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등록문화재는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 50년 이상이 지난 것으로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하여 등록한 문화재이다. 우리가 지금껏 살아 왔던 그 삶의 현장이 이제 역사가 된 것이 근대문화유산이다. 현재의 우리를 있게 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 근대문화유산의 자취를 찾아 나선다. 그 곳에서 근대의 시간 속으로 산책하며 과거와 현재에 얽힌 이야기를 기사로 정리하여 남기고자 한다. - 기자 말

[용인 고초골 공소]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708호

지정내역 한옥건물 1동
지정(등록)일 2018년 3월 9일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고초골로 15 (원삼면, 고초골피정의집 원삼성당)
건립시대 조선시대
 

개신교인인 필자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의 성지와 역사적인 장소 순례를 아내와 함께 자주 다닌다. 생활 속에서의 신앙 실천이 먼저라는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특별한 곳에서 신앙의 역사를 되새기고 선배들의 삶을 돌아보며 내 신앙을 다시금 가다듬는 기회를 가져본다.

지난 여름 건강검진 결과를 보기 위해 분당에 있는 병원까지 갔을 때 아내의 제안으로 용인의 근대문화유산을 찾기로 하였다. 그래서 우연히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용인의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가 제404호 장욱진 가옥과 제708호인 '용인 고초골 공소'이다.
 
용인 고초골 공소 입구
 용인 고초골 공소 입구
ⓒ 박상준

관련사진보기

 
장욱진 가옥을 둘러본 후 용인에서 이원로를 달리다 문수산 터널을 지나 학일교차로 사거리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여기에서 고초골 공소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보고 우회전하여 고갯길로 접어들어 가니 거기에 고초골 공소가 고즈넉하게 서있었다.
 
피정의 집 내부 안내 표지판
 피정의 집 내부 안내 표지판
ⓒ 박상준

관련사진보기

 
큰 길가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도 깊은 골짜기에 들어온 듯한 분위기이다. 아담한 고초골 공소를 안고 있는 피정의 집 풍경이 편안하고 신비스럽다. 마치 현실세계에서 몇 구비 돌아들어 만나는 안견의 몽유도원도 속 도원경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신비로움을 가득담은 고즈넉한 분위기는 우리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한다.
   
'고초천주교회' 현판이 있는 건물 정면 모습
 "고초천주교회" 현판이 있는 건물 정면 모습
ⓒ 박상준

관련사진보기

 
한국 천주교의 성지가 된 고초골 공소는 지금 기도처가 되어 많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보듬고 치유하기에 넉넉한 곳이 되었다. 여기에서 현존 수원교구 공소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한옥 공소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고초골 공소를 만났다.
 
    한옥의 내부 부자재들이 그대로 노출된 양식으로 지어졌다.
▲ 공소 내부 모습  한옥의 내부 부자재들이 그대로 노출된 양식으로 지어졌다.
ⓒ 박상준

관련사진보기

문열린 공소에 들어가니 아늑한 한옥 예배당의 아늑한 분위기가 나를 품는 듯하다. 예배당 내부를 둘러보다가 자리에 앉으니 저절로 묵상에 잠겨 기도를 드리게 된다.
 
공소 앞에 서있는 종탑
 공소 앞에 서있는 종탑
ⓒ 박상준

관련사진보기

 
고초골 공소와 이곳의 천주교 교우촌의 역사에 대한 내용들을 통해 이곳이 순교의 피를 흘린 천주교의 성지임을 알게 되자 조선 역사 속의 천주교 박해가 먼저 떠올랐다.

우연인듯 섭리인듯

한국 천주교 역사는 우연의 연속인 듯하다. 신앙의 마음으로 보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 틀림없겠지만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우연의 연속으로 보이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천주교 신자였던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데리고 온 스페인 선교사 세스페데스(1551~1611) 신부가 우연히 우리 땅을 밟은 최초의 천주교인이다. 우리를 침략한 군대의 종군 신부로 온 그가 한국 천주교 역사에 끼친 영향은 알 수가 없지만 특별한 인연이라 할 수 있겠다.

중국의 명청대에 왕래하던 사신 일행에 의해 서양 학문으로 전해진 것과 하필이면 이때 권력에서 멀어져 세상을 비관하던 남인들이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우연만은 아니니라. 우리 땅에 천주교가 필요했던 그 시대의 섭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카오의 상징적인 문화유산인 '성 바울성당' 옆 박물관 올라가는 길에 이탈리아의 선교사 마테오리치의 동상이 서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 선교를 하기 위해 마카오의 성 바울성당 신학교에서 몇년 간 중국의 관습과 법을 공부하였다고 하여 이곳에 동상을 세웠다.
▲ 마테오리치 동상  마카오의 상징적인 문화유산인 "성 바울성당" 옆 박물관 올라가는 길에 이탈리아의 선교사 마테오리치의 동상이 서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 선교를 하기 위해 마카오의 성 바울성당 신학교에서 몇년 간 중국의 관습과 법을 공부하였다고 하여 이곳에 동상을 세웠다.
ⓒ 박상준

관련사진보기


임진왜란 후 명에 다녀온 실학자 이수광은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가 성경을 번역해 만든 <천주실의>를 가져와 그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이 책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천주교(서학)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에 소현세자가 병자호란 후 청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독일 신부 아담 샬과 친하게 지내면서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 문명을 접한 후 귀국할 때 가져와 인조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이후 천주교를 서학으로 받아들인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에 의해서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한 이승훈은 1784년 북경에서 서양 신부에게 영세를 받은 후 교리서, 십자고상, 묵주 등을 가져와 신앙을 전파하였다.

이벽을 지도자로 하여 이승훈, 정약용 형제, 권일신 형제가 명례방(지금의 명동 일대)에 있던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리 공부를 하였다. 1785년 이곳의 예배가 추조(형조)의 관리에게 발각된 사건이 '추조(형조)적발사건'이다. 양반들은 풀려났지만 신분이 중인이었던 김범우만 고문 후 밀양으로 유배가서 2년 뒤 생을 마친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맺어진 이후 교구장이던 블랑 주교가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 부근 언덕에 위치한 윤정현 저택을 매입하여 처음에는 60여 칸의 한옥 건물을 그대로 교회로 사용하다가 1898년 5월에 명동성당을 준공하였다.

정조는 '정학이 바로 서면 서학은 사라진다'고 하여 천주교를 직접적으로 탄압하기 보다는 유학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당시 천주교를 접한 남인들에 대해서는 관대한 처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전주 전동성당과 윤지충, 권상연 등이 순교한 형장이었음을 알리는 표지판
 전주 전동성당과 윤지충, 권상연 등이 순교한 형장이었음을 알리는 표지판
ⓒ 박상준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천주교 신자였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폐하고 위폐를 불태웠다고 하는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노론 벽파를 중심으로 여론이 들끓게 된다. 이에 정조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사형시킨 '신해박해'로 천주교를 탄압하게 된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사형된 전주 풍남문 밖 형장 자리에는 지금 '전주 전동성당'(사적 제288호)이 자리하고 있다. 그 한 켠에 서있는 표지판이 순교자들의 사형터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후손들에게 전해준다.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으나 김범우는 천주교 최초의 '증거자'로, 윤지충은 공식적인 첫 '순교자'로 꼽고 있다.

이후 정조 때 견제를 받았던 벽파들이 순조 즉위 후 시파와 남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천주교 탄압을 주도하였다. 1801년 천주교도 체포령이 내려져 '신유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박해로 이승훈, 정약종, 주문모(청나라 신부) 등이 죽었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긴 유배생활을 떠나게 된다. 천주교인 100여 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때 베이징의 프랑스 주교에게 군대 파견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다가 발각된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더욱 탄압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시작된 시파인 안동 김씨 세도 정치 하에서 탄압이 완화되어 천주교 전파가 활발해져 조선 교구가 설정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서양인 신부들이 포교하면서 교세가 확장되었다. 천주교의 확산은 세도 정치로 인한 폐해가 쌓여 사회가 불안해지고 현실에 대한 불만이 커지게 된 실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 정치적으로 소외된 일부 지식인층과 사회 경제적으로 억압받던 백성들이 인간의 평등과 내세 신앙을 내세우는 천주교의 교리에 공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벽파인 풍양 조씨 세력이 천주교에 관용적이었던 안동 김씨로부터 권력을 빼앗기 위해 1839년 '기해박해'('기해사옥'이라고도 한다.)를 일으켰다. 이 때 프랑스인 선교사 앵베르.모방.샤스탕 3인과 정하상.유진길을 비롯한 100여 명이 처형을 당하였다. 천주교를 탄압하는 기해박해를 기화로 정치적으로는 풍양 조씨들이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철종 때 다시 안동 김씨가 집권한 후 천주교 탄압이 뜸해져 흥선 대원군 때 이르면 상당수 천주교 신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미 프랑스 선교사들이 들어와 비밀 선교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대원군의 부인과 아들(고종)을 길렀던 유모가 천주교 신자였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세를 알고 있는 대원군도 처음에는 천주교에 관대하였으며 정치적으로도 천주교가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한 듯 하다.

1856년 애로호 사건을 빌미로 일으킨 제2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과 프랑스가 1860년에 청에 불평등 조약인 베이징 조약을 강요하였다. 청은 이 과정에서 조약을 중재한 댓가로 러시아에게도 연해주 지역을 빼앗겼다. 이 결과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지게 된다. 남하 정책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러시아와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맞대게 된 것이다.

이에 대원군은 러시아의 침투를 막기 위해 프랑스 선교사를 통하여 프랑스를 끌어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선교사들의 비협조로 대원군의 계획이 실패하여 그는 천주교에 실망하게 된다. 또한 국내에서는 대원군의 집권에 큰 힘이 되었던 조대비를 비롯한 기득권 세력의 천주교 금지 요구가 거세졌다. 그는 천주교를 용인하였던 입장을 바꾸어 적극적인 금지 정책과 함께 가혹한 탄압을 가하였다.

1866년 일어난 병인박해로 베르뇌를 비롯한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남종삼 등 수천 명의 천주교도들이 희생되었다. 프랑스 신부 리델은 청의 톈진으로 탈출하여 프랑스 극동함대의 로즈 제독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공하여 조선의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병인양요를 일으킨다. 조선군의 반격으로 철수하던 로즈 제독은 관아를 불지르고 외규장각 의궤를 비롯한 도서 수백 권과 은괴, 보물 등 문화재를 약탈하고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용인 고초골은 대원군 때의 병인박해 이전부터 신앙생활을 위해 숨어 지내던 교우촌이다. 교우촌 형성의 정확한 년도는 알 수 없지만 선교활동이 금지되었던 1800년대 초부터 박해를 피해 형성된 교우촌이 고초골 공소의 뿌리일 것으로 짐작한다. 병인박해를 기록한 「병인치명사적」에도 신자들이 살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고초골 너머에는 천주교 성지로 유명한 '미리내'가 있다. '미리내'는 은하수(銀河水)의 순수 우리말로서 시궁산과 쌍령산의 깊은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골짜기 따라 박해를 피해 흩어져 숨어 살던 천주교인들의 집에서 호롱불빛과 밤하늘의 별빛이 맑은 시냇물과 어우러져 비치고, 그것이 마치 은하수(우리말 '미리내') 같다고 해서 붙여진 옛 지명이라고 한다.

미리내는 신유박해 이후 여러 지역의 신자들이 찾아 들어와 형성된 교우촌이다. 현재 이곳은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의 성인과 순교자들의 묘소가 있는 천주교의 거룩한 성지이다. 많은 천주교인들의 신성한 순례처가 되고 있는 곳이다. 고초골 공소에서 미리내성지까지 산길을 따라갈 수 있으며 4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 옛날 예배처가 없던 미리내 교인들이 산길을 넘어 와 이곳 고초골 공소에서 예배드리던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며 걷는 도보 성지순례 길도 좋을 듯하다.
 
용인 고초골 공소 건물
 용인 고초골 공소 건물
ⓒ 박상준

관련사진보기

 
당시 미리내에는 골짜기의 논밭이 부족하여 교우들이 농토가 넓은 고초골로 넘어와 살았다고 한다. 교회 공식 기록에 의하면 고초골 구교우촌에 살던 교우들은 병인박해 때 대부분 순교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고초골 천주교인들 대부분은 한양과 해미에서 파견된 포졸들에게 붙잡혀가 천주교인들은 거의 순교하였고 마을 전체가 불에 타 역사가 단절된다. 1886년 조선과 프랑스의 조약 체결 이후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자 고초골에는 다시 천주교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1891년 공소 건물을 짓고 신앙 생활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용인에는 은이성지, 손골성지 등 근대 천주교 확산과 관련된 유적이 곳곳에 있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용인 고초골 공소'가 처음이다. '공소(公所)'는 본당보다 작은 교회로서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예배소나 그 구역을 이른다.

고초골 공소는 지금도 예배를 드리는 경당의 기능을 이어가는 한옥 공소이다. 고초골 공소는 인근 문촌리에 있던 정조 때 무신인 이주국 장군 고택(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6호)의 부속 건물인 잠실(누에를 기르던 건물)을 해체하면서 나온 자재를 활용해 지은 것이다. 상량묵서(上梁墨書, 건물의 마룻대 부분에 그것을 올린 날자를 먹으로 쓴 글씨)를 통해 1891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辛卯 三月 十六日 立柱上樑(신묘년(1891) 3월 16일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었다)"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근대 천주교 기능을 넣기 위해 민가 건축을 변화시켜 종교 건축으로 만들었다. 천주교 선교활동이 많았던 용인의 지역적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는 건축물로서 건물 구조, 평면형식 등 건물 본래의 모습도 잘 간직하고 있다. 또한 초기 천주교가 전파되던 지역적 상황을 잘 반영하여 과거 용인 지역의 살림집 형태와 근대 한옥의 변모 과정을 잘 보여준다.이에 문화재청이 문화유산으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여 2018년 3월 9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708호로 지정 등록하였다.

고초골 신자들은 1970년대까지도 고초골 공소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1980년대부터는 교통수단의 발달로 원삼 본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원삼 본당은 공소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 2003년 공소 인근 초가들을 다시 꾸며 피정의 집으로 활용하여 많은 천주교인들의 기도처가 되었다. 또한 이곳 고초골 공소에서는 해마다 '고초골 메주 만들기' 축제도 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chamjun0104)에도 실립니다.


태그:#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용인고초골공소, #공소, #천주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국의 교육과 문화에 관한 관심이 많다. 앞으로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통해 한국 근대문화유산과 교육 관련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