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집의 시간들> 포스터

영화 <집의 시간들> 포스터 ⓒ KT&G 상상마당

 
1960년대 후반에 본격화된 수도권 인구 집중에 대처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아파트 건설 정책을 추진했다. '부동산 공화국'으로 일컬어지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는 주거의 공간이라기보단 투기의 대상이자 욕망의 산물에 가깝다. 많은 TV 프로그램, 책, 영화 등은 그런 현상을 조명하곤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집의 시간들>은 다른 시각에서 아파트를 바라본다. 영화는 대한주택공사가 1980년에 완공한 둔촌주공아파트에서 길고 짧은 시간을 보낸 주민들을 재건축이 확정되기 직전이었던 2016년 5월에 만난다. 이들은 곧 사라질 집과 아파트 단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집의 시간들>은 아파트를 제2의 고향으로 삼은 사람들의 사연인 셈이다.

<집의 시간들>은 사라져가는 둔촌주공아파트를 기록한 계간지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와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여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한 <가정방문 프로젝트>가 만난 작품이다. 둔촌주공아파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이인규 편집장은 아파트를 고향과 보금자리로 보며 사람들의 추억과 풍경을 총 5권의 계간지로 발간된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에 담아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다.

인터뷰나 이야기 없이 방문객의 입장에서 집을 둘러보는 <가정방문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라야 영상작가는 "크기와 구조가 똑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란 궁금증이 생겼다. 곧바로 이인규 편집장에게 <가정방문> 영상을 보내 함께 작업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둔촌주공아파트에 거주하는 13가구를 찾아 집의 모습과 사람들의 목소리를 다룬 <집의 시간들>은 시작했다.

부동산에 대한 욕망 보다는, '집'에 집중한 영화
 
 영화 <집의 시간들>의 한 장면

영화 <집의 시간들>의 한 장면 ⓒ KT&G 상상마당

 
<집의 시간들>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이 이뤄진 시대적 배경이나 공간에 배인 열망의 근원을 파고들지 않는다. 서울 개발의 핵심이자 대표적인 주거 공간인 아파트를 공공, 환경, 추억, 욕망 등 공적 역사와 사적 역사라는 두 가지 층위에서 관찰하고 사유한 정재은 감독의 <아파트 생태계>와 다른 접근을 취한다. <집의 시간들>은 철저하게 사람들의 기억과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집의 시간들>은 아파트 내부와 외부 풍경을 두루 비춘다. 연출자가 만난 13명의 둔촌주공아파트 거주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를 들려줄 뿐이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은 공간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고 다양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아파트는 똑같은 외형을 지녔지만, 그 속을 기록된 각자의 역사는 모두 달랐다.

영화가 던지는 "집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은 여러 답변으로 돌아온다. 어떤 이는 "집은 우리한테 가족"이라고 말한다. 시간을 함께하며 삶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새긴 집은 가족과 다름이 없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 만큼 집도 늙어가는 걸 보며 한 사람은 "사는 동안에 이렇게 세월이 지나가는 줄 몰랐어"라며 지난 시간을 돌이킨다. 하나하나 집들이 품은 시간은 켜켜이 쌓여 공동체의 문화와 역사를 형성한다. 집은 가족이며 시간이고, 문화이자 역사이다.

한 사람이 인터뷰 중에 사용한 "만들어져 간다"는 표현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것은 아파트란 공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꾸민다'는 뜻이다. 영화 속에서 아파트는 같은 크기와 형태를 가졌지만, 가구, 도구, 사진 등은 제각각의 취향과 습관으로 채워져 고유한 세계를 만들어 간다.
 
 영화 <집의 시간들>의 한 장면

영화 <집의 시간들>의 한 장면 ⓒ KT&G 상상마당

 
다른 한편으론 '적응한다'는 의미도 지닌다. 둔촌주공아파트는 완공된 지 38년이나 지난 탓에 이런저런 불편함이 크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몸을 거기에 맞추어 살아간다. 사람은 나무와 꽃, 휴식 공간 같은 자연과 공존을 꾀한다. 한 거주자의 "둔촌주공아파트에서 진짜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사실은 서울에 살면서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란 대답은 서울의 재개발과 재건축이 어디에 더욱 주목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집의 시간들>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돌아보고 '무엇이 사라져가고 있는지'를 관찰한다. 그리고 '어떤 내일을 만들어야 하나'를 고민한다. 아파트는 물질적 가치가 전부가 아니다. 아파트는 또 다른 가치를 가진 소중한 공간이다. 한 인터뷰이의 마지막 말이 기억에 남는다. 

"좋은 터전을 더 좋은 터전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더 나쁜 터전으로 만들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어요."
집의 시간들 라야 이인규 다큐멘터리 조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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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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