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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둔면 소정리에 위치한 '오름오르다/그릇 숨'애서 박채영 작가
 신둔면 소정리에 위치한 "오름오르다/그릇 숨"애서 박채영 작가
ⓒ 김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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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이 있었나싶다. 더운 여름이었다. 가을, 폭염을 견딘 단풍잎은 눈물나게 찬란했다. 찰나여서 아름답고 아까웠을 것이다. 어느새 살갗에 와 닿은 바람은 차다. 몸은 움츠러들고 따뜻한 곳, 따뜻한 사람을 찾게 된다. 겨울의 길목이다. 어느 저녁, 카페였던가. 테이블 위에 놓인 호롱불을 가운데 두고 도란도란, 알콩달콩 삶을 이야기 하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 그 온기가 그립다.

박채영((52. 오르다)도예가는 호롱(램프)작가로 불린다. 다관, 생활자기 등 다양한 현대자기를 만들고 호롱 작품도 즐겨 작업한다. 남편인 고호석(오름)작가와 함께 도자작업을 하고 있는 공방(오름오르다/그릇 숨)은 신둔면 소정리 한적한 둔덕에 있다. 그윽한 커피향이 퍼지고 음악이 흐르는 안온하고 세련된 작가의 공방에는 자연과 삶을 담은 작품이 눈을 사로잡는다.

하나하나 물레를 차고 그 기면에 세필로 들꽃을 그려넣은 작품이다. 같은 작품은 없다. 하루에 도자기에 그릴 수 있는 그림은 한정적이다. 산화철로 섬세하고 세밀하게 그리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유년 시절부터 현재까지 그녀가 흠뻑 누리고 읽고 그린 자연과 책과 그림, 그녀의 철학이 오롯이 스며있다. 호롱을 소재로 인생의 희노애락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오브제 <나의 고향>도 그러하다.  
 
'오름오르다/ 그릇 숨' 박채영 작가는 도자기에 산화철로 들꽃을 그려넣는다.
 "오름오르다/ 그릇 숨" 박채영 작가는 도자기에 산화철로 들꽃을 그려넣는다.
ⓒ 김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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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작가는 양평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의 청소년기와 청년 시절을 문학과 글쓰기와 그림에 푹 빠져 지냈다. 랭보와 보들레르를 사랑하여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고 판화와 조각 등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고흐와 샤갈 등을 좋아하여 쉼없이 그림도 그렸다. 그런 그녀가 이천에서 도예를 하게 된 배경은 독특하다.

그녀는 도자기 작가와 소비자층을 연결해주는 큐레이터였다. 해서 이천과 서울을 자주 오갔다. 그러던 중 자신이 직접 도자기를 만들기로 했고 남편과 함께 부천에서 10여 년간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다가 이천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5년이 흘렀다. 

"저희 부부는 종종 샛길 여행을 하는데 어느 날 이천으로 여행을 오게 됐어요. 이천에 연밭과 목장이 있더군요. 광활하게 펼쳐진 보라색 도라지꽃밭도 있고요. 정말 아름다웠어요. 제 남편 고향이 제주라 제주의 오름을 떠올려 공방 이름을 오름오르다로 지었는데 제주와 비슷한 풍경을 본 거죠. 그래서 이천에서 살기로 했어요. 이천은 편하죠. 아등바등 살지 않고 도시보다는 삶이 여유로워요. 아침에 일어나면 헐렁한 차림으로 꽃을 보곤 하는데 도시에서는 꿈꾸기 어려운 생활이죠. 이곳 소정리에 와서 사람 사는 것처럼 사는 것 같아요. 도자기 하시는 작가는 물론이고 유리공예 등 다른 작업을 하시는 작가들도 많이 살고 있어서 외롭지 않아 또 좋아요."  

박 작가는 도자기, 특히 호롱작품을 하게 된 계기를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가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와 앙리 보스코(Henri Bosco)를 들어 이야기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촛불의 미학>에서 대지와 흙을 살아있는 하나의 물질로 봐요. 그 물질로 호롱을 빚고 호롱불빛 아래서 책을 읽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호롱불빛의 일렁임은 따스하고 아스라한 게 정말 아름답지요."  
 
박채영 도예가의 '행복한 그릇'
 박채영 도예가의 "행복한 그릇"
ⓒ 김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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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아침에 일어나면 한 시간 정도 SNS를 한다. 주로 인스타그램과 카카오스토리와 블로그 등이다. 가상공간이지만 그녀는 그곳을 공방이자 갤러리라고 생각한다. 매일 작품 사진과 글 등을 올린다. 친구(팔로어)와 고객이 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작품의 홍보와 판로를 이어간다.
 
"이제는 전 세계가 온라인 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우연한 기회에 SNS를 하게 됐는데 처음에는 1년 동안 팔로어가 10명도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매일 매일 농사를 짓듯 보살피고 가꿨어요. 이웃의 사연을 읽고 힘든 일에는 같이 힘들어하고 좋은 일에는 같이 기뻐했죠. 점점 친구가 늘어나더군요. SNS를 하면서 조금 즐겁게 작업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작품이 꼭 필요하신 분들께 공 들이고 정성을 다한 작품을 드릴 수 있게 됐죠. 여유를 가지고 자연을 더 면밀하게 관찰하게 됐고요." 


박 작가는 마음이 평온하고 행복할 때 물레를 찬다. 그녀는 물레를 차고 굽을 깎다보면 세상 시름은 저절로 사라진다고 한다. 행복하단다. 아름답고 사랑스런 작품이 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 삶을 살게 하는 힘의 근원은 밥이죠. 밥을 담는 것은 그릇이고요. 그릇은 살림살이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 그릇에 행복을 담고 싶습니다."

박채영 작가는 자신의 도자 여정, 흙으로 문장을 쓰고 인생을 빚는 과정을 책으로 묶는 것을 꿈꾼다. 그녀는 그렇게 오늘도 물레를 차고 그릇에 행복과 삶을 담는다. 호롱불을 밝힌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어느 시절, 어느 곳에서 그녀가 내민 따스한 온기를 만날 것이다.
 

태그:#신둔면 , #가스통 바슐라르, #앙리 보스코/ 말리크루아, #SNS, #촛불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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