고 2세들이 결과를 보게 돼 기분이 좀 그렇다"라고 말했다.
태그:#근로정신대, #일본,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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