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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의 어르신을 보냈다. 치매상태가 중증 이상의 단계로 안 좋아지면서 재가서비스가 불가능해진 탓이다. 주중에는 하루 여덟시간씩 주간보호를 이용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집에서 생활하셨는데 돌봐줄 가족들이 없었다.

기억장애와 불안장애, 우울감을 복합적으로 갖고 있던 어르신의 치매 증상은 갈수록 심해졌다. 사람을 못 알아보거나 집을 못 찾기도 하고 대소변 처리도 전혀 되지 않았다. 외부의 자극에 거의 반응하지 않는 무반응, 무감동 증세까지 보이면서 어르신은 표정과 말을 잃어버렸다.

주간보호에서 케어를 하는 시간은 보호받을 수 있지만 문제는 집에 계시는 시간이었다. 이런 증세를 보이는 치매 환자는 혼자서 생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누군가의 수발이 절실하지만 어르신을 모시기 어려운 자녀들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결국 가족들은 요양원 입소를 결정했다. 어르신은 평생을 살아온 마을과 집을 떠나야 했다. 본인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요양원 입소 이후에도 한참동안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씀을 반복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어르신의 딸은 울먹거렸다.

현장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이런 경우가 제일 난감하고 마음 아프다. 어르신의 욕구와 보호자의 요구가 분명한데도 결국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말이다. 어르신이 사시던 마을과 집을 떠나지 않고 남은 생을 보내실 수 있게 할 방법은 없었을까. 존엄한 노후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늙어서도 자신의 삶을 남이 아닌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주간보호를 떠나던 어르신의 마지막 얼굴이 아직도 가슴에 아린다.

복지의 새로운 패러다임 '커뮤니티 케어'

지난 3월 발표된 문재인 정부의 새로운 복지 플랜인 '커뮤니티 케어'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자신의 삶의 터전을 떠나지 않고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온전히 살아가면서 개개인의 욕구에 걸맞는 복지 급여와 서비스를 제공받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소득, 주거, 보건의료, 복지, 요양 돌봄 등 개인의 기본적인 삶을 지원하는 다양한 제도들의 분리된 장벽을 넘어 복합적이고 맞춤형으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분리된 제도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시설 중심에서 지역사회 거주 방식으로 복지의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시도다.

커뮤니티 케어가 정착되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설로 격리되어 삶의 터전과 단절될 수밖에 없는 불행을 막을 수 있다. 커뮤니티 케어는 개인의 자율성, 독립성,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장하기 위해 지역사회공동체의 연대에 기초한 호혜적 돌봄을 실현하는 것이다. 서구 복지선진국들에서는 이미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부터 도입되기 시작했고, OECD 국가들도 이미 1970년대부터 도입해 온 정책이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와 비교해서도 한국은 후발주자다. 일본은 '의료에서 복지개호로!' '병원, 시설로부터 지역, 재택으로!'라는 목표하에 '지역포괄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커뮤니티 케어에 역량을 쏟고 있다. 반경 30분이내, 인구 1만명 정도 규모를 커뮤니테 케어 시행의 적정 권역으로 설정하고 '지역포괄센터'를 설립해 주거, 의료, 개호, 예방, 생활자원이 포괄적으로 제공되는 시스템을 구축 중이다. 

후발주자인 우리나라의 복지 환경은 커뮤니티 케어를 전면적으로 구현하기엔 턱없이 못 미친다. 중앙부처에서 경쟁적으로 시행되는 360여 개의 각종 복지정책들은 가짓수만 많을 뿐 사회복지전문 공무원조차도 그 내용을 다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방만하다.

게다가 효율적으로 연계되지 못하니 정작 서비스가 제공돼야 할 지역단위로 내려오면 분절성, 파편성, 임의성을 면치 못한다. 방대한 복지 정책을 주민들이 일일이 다 알기도 어렵거니와 기초지자체 단위의 공무원들이 복합적인 욕구에 맞는 맞춤형 정책 서비스들을 찾아내 연계하는 것도 쉽지 않다. 당연히 복지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읍면동 단위를 '복지 허브화'하겠다는 선언은 현장에서 힘을 잃기 십상이다. 수백가지의 복지 서비스가 통합적으로 연계되지 못하니 지역복지는 여전히 일시적인 긴급 구호나 단순 후원 연계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커뮤니티 케어가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고치고 개선해야 한다.

돌봄 사회적협동조합에서 가능성을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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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동조합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표지 .
ⓒ 착한책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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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국가 중심 복지 서비스는 복합적인 개개인의 욕구에 기반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실패해왔다. 또한 부족한 복지 인프라를 확충한다는 명목하에 민간 시설의 무분별한 난립을 허용하고 공공적인 감독이 책임을 소홀히 함으로써 복지 상업화의 길을 터주었다. 유치원 비리 못지 않게 터져 나오는 요양병원이나 장기요양기관들의 비리 사태가 그 후과를 여실히 드러낸다.

국가 복지의 한계와 복지의 시장화를 모두 경계하면서 지역사회 전체에 사회적 돌봄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협동조합이 바로 '사회적협동조합'이다. 케나다의 세계 협동경제 연구자인 존 레스타키스는 책 <협동조합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에서 "협동조합 부문에서 사회적협동조합의 등장은 지난 30년간 이루어진 활동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변화"(146쪽)라고 했다. 

1979년 장애인 도우미들과 장애인 가족들이 설립한 이탈리아의 사회적협동조합인 '코팝스'는 복지 프로그램의 내용과 설계, 영리활동의 개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결정을 구성원들이 직접 한다. 코팝스는 볼로냐 시당국과의 교섭을 통해 장애인 프로그램 운영 계약을 체결하고 수행중이다. 볼로냐의 경우 도시 사회서비스의 87%가 사회적협동조합을 통해 제공될 정도로, 사회적협동조합들은 이탈리아 사회서비스 체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저자는 "사회적협동조합들의 등장은 공공, 민간 및 상업 영역간의 경계가 변화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영역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며 "이 협동조합들은 정부와 시장 시스템에 대한 대안으로서 시민사회의 힘과 가치를 담은 돌봄 모델을 개발하고 있다"(156쪽)고 설명한다.
 
"사회적 돌봄에서 호혜는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 정보, 책임 및 권력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혜는 이용자에게는 자존감의 근원이고, 도우미에는 업무만족감의 근원이며, 서로가 함께 책임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다.

평등에 기초한 권력의 공유와 관계 재정립을 통한 돌봄의 민주화를 이루지 않고서는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제공자와 이용자가 권력을 공유하는 협동조합 구조다." (160쪽)
"의료서비스와 사회적 돌봄의 공공성을 유지하면서도 사람들의 실제 욕구와 선호를 존중하는 시스템을 원한다면 민영화나 기존의 정부 서비스 가운데 양자택일이 아닌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

의료 및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협동조합 모델은 공공서비스의 장점에 민간서비스의 장점인 선택권과 이용자 욕구에 대한 기반한 대응력까지 갖춘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를 낮은 비용에 제공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165쪽)

이탈리아에는 전국적으로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적협동조합의 수가 1만 4천개에 이른다. 이탈리아 법조문에 기술되어 있는 것처럼 사회적협동조합의 목적은 '인간에 대한 배려를 촉진하고 주민을 통합함으로써 전반적인 지역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157쪽)이다. 이탈리아의 법률은 '공공복지 증진'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 및 보건당국과 사회적협동조합과의 협업과 공생을 강조한다. 

일본의 사례도 주목할만 하다. 일본 전역 47개 현마다 지부를 두고 있는 '고령자생활협동조합'은 조합원 수가 10만 명에 이른다. 이 협동조합은 어르신들이 가능한 한 오랫동안 자기 집에 머물면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돌봄이 필요한 노인들이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필요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좀 더 건강한 노인이 다른 노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인 일자리도 창출한다. 이처럼 일본의 협동조합은 고령사회 노인 문제에 대응하는 필수적인 수단이 되고 있다.

돌봄 민주주의 시대에 관한 희망
 
"조합원의 통제와 소유는 협동조합의 조직문화와 운영을 결정짓는 핵심요소다. 서비스 이용자가 조합원이기도 한 사회적협동조합에서 통제권의 운영은 이용자를 단순히 수동적으로 돌봄을 받는 수혜자이자 돌봄 체계의 '객체'에서 돌봄의 설계 및 전달의 주인공이자 돌봄 관계의 적극적인 '주체'로 탈바꿈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시스템에서 사회적 돌봄은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만드는 결과물이다."(168쪽)

'돌봄 민주주의' 확립을 주장한 미국의 정치학자 조안 C. 트론토는 '돌봄 결핍'과 '민주주의 결핍'은 강한 상관성을 갖는다고 했다. 돌봄 불평등이 심화되면 계층간 격차가 확대되고 차별과 배제를 재생산하는 악순환의 늪에 빠진다.

저자는 "(사회적협동조합처럼) 사람들이 통제권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원칙은 사회복지체계의 개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이는 특히 장애인, 빈민, 소외된 사람들과 같이 의존도가 높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더욱 중요하다"(168쪽)고 이야기한다. 사회복지를 지금보다 좀 더 인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사회적 돌봄의 개혁을 강조한 그는 이를 돌봄의 '민주화'라고 표현했다. 

커뮤니티 케어가 한국 사회에서 돌봄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전략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복지선진국들의 사회적협동조합 사례는 커뮤니티 케어 시대를 만들어가야 할 우리에게 주목할만한 단서를 제공한다. 현장 사회복지활동가들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협동조합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 사람을 위한 경제, 그 이상과 실천을 만나다

존 레스타키스 지음, 김진환.이세현.전광철 옮김, 착한책가게(2017)


태그:#협동조합, #사회적협동조합, #커뮤니티 케어, #돌봄 사회적협동조합, #돌봄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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