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씨 11/9>의 한 장면.

영화 <화씨 11/9>의 한 장면. ⓒ 영화사진진, 누리픽쳐스

 

여러 영화들이 관심을 받았던 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신작 <화씨 11/9>도 화제작 대열에 올라있었다. 그의 전작 <화씨 9/11>의 제목을 살짝 뒤집어 놓은 이번 영화의 국내판 제목엔 원제와 달리 '트럼프의 시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때문에 영화를 보기 직전까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치부를 깊고 속 시원하게 찌르는 영화로 예상했다. 

처음엔 물론 그랬다. 그러나 128분의 상영 시간 중 약 20분이 지났을 무렵,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영화가 진짜로 전하려는 메시지의 극히 일부분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충격에 충격을 더하다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준 9/11 테러. 미국 뉴욕엔 해당 사건을 기리는 추모 공원, 추모비 등이 세워져 있고, 전 세계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 희생자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힌 비석을 본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마땅히 기억해야 할 당시 사건을 두고 마이클 무어는 다큐 <화씨 9/11>을 통해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이 테러는 정말 극렬 테러리스트의 순수한 계획이었을까'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당시 부시 정부를 두고 마이클 무어는 9/11 테러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 측과 부시 대통령 사이의 연결고리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라크 전쟁을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미국 재벌 기업의 검은 속내, 자국민의 피를 테러와 맞바꾼 부시 정부를 정조준한 해당 다큐멘터리는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났다. 날짜만 뒤집은 마이클 무어의 신작 영화 <화씨 11/9>는 또다시 이렇게 묻는다. '미국민 다수가 싫어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어떻게 해서 세상에 등장하게 됐는가'다. 그가 당선된 날이 바로 2016년 11월 9일이었다. 

<화씨 9/11>에서 좁은 범위를 깊게 팠던 마이클 무어는 <화씨 11/9>를 통해 범위를 넓혀 미국 사회의 부조리, 그리고 그 안에서 빛나고 있는 작은 희망의 불씨에 주목했다. 트럼프가 등장하기까지 면밀하게 작용한 정치사회적 현상을 설명하면서 국민의 대리인이 아닌 권력에만 눈이 먼 정치인들, 이들을 규탄하며 자신의 권리를 되찾으려는 시민운동을 교차시키며 제시하고 있다.
 
영화의 초반부는 예상했던 흐름이었다. 트럼프가 정치권에 등장하기 전까지 어떤 인물이었고 공화당 내부에서조차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가 설명된다. 여기에 더해 대의민주제를 표방하지만, 선거인단 투표를 거치는 미국 특유의 선거 제도를 비판하며, 민주주의 왜곡 현상을 언급한다.

영화는 트럼프의 대항마로 낙점된 힐러리 클린턴이 사실 민주당원 다수가 원하지 않았던 인물이었음을 꼬집는다. 버니 샌더슨은 당내 경선에서 힐러리에게 패한 뒤 그를 지지하며 민주당원의 화합을 부탁했지만, 당시 위키리크스 등이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DNC)가 경선과정에서 힐러리에게 유리하게 편파 관리를 했다고 폭로하면서 사태가 한때 심각해지도 했다. 

<화씨 11/9>에선 버니 샌더스를 사실상 외면한 민주당 수뇌부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이에 실망하고 당을 탈퇴하는 당원들의 모습을 제시했다. 여기서부터 꽤 충격적인 내용이 이어진다. 영화는 트럼프의 등장이 공화당과 민주당의 합작품이었다면서 다수 국민의 뜻이 정치에 반영되지 않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현상들을 하나하나 나열한다.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미국 미시건 주 플린트시의 납중독 사건이었다. 얼핏 트럼프와 상관없어 보이지만, 마이클 무어는 플린트시 납중독 문제가 곧 트럼프와 뿌리 깊은 미국 사회의 유색인종 폄하 의식과 연관돼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납중독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오바마 역시 이를 세련된 방식으로 외면했다는 점을 영화는 고발한다. "그가 방문하기 전엔 나의 대통령이었지만 방문 이후엔 나의 대통령이 아니었다"며 절망하던 플린트 시민들의 인터뷰가 고스란히 등장한다. 
 
 영화 <화씨 11/9>의 한 장면.

영화 <화씨 11/9>의 한 장면. 마이클 무어 감독은 직접 살수 트럭을 몰고 주민들 납중독 사태에 책임자를 찾아가 플린트시 수원지에서 퍼온 물을 퍼붓는다. ⓒ 영화사진진, 누리픽쳐스

 
대안은 있는가

주민들의 납중독 수치 조작을 보건당국에 종용한 주지사와 시장, 용기를 내 그런 정황을 내부고발한 보건 담당자가 일자리를 잃게 된 사연. <화씨 11/9>는 단순한 정치적 음모가 아닌 미국 사회 전역에 퍼진 파괴된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이 절망 안에서도 마이클 무어는 행동하는 시민들을 놓치지 않는다. 진짜 나라를 사랑한다면 지금의 트럼프 정부의 실정을 욕하고 정치를 외면하는 게 아니라 참여해야 한다며 각 지역구 내에서 출마를 결심한 여러 사람을 담았다. 전직 군인, 교사, 성소수자 등 다양한 시민들이 피선거자로서의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하는 모습이 꽤 묵직하게 다가온다. 

다큐를 보다 보면, 사실상 미국 경제 및 정치 제도를 상당 부분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이 오버랩된다. 대의민주주의가 더 이상 시민들의 의견과 생각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다면, 결국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는 단순한 진리. 영화는 이것을 공허한 외침이나 주장으로 마무리하는 게 아닌 비극적인 현실, 사회적 단면을 제시하며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데 성공했다.
 
 영화 <화씨 11/9>의 한 장면.

영화 <화씨 11/9>의 한 장면. ⓒ 영화사진진, 누리픽쳐스

 
이미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한 소위 사회파 다큐멘터리, 그리고 곧 개봉할 여러 다큐멘터리 영화들도 참고할 지점이 많다. 부실한 취재, 헐거운 논리라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한 몇몇 영화들은 더욱 곱씹어 봐야 할 것 같다. 물론 <화씨 11/9> 또한 그러한 비판에서 예외는 아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마이클 무어는 자신이 제시한 가설의 증명을 위해 관객들과 전문가들조차 쉽게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균형감을 갖고 있다는 점. 

특정 정파, 특정 시민단체에 함몰되지 않고, 마이클 무어는 있는 그대로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영화 말미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부산영화제 상영 당시 객석에선 영화가 끝난 뒤 상당 시간 동안 박수가 이어지기도 했다.

영화 <화씨 11/9>는 오는 11월 중 개봉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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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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