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창궐>.

영화 <창궐>. ⓒ NEW

 
서울 궁궐들의 수난시대인 듯하다. 9월 12일 개봉된 영화 <물괴>에서는 경복궁 근정전이 괴물에 의해 파괴되더니, 10월 25일 개봉되는 <창궐>에서는 창덕궁 인정전이 야귀(夜鬼)들로 인해 불바다가 된다.
 
근정전과 인정전은 각각의 궁궐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가장 공식적인 행사가 거행되던 곳이다. 그런 두 공간이, 한 달여 간격으로 개봉하는 두 영화에서 철저히 파괴되는 것이다. 조선왕조 체제의 핵심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두 곳이 허무하게 부서지는 장면은 지금까지의 사극에서 쉽게 볼 수 없었다.
 
현빈·장동건 주연의 <창궐>은 서해상의 이양선(서양 선박)에서 발생한 야귀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야귀들은 좀비나 흡혈귀를 연상케 한다. 야귀한테 물린 사람은 야귀가 된 뒤 기존 야귀들과 합세해 사람들을 공격한다.
 
이양선에서 제물포에 상륙한 야귀들은 한양을 향해 맹렬히 진격한다. 이 과정에서 숫자가 점점 불어난다. 야귀는 밤에만 사람을 공격한다. 이들이 창궐한 여러 날 동안, 조선의 밤은 그야말로 지옥 천지가 되고 만다.
 
 야귀들이 황폐화시킨 제물포.

야귀들이 황폐화시킨 제물포. ⓒ NEW

 
 인조시대 떠올리게 하는 인물 설정들
 
영화 속 임금은 이조(김의성 분)다. 인조(仁祖)라는 묘호(사당 명칭)를 이조로 바꿨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조의 아들인 강림대군(현빈 분)이 이청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것과 균형을 맞추려면, 이조는 묘호가 아닌 이름이 되어야 한다.
 
영화 속 이조는 실제 임금인 인조를 떠올리게 한다. 병자호란을 겪은 임금이라는 점과, 아들들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낸 점 등이 그러하다. 따라서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광해군 다음인 인조시대(1623~1649년)라고 볼 수 있다.
 
이조의 차남인 강림대군은 실제 인물 봉림대군과 대응된다. 청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하고 돌아왔다는 점, 세자 신분으로 사망한 형을 대신해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한다는 점에서 봉림대군이 떠오른다.
 
영화에서 조정 실권자이자 악의 대명사이며 강림대군의 경쟁자로 나오는 병조판서 김자준(장동건 분)은 실제 인물 김자점을 연상시킨다. 실제 인물 김자점은 친(親)청나라파로 평가됐다. 인조 정권 때 위세를 누리다가, 인조가 죽고 둘째아들 효종(봉림대군)이 즉위한 뒤 역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했다.
 
영화 속 김자준은 이양선에서 발생한 야귀의 존재를 알고도 숨긴다. 야귀들의 궁궐 침투를 허용하고 이를 이용해 역성혁명을 일으키려 한다. 이 과정에서 이조가 야귀에 물려 죽자, 강림대군이 백성들과 힘을 합쳐 김자준 및 야귀 세력에 맞서 싸운다는 게 영화의 기본 줄거리다.
 
 김자준(장동건 분).

김자준(장동건 분). ⓒ NEW

 
영화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이는 인조시대는 조선왕조의 자주성이 크게 훼손된 시기였다. 지금의 서울 석촌호수에 있었던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례를 거행한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창궐>은 그 시대 우리 민족이 해결하지 못한 자주성의 한(恨)을 문학적 방법으로 해소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 속에서 가장 의로운 인물인 소원세자(김태우 분)가 청나라에 맞서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려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에서 그런 주제 의식이 드러난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입을 통해 자신의 주제를 밝히고 싶었던 듯하다.
 
또 왕조를 위협하는 야귀들이 서해상의 서양 선박에서부터 출현했다는 설정도, 외세에 맞선 자주성의 문제를 제시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할 만하다. 징그럽고 험악한 야귀들의 모습 때문에 관객들의 눈은 좀 피곤해질 수 있지만, 외세에 기반을 둔 야귀들을 내세움으로써 <창궐>은 상당히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질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보여주는 괴기스럽고 참혹한 분위기는 이전 사극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지만, 1600년대 조선 사람들의 공포소설 수요에는 어느 정도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강림대군(현빈 분).

강림대군(현빈 분). ⓒ NEW

  
당시 사람들은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 같은 굵직한 참상을 많이 겪었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광경을 지켜본 세대이기 때문에, 이 시대 사람들은 웬만한 공포 소설에는 동요할 리 없었다. 2008년에 <한자한문교육> 제21집에 실린 김정숙의 '조선시대 필기·야담집 속 귀신·요괴담의 변화 양상'에는 "이 시기 사람들은 이전 시기에 비해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했기에 작품 속에 묘사된 귀신·요괴의 모습도 훨씬 구체적"이라고 나온다.
 
실제로 1600년대에 나온 <강도몽유록>이란 작자 미상의 소설에서는 여성들의 목에 꽂힌 칼, 머리 깨진 시신, 입과 배에서 흘러나오는 피, 다 부서진 뼈 등이 아무렇지도 않게 묘사된다. 전쟁을 많이 겪은 시대인지라, 그렇게 '세게' 묘사하지 않으면 소설이 인기를 끌기 힘들었을 것이다. <창궐>이 1600년대 조선의 야귀들을 기괴하고 끔찍하게 묘사한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심리적 정서와 상당 부분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역사 무시한 스토리, 역사 파괴 수준
 
하지만, 영화의 역사 파괴는 좀 심한 편이다. 인조시대라고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인조시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도록 만드는 장치들이 영화 곳곳에 깔려 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어느 정도 아는 관객들로서는, 영화를 보면서 인조시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인조시대를 떠올리도록 해놓았으면서도, 이 영화는 인조시대의 주요 사실관계를 무시한 채 스토리를 전개했다.
 
이조의 장남인 소원세자가 청나라의 압박으로부터 자주성을 지키려고 싸우다가, 역모 혐의를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스토리도 그렇다. 소원세자에 해당하는 실제 인물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미움을 받다가 독살로 의심되는 죽음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영화에서는 임금인 이조가 야귀의 공격을 받고 끔찍하게 죽은 것으로 묘사됐다. 이 점의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영화 속 이조는 장남인 소원세자뿐 아니라 차남인 강림대군마저 못마땅해 한다. 소원세자는 물론이고 강림대군한테도 왕권을 물려줄 의사가 없다. 동시에, 소원세자의 아들들한테도 물려줄 의사가 없다.
 
이 설정은 너무 대책 없다. 왕조를 자기 대에서 끝낼 마음이 없다면 누구도 이렇게 할 수 없었다. 촌수가 먼 왕족한테 왕권을 넘길 수도 있지만, 그렇게 등극한 왕은 힘을 갖기 힘들었다. 현직 임금의 아들·손자를 다 죽이거나 몰아낸 상태에서 왕이 된 먼 친족은 정통성 시비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다. 왕조가 망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한, 어느 왕도 영화 속 이조처럼 행동할 리 없었다.
 
실제의 인조는 장남인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차남인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세웠다. 이 과정에서, 조정 중신들의 반발에 직면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중신들은 소현세자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소현세자의 아들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왕조가 안정되기 때문이었다. 왕의 차남보다는 왕의 장손이 더 높은 정통성을 갖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중론을 무시했다. 이 때문에 봉림대군은 왕이 된 뒤에 보수파인 서인당과 마찰을 겪다가 갑자기 죽고 말았다.
 
 이조(김의성 분).

이조(김의성 분). ⓒ NEW

  
<창궐>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이것?
 
영화에서는 김자준이 왕권에 욕심을 내는 것처럼 묘사했다. 하지만 실제의 김자점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권세는 인조 임금의 신임에 기초하는 것이었다. 김자점은 이씨를 몰아내고 타성(他姓) 왕조를 세울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영화에서는 김자준이 강림대군과 맞서 김씨 왕조를 세우려 했다고 했다. 실제의 김자점이 역모 혐의로 사형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 거사를 일으키지는 못했다. 효종이 즉위한 뒤에 유배생활을 하다가 역모 혐의가 밝혀져 사형을 당했을 뿐이다. 또 스스로 왕이 되려 하지도 않았다. 이씨 왕족을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을 따름이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관계에 신경 쓰지 않고 스토리를 전개하기는 했지만, 이 영화는 '역사발전의 주인공은 민중 혹은 대중'이라는 당연하고도 싫증나지 않는 주제를 강렬하게 던지고 있다. 역사적 실제와 관계없이 영화 속 강림대군은 백성들의 손발을 빌려 야귀들의 난과 김자준의 난을 수습하려 한다. 그의 모습은, 특권층이 아닌 일반 백성의 편이 돼야 성공한 군주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데 기여하고 있다.
 
영화에서 야귀들의 이동 경로를 서해상의 이양선에서 제물포로, 제물포에서 한양으로 설정한 것도, 해석에 따라서는 의미 깊다. 이 경로는 1882년에 청나라 군대가 한양 시민들의 반란인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지나갔던 길이다.
 
이 길로 들어온 청나라 군대가 그로부터 12년간 내정간섭을 하는 바람에 조선의 자주권이 사상 최악의 상태로 떨어졌고, 이것은 조선이 동학전쟁·청일전쟁·러일전쟁의 격동을 겪다가 결국에 멸망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이 루트는 1945년 9월에는 미군이 지나가는 데 이용됐다. 이 길로 들어온 미군이 일본군보다는 한국인들과 대결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군이 한국인들의 자생적 조직인 건국준비위원회를 와해시키고 미군정을 수립한 뒤 한국 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루트를 통해 한양에 침투한 야귀들을 물리치기 위해 영화 속의 강림대군은 기존 정치세력이 아닌 일반 백성들과 손을 잡았다. 지난 백 수십 년간 한민족의 운명을 억눌러온 것에 대한 이 영화 나름의 해법이 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창궐 야귀 인조 소현세자 봉림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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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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