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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은 나중에 몰아 넣을게요."
"그래 아범, 그것도 괜찮지. 굴을 넣으면 처음에는 시원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칼칼한 맛이 덜하니까."


수은주가 급전직하한 지난 21일 오후 올해 김장을 '일단' 마쳤다. 일단이라고 한 것은 2차 김장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장을 거들던 동생이 카메라를 들이댔다. 아이 엄마는 윗니가 요즘 상영되는 영화 보히미언 랩소디의 주인공 프레디 머큐리와 비슷한 게 인상적인데, 추운 날씨임에도 표정이 밝다며 편한 마음으로 김장을 해서 그럴 거라고 말했다
 김장을 거들던 동생이 카메라를 들이댔다. 아이 엄마는 윗니가 요즘 상영되는 영화 보히미언 랩소디의 주인공 프레디 머큐리와 비슷한 게 인상적인데, 추운 날씨임에도 표정이 밝다며 편한 마음으로 김장을 해서 그럴 거라고 말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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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김장 양념 속 넣기는 어머니도 동생도, 또 옆집에 사는 이모도 물리치고 전적으로 혼자서 했다. 대략 40포기. 오후 2시쯤부터 시작했는데 4시 40분쯤 끝났다. 2012년 초겨울부터 어머니와 내가 김장 담그기를 공동 주도했으니까, 내 입장에서는 올해로 7년 연속 개근 김장이다. 

50대 후반에 접어든 지금, 7년 전과 비교한다면 당시보다 체력이 다소 저하됐다는 점을 실감한다. 6~7년 전만 해도 많게는 배추 기준으로 300포기에 육박하는 김장을 식구들과 함께 소화했는데, 지금은 30~40분만 구부리고 양념을 발라도 허리가 뻐근하다.
  
김장 속 넣는 걸 지켜보는 어머니. 배추를 절이고 씻는 건 팔순의 어머니가 뚝딱 해치웠다. 어머니와 마음이 잘 맞아 땐 한때는 마마보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천성이 워낙 비슷해 그저 잘 통하는 모자일 뿐이다.
 김장 속 넣는 걸 지켜보는 어머니. 배추를 절이고 씻는 건 팔순의 어머니가 뚝딱 해치웠다. 어머니와 마음이 잘 맞아 땐 한때는 마마보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천성이 워낙 비슷해 그저 잘 통하는 모자일 뿐이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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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김장 추위가 최근 들어 실감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뻔한 이치지만 입시 한파보다 닥쳐올 확률이 높은 것이 김장 한파이다. 대학 입시보다 대체로 늦은 시기에 김장이 치러지니 추울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순히 시기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간을 하고, 씻어낼 때마다 찬물을 사용하니 손 같은 말초부위들이 차가워지기 쉽다. 

10년 전만 해도 집 안팎 가리지 않고 반바지와 반팔로 겨울을 나는 시간이 많았는데, '세월에 장사 없다'는 말도 있지만, 최근 들어 과거보다 현저하게 겨울이 춥게 느껴진다. 또 여자들 손에 맞는 고무 장갑을 끼다 보니 손가락과 손바닥이 째서 피가 잘 안 통하고 이런 탓에 손이 더 시리기도 하다. 

지방마다 또 집안마다 차이가 있지만 김장은 대략 11월 중하순에서 12월 초순이 적기로 꼽히는 듯하다. 뭐든지 가능하면 혼자 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 탓이 커서, 대체로 양념 속 넣기 작업을 도맡아 하곤 했다. 

배추 잎사귀를 한 장 한 장 들춰내며 양념을 바르고 속을 집어 넣으며 한편으로는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든다. 먹을 것이 귀했던 옛 시절, 아마도 김장은 무엇보다 식구들에게 안도감을 안겼으리라. 
  
분홍색 고무장갑이 너무 꽉 끼어서 우둔한 탓에 얇은 일회용 비닐 장갑을 끼고 배추에 양념 속을 넣었다. 날씨가 추울 땐 손발에 피가 잘 통하지 않으면 더 얼어붙은 느낌이다.
 분홍색 고무장갑이 너무 꽉 끼어서 우둔한 탓에 얇은 일회용 비닐 장갑을 끼고 배추에 양념 속을 넣었다. 날씨가 추울 땐 손발에 피가 잘 통하지 않으면 더 얼어붙은 느낌이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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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겨우내 먹어도, 또 먹어도 물리지 않는 게 김치였다. 고기가 귀했던 시절이라 김치찌개 같은 건 상상조차도 못했고, 그저 흰밥에 딱 한 가지 반찬, 김치만 있으면 그걸로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모든 게 넉넉지 않던 시절, 그때는 지금보다 겨울이 더 추웠던 것 같은데 김장을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김치 박스 두어 통에 차곡차곡 배추를 여며 쌓은 뒤 뻐근한 허리를 일으킬 때면 절로 할머니, 어머니의 옛 시절 김장을 상상하게 된다.

천막을 쳐 살을 에이는 바람을 피하고, 전기 히터로 등을 지져가며 양념을 바르는 지금의 김장은 거의 황제급 호사가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할머니나 어머니의 김장 노고에 요즘 말로 '1'도 감사하다는 생각 없이, 김장을 당연지사로 여겼던 철없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자니 쓴웃음이 나온다.        

뭐든지 철이 늦게 드는 유형인 까닭이겠지만, 기실 김장은 나를 철들게 주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2011년 겨울 어머니의 암 수술이 직접적인 계기였던 듯하다. 이듬해인 2012년 투병 중인 어머니를 대신해 호기롭게 집안의 김장을 다해보겠다고 선포했다. 

작은 어머니, 고모, 이모, 사촌동생에 아래로 분가한 여동생들과 남동생까지 친인척들에게 우리 집에서 김장을 다 할 테니 몸만 오시라고 했다. 어머니의 지도를 받아가며 이런저런 김장 준비를 했는데, 1박2일 가족 김장 모임이 그렇게 거창한 일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모인 식구만 어른들 기준으로 약 20명. 아이 엄마는 1박2일 밥상 차리기에 파김치가 돼버렸다. 배추 김치만 대략 300포기 안팎 담갔고, 무 김치, 파 김치, 갓 김치, 동치미까지 합하니 양이 좀 됐다. 80평이 될까 말까 한 내 시골 집 마당 한가득 김장 세트가 진을 쳤다. 

김장을 매개로 온 식구들이 모이니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러나 후유증을 피할 수는 없었다. 피로가 속된 말로 장난이 아니었고, 경제적으로도 웬만한 잔치 비용에 맞먹는 지출이 있었다. 

"작은 어머니 미안해요. 올해는 김장 조금만 하려고요." 

2013년 초겨울 다소 겁도 나고, 힘겨웠음에도 한 해 더 '온 가족 김장' 행사를 하고 난 이듬해, 즉 2014년 자존심이 상했지만 친인척들에게 일일이 '김장 독립'을 통보했다. 나름 큰소리치며 시작한 합동 김장 담그기는 이렇게 딱 두 해 하고 종을 쳤다. 

잘은 모르지만 요즘 젊은 층에서는 배추 기준으로 네댓 포기 혹은 많게는 10포기 가량 김장을 하는 경우가 흔한 듯하다. 아예 김장을 하지 않는 가정도 꽤 있는 것 같고. 헌데 이 정도 김장을 해서는 내 기준으로만 말한다면, '철들기'가 쉽지 않다.

10포기 미만이라면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에서도 딱히 못할 게 없다. 하지만 50포기 혹은 200~300포기 정도면 도시의 일반 가정집은 엄두 낼 수 없는 규모이다. 요컨대 좀 규모가 있는 시골 김장은 아파트 김장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다. 주요 월동 음식이 김치였던 옛 시절 김장은 살림이 어려운 가정에서도 대가족이라면 최소 수십 포기 규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배추 뽑기부터 시작해서, 예를 들어 50~60포기 규모의 김치를 담그기 위해선 1박2일의 중노동이 불가피하다. 옷깃을 파고드는 칼 바람에 찬물을 만지며 몸 고생을 해보면 할머니, 어머니의 옛날 김장 김치가 안 떠오를 수 없다. 김장 김치가 숙연하게까지 느껴진다면 호들갑일까. 내 경우는 50세 넘어 60세 목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김장을 하면서 1밀리미터쯤 철이 들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김치는 신산이 핵심적인 맛이다. 맵고 신 정도가 김치의 맛을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 시절 우리네 민초들의 삶은 대부분 참으로 신산했다. 그러나 그 시절 할머니, 어머니 손끝을 통해 나온 사랑과 정성은 김치의 맵고 신 맛을 두말할 나위 없는 감칠맛으로 변모시켰으니 묘한 신산의 아이러니이다. 물론 나 같이 덜 떨어진 촌부에게 김치는 인생의 큰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덧붙이는 글 | 마이공주 닷컴(mygongju.com)에도 실립니다.


태그:#김장, #김치, #추위, #사랑, #보히미언 랩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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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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