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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서울시청 뒤편에서 강남구 재건마을 주민들이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집회를 하고 있다.
 지난 22일 서울시청 뒤편에서 강남구 재건마을 주민들이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집회를 하고 있다.
ⓒ 신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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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강제 이주시켜 놓고 이제 와서 나가라니요."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의 서울시 국정감사가 열린 지난 22일 오전 시청 뒤편. 서울 강남구 재건마을 주민 20여명이 푯말을 들고 모였다. 대부분 흰머리 지긋한 60~70대 고령자들이었다.

푯말에는 '재건마을 주민 요구 즉각 수용하라', '40년 고통 외면 말라' 등의 문구가 손 글씨로 적혀있었다.

이들의 터전인 재건마을은 최근 정부가 발표한 신혼희망타운 예정지 중 하나다. 신혼희망타운 건립이 본격화되면, 내쫓길 처지인 사람들이다. 공식적으로 이들은 재건마을의 '불법점유자'이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불법점유자가 됐을까. 왜 그들은 40년 고통이라 말할까. 이야기는 40년 전 박정희·전두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1년 12월 21일이요."


재건마을에서 4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조철순(60)씨는 이 마을에 강제 이주하게 된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조씨의 남편인 강아무개(67)씨는 원래 폐지와 고철을 수집하던 사람이었다.

박정희가 만든 자활근로대, 전두환이 강제 이주시켜
 
강남 자활근로대 대원을 증명하는 등록증
 강남 자활근로대 대원을 증명하는 등록증
ⓒ 재건마을사수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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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절인 지난 1979년 강씨는 자활 근로대라는 단체로 강제 편입됐다. 자활 근로대는 정부가 넝마주이나 전쟁고아 등 도시 부랑인들을 관리한다는 명목에서 만들어진 단체다. 강씨 등 자활근로대원들은 처음에는 서초동 정보사 뒷산에 설치된 막사에 머물렀다.

그런데 주변 동네에서 '부랑자가 돌아다녀 불편하다'는 민원이 빗발쳤다. 전두환 정권은 1981년 12월 자활 근로대 2000여 명을 분산 수용하기로 한다. 강씨를 비롯한 자활근로대 1-2지대 소속 120여 명은 1981년 12월 21일 강남구 재건마을에 터를 잡았다.

군사정권의 서슬 퍼런 시절이었다. 제대로 된 항의 한번 못했다. 조씨는 남편과 함께 살기 위해 채 돌도 지나지 않은 딸 아이를 데리고 1982년 6월 이곳에 왔다. 비닐하우스 한 동을 쪼게 만든 4평 남짓 방 한 칸이 조씨 가족의 집이었다.

길게 줄 서야 하는 화장실, 오염된 물을 자갈로 걸러 식수로

비닐하우스가 집이었으니 생활편의시설이 제대로 갖춰질 리 만무했다.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용 화장실은 언제나 길게 줄을 서야 했다. 수도도 나오지 않아 오염된 물을 모래와 자갈 등으로 정화해 마셨다. 전기도 차량을 이용해 끌어다 썼다.

마을을 관리하는 경찰들은 대원들을 실적 대상으로 여겼다. 검거 실적이 없을 때면 대원 중 희생양을 찾았다. 조씨는 "후리갈이라고 경찰들이 매번 실적을 올려야 하는 게 있다"며 "실적이 없을 때면 공병 같은 거 주워온 거 보고 너희들 이거 훔쳤지 하고 몰아갔다"고 말했다.

얼굴에 헝겊을 씌우고 고춧가루 물을 붓는 등 고문도 이뤄졌다는 게 조씨의 기억이다. 대원들이 수집한 폐품들은 경찰이 걷어갔다. 이들이 갖고 있는 통장은 '저축해주겠다'고 압류했다. 대신 한 달에 2~3만 원 정도를 줬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금액이었다.

그렇게 7년을 살았다. 1988년 올림픽이 끝나자 경찰은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경찰은 "자활 근로대 사표를 내면 너희에게 자유를 주겠다"며 주민들로부터 사표를 받았다. 그러면서 "이 땅은 너네 땅이니 자유롭게 살아라"고 선심 쓰듯 이야기했다.

"이제 여기 살아라"는 경찰 말 믿고 정착 시작한 주민들
 

"여기서 살아라"는 말을 믿은 주민들은 이곳에 집을 지었다. 패널로 지은 판잣집이지만, 비닐하우스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살던 주민들은 지난 1990년, 1가구당 20만~30만 원을 내라는 변상금 통지서를 받는다.

'이곳에 살라'던 경찰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그는 "이걸 내야 사는 것을 인정 받는다, 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주민들은 변상금을 모두 납부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1년 또 변상금 고지서가 날아왔다. 이번엔 가구당 200만~300만 원 수준의 거액이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조씨가 법률 상담을 받으니 "무단 점유로 인한 변상금 고지서이고, 변상금을 내면 불법 점유자가 되는 것"이라는 답을 받았다. 정부가 강제 이주시킨 땅에 살았더니, 정부는 '불법 점유자' 딱지를 붙였다.

그때부터 마을 주민들은 변상금을 내지 않았다. 조씨는 "변상금을 내는 순간 우리가 불법점유자인 것을 인정하는 꼴인데 어떻게 변상금을 내겠느냐"고 했다. 주민들이 주소지 이전을 하려고 해도 구청에선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주민들의 자녀들은 동네 슈퍼 등 알음알음 알고 있는 사람을 통해 주소지를 등록하고 학교를 배정받아야 했다. 주소지 등록이 이뤄진 2009년 이전까지 이들은 '유령'같은 존재였다. 마을 주민들에게는 모두 4억 8557만 원의 토지변상금도 부과돼 있다.

넝마주이에서 이젠 불법점유자... 4억 토지변상금도 쌓여 
 
지난 2011년 6월, 판자촌이 밀집해 있는 강남구 포이동 재건마을 화재로 판자촌 건물 96가구 중 70가구가 불에 타 수십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지난 2011년 6월, 판자촌이 밀집해 있는 강남구 포이동 재건마을 화재로 판자촌 건물 96가구 중 70가구가 불에 타 수십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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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주민들은 한번 발붙인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지난 2011년 6월 재건마을에서 대형 화재가 나 70% 가량의 주택이 불타 없어졌을 때도 주민들은 다시 시멘트를 발라 집을 짓고 살았다.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위협받기 시작한 건 지난 2012년, 서울시가 재건마을의 공영 개발 계획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서울시는 공영 개발 계획을 발표하면서 주민들과 별다른 협의를 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포이동재건마을 대책위원회(아래 주민대책위)를 꾸려 집단 반발했고, 결국 개발 계획은 무기한 연기됐다.

이후 서울시 실무진들과 주민 주거 대책과 관련한 협의를 진행해온 주민들에게 또 다시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9월 정부가 신혼희망타운 건립 계획을 발표하면서 재건마을을 사업지로 지정했다는 것. 정부에 의해 이곳에 강제 정착한 주민들은 또다시 정부에 의해 이 곳에서 내몰리게 될 처지에 놓였다.
 
포이동 재건마을 전경. 사진 오른쪽에 있는 조립식 가건물이 화재 이후 새로 지은 집의 모습이다(2011년 12월 13일 모습)
▲ 포이동 재건마을 포이동 재건마을 전경. 사진 오른쪽에 있는 조립식 가건물이 화재 이후 새로 지은 집의 모습이다(2011년 12월 13일 모습)
ⓒ 구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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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의해 도구로 이용된 주민들, 국가가 해결해야"

이들이 원하는 건 30~40평짜리 분양 아파트가 아니다. 다만 가구당 10평 남짓한 공동체 주택을 짓고 살게 해달라는 것이다.

조씨는 "서울시가 소유한 땅을 임대받아 10평짜리 공동체 주택을 짓고 사는 것이 우리 바람"이라며 "국가가 이곳에 살라고 족쇄를 묶어놓고, 유령처럼 사는 삶을 강요받다가 또다시 나가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재웅 포이동주거복구대책위원회 의장은 "이 마을 주민들이 살아온 궤적을 보면, 국가에 의해 도구로써 이용된 삶"이라면서 "국가가 저지른 문제에 대해선 국가가 해결책을 마련해서 이 사람들의 아픈 역사를 치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2일 열린 서울시 국정감사에서 재건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는 끝내 거론되지 않았다. 다만 정동영 민주평화당 의원은 별도의 보도 자료를 내고 "강제 이주민들이 이제는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박원순 시장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태그:#재건마을, #박정희,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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