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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책표지.
 <번외> 책표지.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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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봄 소풍날이었다. 정신까지 잃고 쓰러질 정도로 심각한 꽃 알레르기 때문에 소풍을 갈 수 없는 소년. 자신처럼 소풍을 가지 않은 학생들과 시청각실에 모여 영화를 보게 된다. 동급생 K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K가 총을 난사, 열여덟 명 모두 죽고 만다.  

<번외>(사계절 출판사 펴냄)는 이와 같은 고교생 총기 난사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소년의 고통을 통해 '그럼에도 살아야 할 이유'를 이야기하는 청소년 소설이다. 화자인 '나'(소년)는 그날의 충격으로 무엇이든 죽음과 연결시키는 강박증을 갖게 된다.

이런 소년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K와는 단지 같은 클럽 활동을 했을 뿐인데 매우 친한 관계로 부풀려 마치 공모라도 한 것처럼 의심하거나, 쓸데없는 것까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다.  

총기 사건 이후 소년은 집에서건 학교에서건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숙제를 해가지 않아도 마치 교칙으로 정해놓기라도 한듯 선생님들은 소년을 단 한 번도 혼내지 않았다. 지각을 해도, 이유 없이 학교를 벗어나거나 어떤 잘못을 해도 마찬가지. 주변 사람들이나 친구들 또한 '당연하다.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소년을 배려하곤 했다. 

소년은, 사람들의 이와 같은 이해나 배려도 고통스럽기만 하다. 자신은 물론 '자신의 삶'까지도 '번외'가 된 것만 같다. 발가벗겨질 대로 발가벗겨져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내쳐져 버린 것만 같다. 세상에 오직 혼자뿐인 것 같다.  

이런 상황, 소년은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의 의심처럼 자신이 공범일지도 모른다는 착각과, 혼자 살아났음에 대한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상담 마지막 날 닥터 장이 말했다.
네 인생이 죽은 아이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덤인 것 마냥 얘기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든, 내 명함을 주면서 여기로 전화해보라고 해.
전화하면요?
욕을 실컷 해주지.

그 제안을 실행에 옮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랬다간 하루도 안 돼 명함이 다 떨어져 버렸을 것이다. 닥터 장의 말대로라면 나는 지난 일 년 동안 마주친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명함을 나눠줘야 했다. 친구들과 선생님, 경비 아저씨, 슈퍼마켓 주인,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나를 모르는 행인들에게.

떠돌이 개와 새, 고양이의 꿰뚫어 보는 눈빛에도 명함에 적힌 번호를 불러 주어야 했다. 죽은 애들이 더 이상 겪을 수 없는 5월, 6월, 7월의 달력에도 명함을 붙여야 했다. 오늘은 어땠어? 물어보는 부모님에게도, 나는 오빠가 이겨 낼 수 있다고 믿어, 파이팅!이라고 여동생이 써준 편지에도 닥터 장의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으로 답장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매일 아침 일어나는 나 자신에게도 여기에다 전화해보라고 해야 했다.(96~98쪽)

소년의 강박증이 얼마나 심한지. 고통은 또 얼마나 크고 깊은지가 짐작되는, 이 소설에서 가장 슬프게 읽은 부분이다. 어쩌면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인 소년인데 말이다.

소설은 이런 소년이 참사 1주기 추도식 다음날 학교를 벗어나 무작정 배회라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소년을 먼저 알아본다. 처음 만난 낯선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1년 전 참사에 대해, 그리고 어제의 추도식에 대해 저마다 이야기한다. 총격 사건으로 너무 유명해진 교복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교복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소년은 고통스럽다. 어제의 추모에 자신도 동참했음을 자랑스러운 듯 이야기하는 등, 죽음을 대하는 어른들의 자세가 실망스럽다. 소년은 결국 어렸을 때 꽃가루 알레르기로 쓰러진 적이 있는, 그래서 그날 소풍까지 포기하게 했던 동물원까지 가게 되고 정신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된다.
 
안 무서우세요?
무서워할 게 무언가요?
어차피 인간은 다 죽기로 정해져있는데.
하지만 살인당하기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잖아요.
모든 인간은 다 살해돼 죽는 거예요. 인간의 숨을 거두어 가는 손길은 다 살인 아닌가요?
그 말은 신이 살인자라는 뜻? 

베드로 신부는 다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학생은 이만 학교에 가야 할 시간이라고 말했다.
(133~134쪽) 

소설은 소년이 총기 사건 때문에 겪은 고통들과,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혼란들을 훑는 한편 소년의 삶을 향한 물음(본능)을 잔잔하게 풀어 들려주는 것으로 '그럼에도 살아야 할 이유'를 돌아보게 한다.  

솔직히 처음 몇 장은 좀 낯설게 읽혔다. 우리나라는 총기 소지를 허용하지 않는데다가, 그간 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접하곤 했던 청소년 총기 난사 사건을 배경으로 설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가족이나 정신과 의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속울음을 숱하게 삼키며 견뎌내는 한 가냘픈 소년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읽을 정도로 빠져 들었던 것은 소설의 상황이 전혀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솔하게 피해자를 언론에 노출해 2차 피해를 입게 한다든지, 호기심만으로 신상 털기를 한다든지, 미비한 힌트로 소설을 쓰는 언론의 행태 등이 말이다.

지난 몇 년 우리를 분노하게 한 일련의 사건들이 떠올랐음은 물론이다. 분노스럽고 안타까운 것은 기본만이라도 제대로 지켰더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그런 사고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그 배(세월호)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그날 그곳(제천스포츠센터)에 잠시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가해자와 전혀 상관조차 없는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나처럼 다들 우리를 분노하게 한 그와 같은 크고 작은 사고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며 읽지 않을까. 그리하여 미처 위로하지 못한 그 와중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안쓰러워하지 않을까. 또한, 최소한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피해자를 더욱 힘들게 하지는 않으리라.

'인간의 숨을 거두어 가는 손길은 다 살인'이라는 말에 공감, 걸핏하면 터지는 그와 같은 사고(세월호 참사 등)로 인한 사회적 살인에 분노하리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소년의 아픔에 공감하기를 바라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계간 <우리교육> 2018년 겨울호에 실립니다.


번외

박지리 지음, 사계절(2018)


태그:#박지리(소설가), #세월호 참사, #청소년소설, #사회적살인, #번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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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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