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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 소설가. 지난 15일 이천시청 근처 커피숍에서.
 안재성 소설가. 지난 15일 이천시청 근처 커피숍에서.
ⓒ 김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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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열매가 가을빛으로 익어 가던 날이었다. 지난 15일 안재성 소설가를 만났다. 이천시청 근처, 유리창 너머로 가을 들녘이 내려다보이는 커피숍이었다.

이천시 설성면에서 20년째 집필 활동을 하고 있는 안재성 작가는 올 3월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를 출간했다. 실존 인물 정찬우(鄭燦宇, 1929~1970)가 한국 전쟁의 참상을 생생히 기록한 수기, 50년 간 옷장 깊숙한 곳에 있던 낡고 빛바랜 수첩 속 실화가 소설로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작가는 1989년에 장편소설 <파업>으로 제2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근현대사를 소재로 한 다수의 장편소설과 인물 평전 30여 권도 펴냈다. <경성 트로이카>, <황금이삭>, <박헌영 평전>, <이관술>, <윤한봉> 등 셀 수 없이 많다.

용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강원대 축산과에 재학중인 1980년대 초부터 강원도 탄광지대, 서울과 안산 등지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민주화 바람이 불고 세상이 바뀌어 가던 1993년 즈음 포클레인 일도 배웠다.

한동안 글은 쓰지 않았다. 작가는 포클레인 기사로 일하며 생활하다가 1998년에 이천으로 내려왔다. 그가 이천시 설성면에 터를 잡게 된 까닭은 시골에서 목축업과 과수원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겠다는 확고한 의지 때문이었다.

"이천은 어렸을 때부터 자주 다녔어요. 버스 타고, 기차(수려선)타고요. 양지면은 이천과 가깝고 이천에 친척 어르신들이 사셨거든요. 포클레인 기사로 일하던 1997년 장호원에서 충주 가는 도로 공사 일을 했는데 그때도 이천을 자주 다녔어요. 지금 보면 타 지역에 비해 넓은 평야도 아닌데 그 당시에는 낮은 산과 구릉, 논과 밭이 넓고 탁 트여서 좋았어요. 시골에서 살게 되면 이천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지금도 이천은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시골 생활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목장에서 나온 동물 퇴비는 과수원 땅을 기름지게 했고 크고 달고 맛있는 복숭아를 수확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컸다. 축산업은 하루 종일 매달려야했고 나중엔 파동으로 이어졌다. 복숭아 농사도 역시 녹록지 않았다. 그 후, 작가는 농번기 때는 포클레인으로 마을 사람들 농사 일을 해줬다. 몇 년 전부터는 집필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안재성 소설가의 장편소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창비>
 안재성 소설가의 장편소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창비>
ⓒ 김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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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우리나라에서 월드컵 할 때였죠. 다시 글을 쓰게 됐어요. 다른 이유는 아니고 출판사의 의뢰를 받고 글을 써야 해서 근래에 나온 인기 있는 책을 읽게 됐죠. 책을 보니 이혼과 성에 관한 사소설들이 주를 이루더군요. '작가들이 왜 이런 글을 쓰나, 왜 이런 글이 인기 있을까?' 이해가 안 됐어요. 돌아보면 당시의 소설은 시대와 삶의 반영이었어요. 저한테는 다른 작가들이 쓰지 않은, 사실을 기반으로 한 사람의 서사적인 이야기를 쓰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는 공동체 혹은 한 사회와 인간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다. 대상이 사회주의자이거나 항일운동가이거나 정치인, 혹은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으나 역사 속에 묻힌 평범한 보통사람 일 수 있다. 작가는 그들을 복원해주고 그 이야기를 기록하여 책으로 남기고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한다.

"제가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 운동에 관한 글을 쓴다고 하니까 급진파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러지 않은 측면도 많아요. 인간의 사상이라는 게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지요. 한 사람의 사상이나 심리, 생각 등을 한가지로 규정지을 수도 없고요. 보수적인 측면이 있는가 반면 아주 진보적인 측면도 있으니까요. 그러한 의미에서 제가 쓰는 글의 대상이나 시대를 규정짓지는 않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작가의 사인이 적힌 책을 읽었다. 책장을 넘기다 인터뷰 때 작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뒤에서 걸어온 사람은 잘 살게 된다." 격동의 시대를 눈물겹게 견디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들을 향한 작가의 애달픈 마음과 따뜻한 시선도 느껴졌다. 오늘 우리가 누린 평화는 누군가의 희생이 남기고 간 선물이다. 불현듯 고마운 마음이 일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안재성 지음, 창비(2018)


태그:#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희생, #이천시 설성면, #전태일 문학상,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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