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종영한 tvN <백일의 낭군님> 속 정제윤(김선호 분)은 비운의 캐릭터다. 백과사전급 지식과 삼정승 못잖은 식견을 가졌지만 서자 출신이라는 한계 때문에 출셋길이 막혔고, 마음에 둔 여인은 갑자기 원치 않는 상대와 혼인을 해버렸다. 거기다 그 상대가 기억을 잃은 왕세자라니. 삐뚤어지기 딱 좋은 조건이지만, 정제윤은 특유의 밝음과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 

홍심(남지현 분)을 향한 연심과 세자 이율(도경수 분)에 대한 충심으로 둘의 조력자가 되는 길을 택했고, 결국 홍심의 마음 대신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백일의 낭군님> 속 정제윤, 김선호를 7일 서울 도렴동 <오마이뉴스>에서 만났다. 삼각관계가 더 팽팽하길 바라진 않았는지, 너무 맥없이 조력자가 돼 아쉽지는 않았는지 묻자, 김선호는 "차라리 다행"이라며 웃었다. 

"홍심이와 원득이는 혼인한 사이인데, 삼각관계가 팽팽하게 이어지면 막장이지 않았을까요? (웃음) 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작가님이 결말에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대사를 주신 덕분에 정제윤의 마음은 충분히 전달됐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첫 사극으로 받은 큰 사랑, 행복하다
 
 tvN <백일의 낭군님>에서 정제윤 역을 맡은 배우 김선호.

tvN <백일의 낭군님>에서 정제윤 역을 맡은 배우 김선호. ⓒ 솔트엔터테인먼트

 
- 첫 사극인 <백일의 낭군님>으로 정말 큰 사랑을 받았다. 올여름 정말 더웠는데 힘들게 촬영한 드라마가 성과도 좋아 기분 좋을 것 같다. 
"방송 보고 정말 놀랐다. 촬영할 때는 모전교 유등신이나 벚꽃신이 그렇게 예쁘게 그려질지 예상하지 못했다. 남지현씨가 사극이 너무 힘든데 방송을 보면 너무 예뻐서 또 하고 싶다고 이야기해주긴 했는데, 그 정도로 예쁘게 담길 줄은 몰랐다. 

<백일의 낭군님> 촬영할 때, 체력적으로 많이 지쳐있던 상태였다. 거기다 너무 더웠고, 처음 도전하는 사극이 어렵기도 했다. 정말 힘들게 촬영해서 '사극은 힘들다'는 선입견만 가질 뻔했는데, 큰 사랑을 받은 덕분에 좋은 기억으로 작품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됐다. 모든 고생을 보상받은 기분이다. 행복하고 감사하다."   

- 제작발표회 때까지만 해도 이 드라마가 이렇게 잘 될 줄 예상 못 했다. 현장에서는 어땠나. 
"나도, 주위에서도, 현장에서도 사실 다들 이 정도까지는 예상 못 했다. 대본은 정말 재미있었지만, 대본이 좋다고 시청률이 다 잘 나오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잘 되니 얼마나 더 행복했겠나. 시청률은 하늘의 뜻이라고들 하셔서 신경 안 쓰고 싶었지만, 그래도 자꾸 행복해지더라. 기분 좋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 첫 사전 제작 드라마였다. 시청자의 마음으로 출연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 어떻던가.  
"완전히 본방 사수했다. 3~4번 정도는 배우들끼리 모여서 보기도 했는데, 촬영장에서 틈틈이 모니터하는 거랑 시청자 입장에서 함께 보는 거랑 다르더라. 굉장히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부족한 점이 자꾸 보이는데 돌이킬 수 없으니 너무 부끄럽고 간지럽더라. 초반에 너무 진지하게 무게를 잡은 것도 그렇고, 컷마다 갓이 삐뚤어져 있는 것도 신경 쓰이고... 너무 한심하고 후회됐다. 더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싶기도 하고... 다음엔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허전해진 정제윤의 서사, 서운하진 않지만... 
 
 tvN <백일의 낭군님>에서 정제윤 역을 맡은 배우 김선호.

tvN <백일의 낭군님>에서 정제윤 역을 맡은 배우 김선호. ⓒ 솔트엔터테인먼트

 
- <백일의 낭군님>은 송주현과 궁궐, 두 장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나 극의 톤이 완전히 다른 드라마다. 세자를 제외하면 정제윤은 송주현과 궁궐을 오가는 유일한 캐릭터인데, 밸런스 유지가 힘들었을 것 같다. 
"작가님이 너무 정극톤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정통 사극과 퓨전 사극의 사이를 찾으려고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양쪽 이야기들이 모두 탄탄하게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톤이나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따로 노력을 많이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송주현은 연기하기 전부터 너무 즐겁고 행복했고, 궁궐은 선배님들이 워낙 무게감을 잘 잡아주신 덕분이었다. 

현장마다 이야기의 무게는 달랐지만, 두 곳 모두 굉장히 밝고 재미있었다. 특히 조성하 선배님이 너무 재미있으셨다. 아이스크림을 정말 하루도 안 빼놓고 사주셨다. 대기 시간에는 너무 유쾌하고 즐거웠는데, 촬영 시작되면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지시는데 너무 놀랐다. 관록이 이런 거구나 싶고... 송주현에서도 정해균 선배님이나 이준혁 선배님 연기하시는 거 보면서 많이 배웠다. 즐겁게 놀 수 있는 또래도 많고, 보고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선배님들도 많이 계셔서 여러모로 정말 좋았다." 

- 등장인물 소개에 언급된 서자 설정이나 안면 소실에 대한 설정이, 정작 이야기 속에는 그다지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은 것 같다. 초기 설정보다 서사가 많이 축약된 느낌인데, 배우로서 서운하지는 않았나. 
"홍심이와 원득이의 로맨스에 힘을 실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서운하다거나 하는 마음은 없었지만, 연기함에 있어서는 조금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정제윤은 어떤 사건의 중심에 놓여있거나, 어떤 캐릭터와 감정적으로 부딪치지 않는다. 캐릭터에 서사가 부족하다 보니, 시청자분들이 정제윤의 행동과 선택을 얼마나 이해해주실지 내내 고민했던 것 같다." 

- 고민의 답은 뭐였나. 
"감정을 최대한 미니멀하게 표현하는 거? 정제윤은 보통 어떤 일이 생기면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설명하는, 일종의 전달자다. 그래서 두 사람이 있어도 정제윤 혼자 말하는 대사가 세 줄이 넘고 그랬다. 이 상황에서 어떤 감정이 세게 들어가면 '쟤는 왜 저렇게 화를 내?', '쟤는 왜 오버야?' 라고 생각하실 것 같더라.

그래서 정제윤의 여러 특징 중 '현감'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최대한 감정은 미니멀하게, 사건을 추리하고 설명하는 역할에 충실하려 했다. 작품 안에는 트러블 메이커만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중도를 지킨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백일의 낭군님>을 통해 알게 됐다. 앞으로 연기 생활을 이어가는 데 꼭 필요한,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 대본과 시놉시스에는 없지만, 정제윤을 더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부여한 자신만의 서사 같은 게 있었나.
"제윤이가 초반에는 싸움을 피하고 도망 다니는데, 마지막 전쟁신에서는 갑자기 검을 들고 싸움을 잘한다. 그럼 앞에 싸움 못 하는 장면은 어떻게 된 거지 싶더라. 다행히 초반에 무뢰배들에게 쫓기는 장면을 재촬영하게 됐는데, 감독님께 대사 하나만 더 해도 되느냐고 여쭤봤다. 그 대사가 '난 사람은 안 때리오'였는데, 내 나름대로 어떤 설정을 넣은 거다.

생각해보니 제윤이는 무관인데 싸움을 못 할 리도 없고. 무예는 출중하지만, 백성과는 싸우지 않는, 전쟁에서는 적이니까 칼을 쓰는 거... 라는 설정이었다. 또, 안면인식장애지만 홍심이만 또렷하게 알아본다는 설정에도, 홍심이가 어머니를 닮았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얼굴 못 알아보는 병을 앓고 있더라도, 엄마의 얼굴은 흐릿하게라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작가님 의중은 모른다. 그냥 내가 그런 설정을 더했다. (웃음)"     

TV 속 내 얼굴, 여전히 어색하다
 
 
 tvN <백일의 낭군님>에서 정제윤 역을 맡은 배우 김선호.

tvN <백일의 낭군님>에서 정제윤 역을 맡은 배우 김선호. ⓒ 솔트엔터테인먼트

 
- 연극 무대에서 오래 활동했지만, TV로 온 지는 이제 2년째다. 첫 작품인 <김과장>부터 최근작 <백일의 낭군님>까지 성장 속도가 눈부시다.  
"운이 좋았다. <김과장> 작가님이 지금 <죽어도 좋아> 연출하고 계신 이은진 PD님께 연극배우 추천을 요청하셨고, 그 추천 명단에 내가 있었다. PD님이 내가 출연했던 연극 <클로져>를 보셨다더라.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며 굉장히 행복하던 시기였다. 좋은 작품에 출연할 수 있었고, 배우로서 잘 성장하고 있다는 나름의 확신도 있었다. 언젠가 드라마나 영화로 활동 영역을 넓혀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당장의 목표는 아니었다. 그래서 <김과장> 오디션을 보러 가면서도 긴장도 별로 안 했다.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고, 드라마 오디션장에 가본 것만으로 행복했으니까. 편안하게 오디션을 봤는데 그게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 그 후로는 승승장구했다. TV 데뷔 1년 만에 조정석과 투톱 주연을 하기도 했잖나. 
"사실 <김과장> 끝나고 드라마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바로 무대로 돌아가려 했다. 화면으로 보는 내 얼굴도, 내 연기도 너무 불편하고 어색한 거다. 거기다 공연과 다르게 TV 드라마는 시간 제약이 많지 않나. 모든 게 급하고, 빠르고... 그런 분위기에 스스로 많이 겁먹었다. 삭막하다고 생각했고, 현장에서 늘 혼자인 기분이었다. (나를 추천해 준) 이은진 PD님께 이번 작품만 하고 공연으로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렸는데 한 번 더 해봐라, 이렇게 가는 거는 도망가는 거다, 라고 하시더라. 후배들이 뭐라고 하겠느냐고." 

- 그 말에 생각이 바뀐 건가. 
"그것도 있고... 결정적인 건, 포상 휴가로 세부를 갔는데 너무 좋았다. 태어나서 처음 해외에 가본 거였는데, 물에 떠 있기만 해도 좋고, 모든 게 설레고 좋더라. (웃음) 완벽하게 릴렉스를 한 거지. 그러고 돌아와서 <최강 배달꾼> 오디션을 봤다. 원래 배달부원 중 한 명으로 합격했는데, 오디션을 좋게 봐주신 덕분에 오진규 역할이 됐다. <투깝스>에서도 독고성원 역할로 오디션을 봤는데 공수창이 됐다. 운이 너무 좋았다." 

"겁쟁이에 쫄보"라는 김선호, 그가 자신감을 얻은 이유 
 
 tvN <백일의 낭군님>에서 정제윤 역을 맡은 배우 김선호.

tvN <백일의 낭군님>에서 정제윤 역을 맡은 배우 김선호. ⓒ 솔트엔터테인먼트

 
- 지금은 TV 화면 속 본인의 얼굴에 좀 익숙해졌나. 
"여전히 불편하다. 내가 원래 이렇게 생겼나, 눈에 점이 이렇게 컸나 싶고... 얼굴은 처음보다 익숙해지긴 했지만, 이젠 연기가 너무 못나 보인다." 

- 드라마에서는 주로 능글맞고 자신감 넘치는 캐릭터를 많이 맡았는데 실제 성격은 너무 다른 것 같다. 
"결국 내 안의 어떤 모습을 꺼내 표현한 거니까 비슷한 면이 아주 없는 건 아닐 거다. 하지만 (내가 맡았던 캐릭터처럼) 능글맞거나 자신감이 강하진 않다. 현실의 나는 쫄보고 겁쟁이다. 연극할 때도 '이거 하고 싶다'고 말하기까지 1년이 걸렸을 정도다. 겁이 많고, 겁이 많으니 모든 게 조심스럽다."  

- 조연 오디션을 봤는데 주연이 됐다는 건 오디션에서 매력을 잘 어필했다는 뜻이고, 출연 작품마다 평가도 성과도 좋았다. 자기 평가가 너무 박한 것 아닌가. 
"작품마다 부족함을 느꼈고, 자책의 시간을 많이 가졌다. 나를 의심하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어떤 한 부분을 자책하기 시작하면 끝까지 매달리면서 생각하는 스타일이라 더 그랬다. 하지만 드라마를 시작하고 나서 좋게 봐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생겼다. 그래서 요즘엔 이런 나를 좋아해 주는 분들도 계신데 내가 너무 스스로를 비하하는 일이 그분들께 죄송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요즘은 일부러 자신감을 더 가져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그래야 새로운 시도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더 많은 것들을 보여드릴 수 있을 테니까. <백일의 낭군님>이 방송되는 동안에도 일부러 촬영지로 여행도 다녀오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으면서 좋은 기억들을 만들었다." 

- <백일의 낭군님>으로 생각이 많이 바뀐 것 같다. 
"여러 가지로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알게 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일의 낭군님>이라는 드라마에서 굳이 나라는 사람, 정제윤이라는 캐릭터를 기억해주실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저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좋은 분들과 작품 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너무 큰 사랑을 받았다. 내가 드라마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자책했던 목소리도 좋아해 주시고, 평범한 외모도 팬분들은 멋있어 보인다고 해주시더라.

얼마 전에는 '내가 미쳤나. 별로인데 잘생겨 보이네'라는 댓글을 읽었는데 기분이 너무 좋더라. 이런 나를 좋게 봐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이제 달라진 마음가짐으로, 어떤 연기를 하는,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 
"흔한 답이겠지만, 사람 냄새 나는 배우, 믿고 맡길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이런 역할 얘한테 맡겨보면 할 수 있겠다', '저런 사람이 정말 있을 것 같다' 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이런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쌓여, 시간이 지날수록 호감 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 
백일의 낭군님 김선호 정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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