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19 16:06최종 업데이트 18.10.19 16:06
 

대구 앞산 안일암 1910년대 국내 무장 항일투쟁을 주도했던 조선국권회복단이 결성된 역사의 장소이지만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사찰 경내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기념 공간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 정만진

 박재혁이 학교를 졸업할 무렵 영남지역에서는 잇따라 항일지하조직이 결성되어 국권회복투쟁을 전개하였다. 가장 규모가 크고 치열하게 활동한 조직이 조선국권회복단이다. 이 시기에 박재혁은 독립운동과 관련 사상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1월 15일(음) 경북 달성군 수성면 대동면 안일암이라는 암자에서 달성친목회와 그 부속기관의 친목회 회원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달성친목회의 회원 서상일ㆍ이시영ㆍ박영모ㆍ홍주일 등은 시회(詩會)를 가장한 모임을 열고, 국권회복에 관한 방안을 협의하였다. 이들은 국내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해외의 독립운동세력과 연계하여 최후로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단군태황조의 위패를 갖추어 국권회복의 기도를 올리며, 다음과 같은 서약서를 작성하여 단군태황조를 봉사하고 신명을 바쳐 국권회복운동에 종사할 것을 다짐하였다. 

①한국의 주권을 회복한다. 
②매년 정월 15일 단군의 위패 앞에 목적 수행을 기도한다.
③단원은 마음대로 탈퇴하지 않는다. 
④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⑤만약 이를 누설할 경우는 신명(神明)의 주벌을 받는다. 
⑥결사대로 하여금 살육케 한다. 


조직은 통령(統領) 윤상태(달성), 외교부장 서상일(대구), 교통부장 이시영(대구)ㆍ박영모(합천), 기밀부장 홍주일(청도), 문서부장 이영국(대구)ㆍ서병용(대구), 권유부장 김규(충남 아산), 유세부장 정순영(대구), 결사대장 황병기(호남), 마산지부장 안확(마산) 동 임원 이형재(마산)ㆍ김기성(마산) 등이었다.

단원은 전국 각지의 저명한 민족운동가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주로 대구를 기반으로 하는 부호 또는 중산층ㆍ계몽주의자ㆍ신학문 이수자ㆍ유생 등이었다. 점차 경상도지방의 의병전쟁 관련자ㆍ전통유림 등 뜻있는 인사와 부호들도 참여하였다. 
 

대구 앞산 안일암 안내판 안일암의 위치, 왕건 피신, 조선국권회복단 결성, 33인 대표 중 1인인 용성 스님 중창 등 사찰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정만진

 
정월 대보름날에 시회(詩會)를 가장한 모임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유림적 기반에서 출사한 인물들이었고, 근대적 교육을 받았거나 선각자적 의식을 가지고 현실에 참여한 인물들이었다.

서상일ㆍ박상진ㆍ안희제 등은 경영인으로서 활동하였으며, 남형우ㆍ안확 등은 교사로서, 이영국ㆍ서병용ㆍ신상태 등은 은행원으로서, 김응섭은 변호사로서 근대적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윤상태는 전군수로 근대적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구국교육에 앞장섰으며, 박상진ㆍ정운일ㆍ변상태ㆍ황병기 등은 의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또 장석영ㆍ우하교ㆍ조긍섭 등은 전통적인 유림이었다.
 

백산상회 1914년 부산 중구 동광동에 설립한 백산상회. ⓒ 독립기념관

 
이들은 상업조직을 광범하게 활용하였다. 

대표적인 상업조직은 박상진의 상덕태상회, 서상일의 태궁상회, 윤상태의 칠곡군 왜관 향산상회, 안희제의 부산 백산상회, 통영의 곡물상 서상호, 마산 이형제의 원동상회와 김기성의 환오상회 등이었다. 

상업조직은 일제의 무력적 탄압이라는 악조건 하에서 비밀지하운동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정보연락과 재정기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경의 감시망을 피하고 부호들에게 쉽게 접근하여 활동하는 데는 상업조직이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업조직을 통해 국내의 독립운동세력이나 만주 독립운동단체와 대한민국임시정부 등과 상호 연결되어,국내ㆍ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서상일의 태궁상회와 윤상태의 향산상회가 국권회복단의 거점이라면, 박상진의 상덕태상회와 영주의 대동상점은 대한광복회의 거점이었고, 부산의 백산상회는 대동청년단의 거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만주 단둥(安東) 이관구의 삼달양행, 서세충의 성신태상회, 신백우의 성덕태상회, 창춘(長春)의 상원양행, 핑티엔(奉天) 이해천의 해천상회 등의 곡물상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단원 박상진ㆍ정운일 등이 풍기의 광복단과 연계하여 1915년 7월 대한광복회를 결성하면서 조직의 활동영역이 더욱 넓어졌다.

뿐만 아니라 경남 일원에서 활동하던 대동청년단과도 제휴하였다. 단원으로서 대한광복회에 참여한 인사는 박상진ㆍ이시영ㆍ정순영ㆍ홍주일ㆍ정운일ㆍ최준 등이 있으며, 대동청년단에 관련된 인사로는 윤상태ㆍ서상일ㆍ신상태ㆍ남형우ㆍ박영모ㆍ안희제ㆍ박중화 등이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결성 이후 1919년 조직의 전모가 일경에 노출될 때까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는 바, 최대의 과제는 만주나 노령과 연결하여 국권회복운동의 지원이었다. 

설립 초기 국권회복단의 단원들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재력을 가졌으므로 자신의 재산을 희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재산만으로는 군대양성이나 무기구입에 부응할 수 없어, 대구를 비롯한 국내 자산가들로부터 일정액을 갹출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목표하에 정운일ㆍ최병규ㆍ최준명 등은 대구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금에 나섰다. 

1차로 1915년 4월경 최준명은 서창규를 만나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다시 6월경 최병규ㆍ정운일ㆍ김재열 등은 권총을 소지하고 서창규를 만나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끝내 거절당했다. 
 

1910년대 국내 무장 독립투쟁을 이끈 대한광복회는 박상진, 채기중, 우재룡 등의 주도하에 1915년 음력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창립되었다. 그러나 현재 달성공원에는 이 역사적 사실을 기려 세워진 조형물은 물론 해설해주는 안내판도 하나 없다. ⓒ 정만진

 
7월 15일 대한광복회가 결성되면서 국권회복단과 밀접한 관련하에 활동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이른바 대구권총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박상진이 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 소속의 이시영ㆍ정순영ㆍ홍주일ㆍ정운일ㆍ김재열 등을 비롯하여 대구의 최병규ㆍ최준명ㆍ김진만ㆍ김진우 등에게 명령하여 결행되었다. 

이들은 9월 3일 2차 모금을 위해 정재학ㆍ이장우ㆍ서우순의 금고를 털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단원들은 1917년 6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김진우 징역 12년, 김진만ㆍ정운일ㆍ최병규 징역 10년, 권국필ㆍ최준명 징역 2년, 박상진ㆍ김재열 징역 6월, 홍주일  징역 5월, 이시영 징역 4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1919년 3ㆍ1혁명 때 단원들은 대동청년단ㆍ대한광복회 등과 함께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동년 2월 23~24일 이시영과 대동청년단의 김광제ㆍ변상태가 서울에 파견되어 3ㆍ1혁명에 참여하였다. 이시영은 만주, 김관제는 경남 동부, 변상태는 경남 서부로 출발하였다. 변상태는 경남 서부지역을 순회하면서 시위를 계획하였고, 4월 3일 삼진의거:창원군 진동ㆍ진서ㆍ진전, 즉 진동사건(鎭東事件)을 주도하였다.

이 외에도 1919년 4월 초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군자금 1만 5,000원을 송금하였다. 또 1919년 경상도지방 유림이 주도한 독립청원서사건에도 관련을 맺어 단원 장석영과 우하교가 연서하였고, 김응섭과 조긍섭은 독립청원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였으며, 이를 김응섭과 남형우가 상하이로 가져갔다. 

1919년 동지의 밀고로 관련인물 28명 중 13명이 피체되었는데, 이 사건이 이른바 대구 28인사건이다. 이 사건은 1919년 6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심리되었다. 연루된 28명은 국권회복단과 대동청년단원이었으며,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사건으로도 불리었다. (주석 1)

주석
1> 권대웅, <조선국권회복단>, <한국독립운동사사전(4)>, 389~340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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