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편집자말]
가끔 입버릇처럼 쓰지만 정확한 의미를 질문하지 않던 단어들을 사전에서 찾아본다. 방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종종 그렇게 한다. 물론 그렇다고 가지고 있지 않던 답을 쉽게 찾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일을 하면서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알 때가 있다. 최근에는 사전에서 '연대'라는 말을 찾아보았다. 이 말은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함께 책임을 진다'는 뜻도 있다.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함께 일을 했다는 것은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발생할 결과에 대한 책임도 같이 가져감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누군가와 연대하는 일에는 많은 경우 '신뢰'가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내가 이 사람을 충분히 믿고 함께해도 되는지를 질문하게 된다.

물론 사회적 연대 행위는 단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그들이 걸어온 길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믿고 함께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실무의 단계까지 내려가면 상황은 보다 복잡해진다. 그 때부터는 구체적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한 개인을 신뢰하는 것과 그 사람이 순간순간 내리는 판단에 동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사람이 항상 모든 일에 있어 완벽하고 결점 없는 선택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상대방의 생각보다 나의 것이 더 나아 보일 때가 있다. 아니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 무엇이 최선인가는 그저 모호한 영역에 남겨진다. 그래서 나는 늘 이렇게 고민한다.

'지금 저 사람의 말을 따라도 될까, 믿고 맡겨도 될까, 지금 나의 주장을 관철시키지 못한 것을 나중에 후회하면 어쩌지, 물러서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면 어쩌지.'

'역사'는 그저 만들어지지 않는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 스틸컷

영화 <나는 부정한다> 스틸컷 ⓒ 티캐스트


아마 공동체에서 일을 하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지는 고민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 <나는 부정한다>에는 이와 같은 딜레마에 빠진 주인공 데보라 립스타트(레이첼 와이즈)가 등장한다. 이야기를 더 하기에 앞서 작품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역사학자인 데보라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 부인론자인 데이빗 어빙(티모시 스폴)에게 명예훼손을 이유로 고소를 당한다. 자신의 책에서 그를 '역사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 증거를 왜곡한 히틀러 광신도'라고 언급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데이빗이 이 소송을 '무죄추정의 원칙'이 없는 영국에서 제기하며 일은 복잡해진다. 데보라의 유죄를 데이빗이 입증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데보라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말하자면 데보라는 홀로코스트가 역사적 사실이며 데이빗이 이를 고의로 왜곡했고 따라서 자신은 명예훼손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줄거리를 읽은 많은 사람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히틀러에 의한 잔혹한 유대인 학살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류의 비극이 아닌가, 그런데 이걸 부정하는 캐릭터가 등장한다고?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저 법정 다툼이 벌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1990년대 후반이라는 점이다.

사실 많은 이들의 생각과 달리 역사적 사실, 특히 소수자들의 고난과 역경 그리고 죽음은 사회적 투쟁을 통해 진실로 규명된 경우가 많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도 갖은 의혹과 공방에 휩싸였으며 그것이 사실로 굳어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은 심심하면 등장한다.

'가짜 뉴스'는 어떻게 가능한 일이 되었나
 
 영화 <나는 부정한다> 스틸컷

영화 <나는 부정한다> 스틸컷 ⓒ 티캐스트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자신의 변호를 맡게 될 앤서니(앤드류 스캇)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데보라는 데이빗의 최종 목표가 학계의 인정을 받는 것이리라는 추측을 듣게 된다. 이에 그녀는 '하지만 데이빗은 반유대주의자이지 않냐'라고 반문하지만 앤서니는 '군사 역사학자들의 눈에는 사소한 특징일 뿐이다'라고 대답한다. 즉 학자의 자격을 부정할 만큼 대수로운 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변호사팀에 소속된 캐릭터 로라(카렌 피스토리우스) 역시도 밤늦게까지 변론을 준비하다 동거인에게 핀잔을 받는다. 그는 홀로코스트 이슈가 이제는 지겹다고, 도대체 언제까지 슬퍼할 생각이냐고 그리고 이러는 것은 집착이라고 로라에게 말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데이빗 또한 '홀로코스트 이야기는 따분하기 그지없으며, 나도 사람들도 그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흔히 말하는 '가짜 뉴스'는 이런 환경에서 전파가 가능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수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심지어 현재에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별로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기에 제대로 알리도 만무하고 그래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소수자를 둘러싼 조작된 정보가 떠돌아도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고 심지어 그것이 가짜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

'가짜 뉴스에 속지도 말고 그것을 내버려두지도 말자'고 상식적인 주장을 해도 이를 요구하는 존재가 하찮게 여겨지기에 소수자들은 늘 필요 이상의 '특별대우'를 원하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치부된다. 그리고 그런 존재들이 신뢰를 얻기도 어렵다. 한 마디로 가짜 뉴스의 배포, 영화 속 데이빗이 했던 것과 같은 사기의 범람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환대, 신뢰가 실종된 사회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연대하는 사람의 딜레마

이제 글의 초반에 언급한 데보라의 딜레마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데보라는 데이빗을 이기기 위해 영국 최고의 변호인단과 함께하지만 그들과 충돌하기를 반복한다. 변호팀이 데보라가 증언은커녕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심지어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도 침묵을 지키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납득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변호사들은 영국 법정을 바싹 꿰고 있으며 게임의 규칙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피고의 말에 판사가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 홀로코스트 당사자들을 증언대에 세울 경우 데이빗이 그들을 희화화하며 논점을 흐릴 수도 있는 점을 이유로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데보라는 회의한다. 모든 것을 변호사들의 의도대로 남겨두어도 괜찮을까. 내가 끌려 다니는 것은 아닐까. 나중에 겁쟁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고 후회하면 어쩌지.

성소수자이고 그래서 '가짜 뉴스'의 당사자인 사람으로서 나는 데보라에게 이입했다.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겠는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리고 얼마나 불안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자신이 소속된 집단에 패배를 안긴 사람이 되어버릴까봐. 때문에 나는 변호사들이 결국 한계에 부딪히고 그래서 데보라를 인정하며 그녀의 뜻대로 재판을 진행하는 식으로 영화가 이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부정한다>의 이야기는 결코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데보라가 단지 무력한 캐릭터로 남아 있었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고뇌와 번민 끝에 그녀는 자신의 변호사들에 대한 회의를 거두고 진지한 관심을 기울인다.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 듯 보였던 그들의 태도가 법조인으로서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한 거리 두기였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변호사들 중 하나인 리처드의 변론을 들으며 변호인단 역시도 유대인 학살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래서 승소를 갈망함을 알게 된다.

무관심과 불신이 혐오를 만든다면 환대와 믿음으로 맞서자
 
 영화 <나는 부정한다> 스틸컷

영화 <나는 부정한다> 스틸컷 ⓒ 티캐스트


영화의 갈등이 최고조로 이른 때, 데보라는 '다른 사람의 손에 나의 양심을 맡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좋은 결과가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런던에 오기 전엔 법정이 역사적 사실을 가리기에 좋은 곳이란 생각은 안 했어요, 하지만 팀워크라는 걸 과소평가했던 거죠."

양심을 맡기는 것이 힘든 '다른 사람'을 데보라는 결국 자신의 '팀'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행동이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악의적인 선동에 맞설 때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가짜 뉴스가 무관심과 불신, 타인에 대한 악의 속에서만 만들어지고 퍼질 수 있는 것이라면 거꾸로 관심과 믿음, 선의가 이 사회에 가득할 때에 그것들은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즉 궁극적으로 혐오와 편견은 우리가 공동체의 유대와 신뢰를 회복시킬 때에만 사라질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치들은 우리가 가만히 있다고 그저 생기지 않는다. 일상의 순간순간 관계 속에서 그리고 집단 내부에서 이를 행해야만 한다. 조작된 정보를 올바른 사실로 맞서듯이 그릇된 가치는 그에 반대되는 것으로 맞서야 한다.

나는 생각했다. 연대의 전제가 신뢰라면 때로는 일단 믿어보는 연습을 해보자. 내가 불확실하게 여기는 일에 상대방이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면 이끄는 손을 잡아보자. 물론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임을 다해야 하는 순간에 그 사람의 옆에 서있는 것 또한 신뢰를 행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 위험조차도 열어두고 누군가를 따라보는 것 그것이 나는 다름과 낯섦을 이유로 사람들이 서로를 밀쳐내는 이 세상에 필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연대에서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할 때 나는 이를 행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음을 이제는 안다. 데보라는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마지막으로 사족을 붙이자면 데보라가 데이빗에게 패소하는 불행한 일은 역사 속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선량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때로는 반목하지만 믿음을 형성해가며 결국 혐오와 편견을 이겨내는 과정을 그린다. 나는 그 일이 지금 이곳에서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나는 부정한다>를 보며 희망을 가지게 된 이유다.
나는 부정한다 홀로코스트 혐오 가짜 뉴스 믿음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