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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을 법정 스님이 봤다면 화내셨을 거야."

삼 년 전만 해도 우리 부부는 소유욕의 화신이었다. 소유욕이 많다는 건 집이 좁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스물일곱과 스물여덟, 칠 년이 넘는 연애 끝에 결혼한 이십 대 부부는 하고 싶은 게 많았고 집에 들이고 싶은 것도 많았다. 문제는 집 크기. 양가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고 시작한 탓에 우리의 첫 시작은 보증금 4000만 원짜리 22평 임대아파트였다. 거주 지역이 서울 경기가 아니라 강원도 동해시였기에 가능했다. 

복도식에다 베란다까지 널찍한 22평 구식 아파트의 실내는 상당히 아담했다. 신혼부부들이 으레 그렇듯 우리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내보려 잡다한 인테리어 소품을 사모았다.

목이 긴 철제 스탠드를 거실 구석에 놓고, 하얀 원목 장식장을 벽에 세웠다. 장식장 칸칸이 지금껏 소장해온 여행 기념품을 배치했다. 도자기로 만든 뉴욕 마천루와 유리로 만든 베네치아 곤돌라, 인도산 향이 전등 빛 아래서 반짝였다. 베란다 상자에는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예비 장식품들이 잠자고 있었다. 

신혼의 달콤함도 잠시, 결혼 6개월 차에 첫째가 생겼고 이듬해 8월 태어났다. 아이를 품고 집에 오는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집이 터무니없이 비좁게 느껴졌다. 전에는 육아와 공간 차지의 상관관계에 대해 전혀 인지를 못했다. 그런데 기저귀와 순면 내복, 장난감, 포대기 따위를 한 아름 내려놓으니 집이 가득 차 버렸다. 창고처럼 썼던 작은 방이 발 디딜 틈 없이 물건 지옥으로 변했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2개월, 3개월, 아이가 자랄수록 사야 할 물건이 늘어났다. 젖병, 살균소독기, 분유 포트기, 아기띠 등 국민 육아템의 이름을 가진 물품들이 성장시기별로 쏟아졌다. 우리는 엄마, 아빠가 모두 처음이었기에 불안했다.

불안을 돈으로 메꿨다. 아이가 이불을 자꾸 걷어 차면 양쪽에 배게를 두어 눌러주면 될 것을 굳이 '요술 이불'을 사서 해결했다. 단골 택배 기사님과는 진즉 안면을 텄고, 모르긴 몰라도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분리수거 배출량 상위권에 들어갔을 것이다.
 
꽤 정리가 된 상태입니다만.
 꽤 정리가 된 상태입니다만.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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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가 쇼핑이던 아내, 확 변했다

미친듯한 소비 생활에 균열이 생긴 건 싸게 산 '볼풀(ball pool) 장' 때문이었다. 작은 방과 베란다는 이미 창고로 전락했고 그나마 엉덩이 붙일 만한 곳이 거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싸게 잘 샀다고 셀프 칭찬을 하며 이상한 플라스틱 공으로 가득한 거실을 보여주었다.

첫째가 플라스틱 공을 헤치며 버둥거렸는데, 나는 쓰레기 바다에서 헤엄치는 새끼 돌고래를 보는 줄 알았다. 이건 정말 정신 나간 짓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도대체 집이라는 곳이 침대를 제외하고 성인 남자가 마땅히 누울 자리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뭔가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됐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아이를 낳은 후 여가 시간에서 쇼핑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조금 더 좋은 옷, 약간 더 편리한 기계를 구하려고 할인 시즌을 기다렸다. 쿠폰을 모으고, 카드사 청구할인이 되는 날짜를 일정표에 적었다. 할인률과 상관없이 잔고는 계속 줄었으나, 우리는 합리적으로 육아를 하고 있다며 위로했다. 그런데 볼풀장을 보는 순간, 자기 기만의 위장막이 깨지고 말았다. 

종교 체험을 하듯 일순 주변이 달리 보였다. 온몸의 감각이 깨어나며 자아 각성 상태에 돌입했다.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하는 의문이 지난 세월을 들췄다. 이대로 살 수 없다는 확신이 찾아왔다. 나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흔들리는 남편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아내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실이 살짝 비좁긴 하네? 그래도 애가 좋아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지 않았다. 대신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이리저리 갖다 붙이며 본심을 전했다. "천장 높은 집에서 자란 애들이 사고가 자유로워 잘 큰단다", "덴마크 부모들은 정작 레고 많이 안 사준단다" 등.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찌르는 아내에게 실토했다.

"답답해. 버리자."

너무 정색하며 말했는지 아내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진지하게 현재의 문제점을 분석했다. 두 사람이 모두 공감한 부분은 최근 육아하면서 느낀 정신적 피로였다.

아내가 육아휴직 중이었기에 나는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특강, 원고 기고, 주말 초과근무를 기회가 닿는 한 했다. 또 아내는 수십 권의 육아 서적을 섭렵하며 우리 벌이가 허락하는 한 아이에게 좋은 조건을 제공하려 애썼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둘 다 최선을 다했지만 몸은 지쳐가고, 시간은 부족하고, 공간은 더 없었다. 변화가 절실했다.

"나에게 며칠만 줘. 싹 치워버릴 테니까."

독서광인 아내는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부터 열었다. 검색 키워드는 '살림'. 백 권이 넘는 책 중에서 판매량과 독자 리뷰를 기준으로 다섯 권을 후보로 추려냈다. 그리고는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장새롬이 쓴 <멋진롬 심플한 살림법>을 주문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내가 이 년 뒤 하루 식비 만 오 천원으로 살게 될 줄은.

"볼썽 사나운 볼풀장부터 처분해야겠어!"

아내는 지역 맘카페 중고 게시판에 물건을 거의 공짜 수준으로 올렸다. 하루도 되지 않아 새 주인이 와서 가져갔다. 볼풀장이 나가는데 가슴이 뻥 뚫렸다. 공간의 넉넉함이 주는 쾌감이 이렇게나 큰 줄 몰랐다. 버리기에 탄력이 붙었다. 

[관련기사 : '봉투살림' 덕분에 빚 없이 살게 됐다]
 
묶어 놓아도 거대한 볼풀장 세트
 묶어 놓아도 거대한 볼풀장 세트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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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동안 한 번도 안 입은 옷, 물건 다 버리자. 쓸만한 건 팔아버리고."

아내는 들떠 보였다. 팔 물건과 버릴 물건을 목록에 나눠 적었다. 쓸 만한 건 죄다 '중*나라'나 지역 맘카페에 올리고 폐기 대상은 50리터 종량제 봉투에 담았다. 옷 중에서 유료로 팔기는 어렵겠으나 깨끗한 것들은 세탁해 동네 의류 수거함에 담았다. 네이버 카페 알림 창에 거래 성사 댓글 알림이 뜨고, 쓰레기봉투가 집 밖으로 하나 둘 나갈수록 집이 넓어졌다. 
 
맘카페에 헐값으로 내놓자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맘카페에 헐값으로 내놓자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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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2평 아파트를 16평으로 썼던 사람들이었다. 16평은 물건을 비워낼수록 제모습을 찾아갔다. 버린 것이 있다면 들여온 것도 있었다. 물건 대신 책이었다. 아내는 차례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하게 산다>, 마이크 비킹의 <휘게 라이프> 같은 류의 도서를 만났다. 지금껏 몰랐던 '소박하고 행복한 세계'가 열렸다. 

아내는 내친 김에 가계부도 썼다. 지출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 불필요한 소비를 잡아낼 수 있을 것 같다며 카드사 문자 목록을 오르내리며 연필을 굴렸다. 예상은 적중했다. 홧김에, 기분이 좋아서, 한정판이니까 긁은 체크 카드 비용이 의외로 상당했다.

신용 카드는 벌써 잘라버렸고, 체크 카드는 살려두되 현금을 뽑아서 생활하기로 합의봤다. 현금은 돈 나가는 게 눈에 보이고, 손 감촉이 있어서 지출 억제 효과가 확실했다. 더불어 휴대폰 요금제도 실속형으로 바꿨다. 매달 남는 데이터와 음성 통화량이 1/3이 넘었다. 낭비였다.
 
절약할 때 대충 감으로 때우지 말자. 정확한 숫자 계산이 답이다.
 절약할 때 대충 감으로 때우지 말자. 정확한 숫자 계산이 답이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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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 바뀌어 갔다. 비우기 실천 일 년 만에 26평으로 이사를 했다. 아낀 돈을 자유 적립식 적금 계좌에 몽땅 부은 결과였다. 방이 한 칸 더 생겼는데 짐은 도리어 줄었다. 심지어 옮긴 집에서 둘째가 태어나 세간 살이가 늘어날 법도 한데 공간은 여전히 여유있다.

예전 집에서 공포의 볼풀장이 한복판을 차지했던 거실은 자매의 놀이방이 됐다. 4인 가족 살기에 26평의 공간적 한계가 있으므로 대궐 같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빡빡하지 않다고는 단언할 수 있다. 이렇게 실천한 비우기가 벌써 이 년을 훌쩍 넘겼다. 
 
덜어내기로 되찾은 건 돈 뿐만이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누렸다.
 덜어내기로 되찾은 건 돈 뿐만이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누렸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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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어내기로 되찾은 삶

비우기와 검소함을 실천하면서 우리 부부는 상품과 광고에 빼앗겼던 소중한 인생을 되찾았다. 소비 일변도의 왜곡된 욜로(YOLO)에 휘둘리지 않고 줏대 있게 산다. 우리 가족은 불필요한 외식을 줄이고 깨끗한 식재료로 집밥을 자주 차려 먹는다.

하루에 식비가 15000원이 안 드는 날도 흔하다. 남들이 놀이동산 가고 키즈 카페 갈 때, 강가를 산책하고 산길을 올랐다. 시즌별로 유행하는 옷을 사진 않으나 꼭 필요한 옷은 적정한 값을 주고 양질의 제품을 구입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는데 '비우기'와 '검소하게 살기'가 우악스럽다거나 억척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부족하거나 쫓기듯 살지 않는다. 삶을 묵직하고 의미 있게 살아내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낼 뿐이다. 우리는 빚이 없고, 자산은 꾸준히 늘어나는 중이지만, 삶을 풍성하게 한다고 여겨지는 분야에는 과감하게 지출한다. 몹시 만족스럽다.

요사이 아내는 그간의 실천 기록을 담아 '최소한의 소비' 주제로 글을 쓴다(관련 기사 : 하루 만 원으로 살기, 내가 잃은 것과 얻은 것). 그악스럽다는 비방과 함께 '어떻게 그 정도로 살아가느냐', '거지 같다'는 악플을 매주 마주하지만, 우리는 괜찮다. 실제 삶이 괜찮고, 다른 사람과 이 좋은 라이프 스타일을 공유하고 싶은 열망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짧은 문장에 담지 못하는 삶의 행복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사진을 보고 쾌감이 느껴진다면 미니멀리스트가 될 준비가 된 사람이다.
 이 사진을 보고 쾌감이 느껴진다면 미니멀리스트가 될 준비가 된 사람이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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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배우자 블로그(http://blog.naver.com/dahyun0421)에도 실립니다.


태그:#미니멀리즘, #가계부, #절약, #조화로운삶,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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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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