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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학자 리지린이 쓴 <고조선 연구>가 한가람역사문화 연구소장 이덕일 해역으로 출간되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이자 <영조와 사도> 저자이고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해설'을 강연하기도 한 나는, 이번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교열 작업에도 참여했다. 남쪽에서 이미 출간된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1995년 초판)와 제목이 같기 때문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라는 제목으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가 북한에서는 1962년 출간되었고, 남한에서는 1989년에 영인본이 나왔는데, 구하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인용문이 번역문 없이 한문 사료 그대로 실려 있어서 일반 독자가 읽기 어려웠다.

이번에 이덕일 박사가 모든 한문 사료를 우리말로 번역하고 주석을 붙인 후 해제까지 달았기 때문에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요즘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고조선 강역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인지라 때맞춰 나온 중요한 책이라 하겠다.

<고조선 연구> 발표 뒤 북에서 정설이 된 대륙고조선설
 
1961년 북경대 박사논문으로 통과된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리지린은 이 책에서 일제식민사학자는 물론 봉건사학자의 사관을 비판함은 물론 중국의 사가들도 대국주의, 중화주의라 비판하면서 주체적인 사관 아래 고조선 역사를 재구성했다.
 1961년 북경대 박사논문으로 통과된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리지린은 이 책에서 일제식민사학자는 물론 봉건사학자의 사관을 비판함은 물론 중국의 사가들도 대국주의, 중화주의라 비판하면서 주체적인 사관 아래 고조선 역사를 재구성했다.
ⓒ 도서출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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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리지린은 북한의 과학원 력사연구소 고대사연구실에서 일하다 1958년 북경대 대학원에 들어간다. 지도교수인 고사변학파 고힐강(顧詰剛)과 학문적 견해가 달랐음에도 '대륙고조선설'과 '낙랑군재요동설'을 토대로 연구를 계속해서 1961년 6월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었다.

북한에서도 해방 후 '낙랑군=평양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는데, 1962년 이 책 <고조선 연구>가 간행되면서 북한학계에서 '낙랑군=평양설'은 자취를 감추었고, '대륙고조선설'과 '낙랑군=요동설'이 주류의 견해가 되었다. 장장 15년에 걸친 논쟁의 결과였다. 현재 남한 학계 일각에서는 북한 학계가 리지린의 학설을 완전히 폐기시켰다는 근거 없는 낭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북한의 <조선전사>는 고조선의 서쪽 강역에 대해 리지린이 주장한 난하설 및 대릉하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또한 해방 후 평양에서 근 3천여 기에 달하는 고분을 발굴해 한사군 낙랑군의 무덤이 아니라 위만 조선 이후 등장한 낙랑국(최리의 낙랑국, 일반인들에게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로 잘 알려진) 유적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3천여 기 중에 한사군 무덤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북한 학계의 견해다. 

남한 학계는 일제 강점시기에 조선총독부가 정립한 '낙랑군=평양설'을 아직도 부동의 '정설'로 받들고,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신봉하면서, '낙랑군=요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은 해방 이후 계속되어 왔는데, 남한의 대표적인 고조선 연구 전문가인 윤내현 교수의 경우를 살펴보자.

리지린 논문 영향 받은 윤내현 교수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는 신채호와 같은 민족사학자, 그리고 리지린과 같은 북한 사학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는 신채호와 같은 민족사학자, 그리고 리지린과 같은 북한 사학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만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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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 박물관장을 지낸 윤내현은 1980년대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수학하던 시절 하버드 옌칭 도서관에서 리지린의 저서를 발견하고 고조선사 연구에 뛰어들었다. 원래 윤내현의 전공은 중국 고대 상(商)나라였다. 자신의 전공과 관련해서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한국 고대사인 고조선을 만났던 것이다.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는 러시아의 고조선 연구 학자인 유엠 부찐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서 러시아 학자로 하여금 대륙고조선설을 주장하는 <고조선 연구>를 출간하게 했다. 윤내현도 유엠 부찐과 마찬가지로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윤내현은 주류 고대사학계 내부에서 리지린 논문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윤내현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를 읽은 것은 사실이지만 표절이라고 하긴 어렵다. 두 학자의 주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윤내현 역시 '대륙고조선' 과 '낙랑군재요동'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리지린과 동일하다. 그러나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접근 방법이 다르고 그에 따라 세부적인 내용이 다르다.

리지린과 윤내현이 보는 고조선 서쪽 경계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에 실린 기원전 5~4세기 조선 고대 국가들의 위치 약도.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에 실린 기원전 5~4세기 조선 고대 국가들의 위치 약도.
ⓒ 도서출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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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강역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고조선의 서쪽 경계 지역이 어디였느냐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해 리지린은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서기전 3세기까지는 하북성 난하였다가 서기전 3세기 초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에게 영토를 빼앗긴 후 요녕성 대릉하 동쪽으로 축소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오늘의 중국 요녕성 개평으로 보고 있다.

윤내현 역시 발해 북안 난하 유역을 고조선의 서쪽 경계지역으로 보고 있고, 중국에게 밀려서 한때 축소되었다고 보지만 진·한(秦漢) 때 다시 난하를 국경으로 삼았다고 보는 점이 다르다.

또한 윤내현은 단군, 기자, 위만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는 리지린의 논문이 통과된 뒤 30여 년이 지나서 나온 책이기에 새롭게 발굴된 유물과 자료를 참조할 수 있었고, 때문에 리지린이 놓친 부분을 보완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윤내현에 의하면, 기자는 고조선 서쪽 강역에 살던 인물이다. 상(商)나라의 제후국인 '기(箕)국'의 제후이자 실존 인물이었던 기자는 상나라가 망한 후에 이웃 나라였던 고조선으로 일단의 사람들과 함께 망명한다. 기자가 망명한 곳은 고조선 제국의 서쪽 변방(난하 유역), 즉 고조선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서쪽 경계지역이었다. 당시 고조선은 단군이 고조선을 창업한 이래 여러 나라들을 제후국(거수국)으로 거느리고 있던 제국이었다.

기자 일족이 망명을 하자 단군은 서쪽 변방 지역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고 당시 그 인근에 있던 도읍을 장단경으로 옮겼다. 단군이 기자일족의 거주를 허락한 지역이 바로 오늘날 발해 북안 난하 유역인데, 기자조선은 단군고조선의 제후국으로서 고조선의 서쪽 경계 지역을 확정하는 데 단초가 된다.

이후 기자조선의 정권을 찬탈한 망명자 위만은 왕검성에 도읍하고, 한나라의 외신(제후국)으로 입장을 정리한 뒤에 한나라의 지원을 받아 위만조선의 동쪽에 있는 단군(고조선)을 공격한다.

이 공격으로 위만조선의 강역은 현재의 요서 지역에 있는 대릉하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당연히 단군이 통치하던 고조선의 강역은 난하 유역에서 대릉하 유역으로 축소된다. 그 뒤 위만조선은 한나라 무제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위만조선에 한사군이 설치된다. 따라서 당연히 낙랑군은 오늘날 난하 유역에 설치된 것이다.

윤내현의 이 논지는 고조선의 통치자는 단군에서 기자, 기자에서 위만으로 바뀐 적이 없고, 기자에서 위만, 위만에서 한사군이 설치되는 과정은 단군이 계속 통치하던 중에 전체 고조선 제국 영역의 서쪽 변방 경계지역에서 벌어졌던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서쪽 변방 경계 지역이 오늘날 난하 유역이라는 말이다.

윤내현은 중국 고대 문헌들과 우리의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의 문헌과 갑골문자의 분석을 통해 단군과 기자의 실존, 기자의 조선 망명설, 단군고조선이 제후국을 거느린 제국이었다는 것을 역사적 기정사실로 확정하고 논지를 전개한다.

예족과 맥족에 대한 견해차

반면, 리지린은 윤내현 논지와는 다르다. 리지린은 고조선을 건국한 고조선족은 예족이라고 본다. 단군을 고조선을 건국한 왕을 일컫는 칭호라고 보며, 단군사화(신화)에 조선반도와 산동지방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란생 신화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원주민이었던 조이부족과 다른 계통이었던 예족이 고조선을 건국한 고조선 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리지린은 예족과 맥족이 고조선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중국 입장에서 동이족이라고 불리는 '족'이 우리의 고대 국가 형성의 바탕으로 여겨지는데, 리지린은 이 관점에서 예족과 맥족이 고조선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세밀하게 설명한다.

또한 기자라는 명칭은 '기(箕)'국 이라는 봉지를 받은 제후의 명칭일 뿐이고,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해 왔다는 것은 후대에 조작된 전설이라고 본다. 또 리지린은 왕검성을 고조선의 도읍이라고 봤지만 윤내현은 왕검성은 위만조선의 도읍이지 단군조선의 도읍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사안은 윤내현의 논지와 크게 다른 면들이다.

윤내현과 리지린 저술의 다른 부분은 '3장 예족(濊族)과 맥족(貊族)에 대한 고찰', '4장 숙신(肅愼)에 대한 고찰', '5장 부여(夫餘)에 대한 고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리지린은 동이족이 우리 고대 국가의 뿌리라고 볼 때 이들 종족들이 중국 고대 문헌에 기록되어졌던 흔적들을 찾아 고조선과 고구려, 부여와 어떤 관계에 있었던 것인지 소상하게 추적하고 있다.

윤내현은 고조선은 제후국(거수국)을 거느린 제국이었다는 논리로 동이족들의 세부적인 사항들은 제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그에 비해 리지린은 각 부족들의 흔적을 면밀히 소개하고 있다.

리지린의 논지에는 윤내현의 주장처럼 고조선이 제후국(거수국)들을 거느렸던 제국이었다는 이론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두 학자가 '대륙고조선설'과 '낙랑군=요동설'을 함께 주장하고 있지만 고조선의 나라 형태에 대한 관점에서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리지린은 1960년대에 중국 북경대에서 수학할 때 고힐강이 인정한 것처럼 고조선 관련 자료의 95%를 보았다. 그 결과 1962년이라는 시점을 생각하면 경탄할 정도의 저서인 <고조선 연구>를 출간했다. 그런데 북한에서 1960년대 초반에 이미 정리된 '대륙고조선설'과 '낙랑군=요동설'은 남한학계에 의해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중국에서 하도 많은 고조선 유적, 유물들이 발굴되자 남한의 강단사학계도 고조선의 강역은 평안남도에서 슬그머니 지금의 요하까지 확장시켰지만 '대륙고조선설'과 일란성 쌍둥이인 '낙랑군=요동설'은 모른 체하면서 '낙랑군=평양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북한 리지린의 대륙고조선설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는 윤내현의 학문적 성과를 애써 무시하고 있다. 이런 남한 현실에서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출간되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고조선의 역사적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공부하는 학자와 한국사에 관심 많은 독자라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와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는 모두 읽기를 미뤄서는 안 되는 책이다.

고조선 연구 - 상 - 개정판

윤내현 지음, 만권당(2015)


고조선 연구 - 하 - 개정판

윤내현 지음, 만권당(2016)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도서출판 말(2018)


태그:#리지린, #윤내현, #고조선 연구, #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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