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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입국한 3만 명의 탈북자 중 대다수가 청년이다. 하지만 학교, 직장 어디를 가나 따라다니는 '탈북'이라는 꼬리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청년들에게 큰 무게이다. 북한이라는 뿌리 없이 이들의 삶을 말할 수 없지만, 이제는 탈북자보다는 한국인 청년으로 불리고 싶은 7인을 만났다. 각 스토리는 <미디어눈> 에디터들이 탈북청년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기사에 사용된 이름, 나이, 지명은 북에 남겨진 가족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일부 수정이 있었음을 사전에 밝힌다. - 기자말

(지난 회에서 이어집니다.)
 
 미디어눈 은성 작가
 미디어눈 은성 작가
ⓒ 은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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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탈북을 생각한 것도 나의 고생을 보면서 시작된 것 같다. 

장사를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방에서 담배를 태우고 계셨는데, 갑자기 나를 방으로 부르셨다. 아버지는 말없이 담배만 태우시다가 한참이 지나고서야 입을 여셨다. "너 외국에 나가서 살아볼 생각 없냐?" 딱 그 한마디였다.

나는 단칼에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 땅에서 다시 우리 집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아버지는 더는 어떤 말도 그리고 탈북 이야기도 꺼내지 않으셨다.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아버지는 이미 그전부터 탈북을 생각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보위부(국정원과 비슷한 북한 정부 기관) 직원들을 잘 알고 계셨는데, 그들에게 탈북인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다만 탈북인이 얼마나 되고,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 장사할 자금을 마련하려고 중국 친척 집에 다녀오신 적이 있는데, 거기서 어마어마한 북한 사람들이 한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게다가 중국의 눈부신 성장을 눈으로 보고나니 탈북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 같다. 아버지는 그때 혼자서 탈북을 할 수도 있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가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다시 탈북 이야기를 꺼내기까지는 그 뒤로 몇 년이 걸렸다. 그 사이 화폐 개혁으로 집안 경제가 무너지자 마음을 굳히신 것이다. 나도 무슨 일이라도 해서 가족을 돕고 싶었다.

결국 한 번 타면 수개월을 바다에서 보내는 꽃게잡이 배에 오르게 됐다. 몇 달을 바다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날, 아버지가 말을 건네셨다. "너 이러지 말고 아버지하고 장사하자." 그 말을 듣는 순간 직감했다. 이 말이 장사하자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본 가족들 모습
 
 미디어눈 은성 작가
 미디어눈 은성 작가
ⓒ 은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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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른 척 아버지를 따르기로 했다. 아버지는 수출할 석탄을 실어다 파는 일을 했는데 그날은 아침 일찍부터 준비를 서두르셨다. 어디로 간다는 말은 안 했지만 왠지 먼 길을 떠날 것 같았다.

출발하려고 보니 어머니는 아침 일찍 장사를 나가서 집에 안 계셨고, 할머니와 고모, 동생들만 배웅을 나왔는데 다들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분명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나도 눈물이 고였지만 애써 참으며 아무 말 없이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그 장면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가족들의 모습이다. 

북한에서는 거주지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통행증이 필요하다. 특히 평양이나 국경지역, 휴전선 지역을 출입할 때는 승인번호 증명서가 필요한데, 발급이 매우 까다롭다. 아버지는 보통은 정식 허가를 받아 이동을 하셨는데, 그날은 승인번호 증명서 없이 일반통행 증명서만 가지고 청진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청진부터 국경까지는 뇌물을 주면서 이동했다.

분명 장사하는 것이면 승인번호 증명서를 받았을 텐데, 아버지가 뭔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국경 지대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중국으로 갈 것이니 이제부터는 그냥 따르라고 하셨다. 중국에서 돈을 벌어오려는 줄 알았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아버지는 국경경비대 소속 군인을 만났다. 그 군인은 나와 같은 학교를 나온 우리 동네 형이었다. 익숙한 모습을 보니 전에도 이곳에서 형을 만났던 것 같다. 형에게 중국에 며칠만 다녀올 테니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형은 2천 원만 주면 다른 군인들을 술 사 먹여 다 재워두겠다고 했다. 해가 떨어지고 두만강에 섰다. 그 형 덕분인지 다행히 군인들은 안 보였다.

오히려 복병은 다른 데 있었다. 보통 두만강 상류는 개울물처럼 물이 흘러 마음만 먹으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가 강을 건넌 것은 8월이었는데, 장마 후 강물 수위가 높아져 물이 목까지 차올랐다. 잘못하다간 물살에 휩쓸려 갈 수도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거센 물살을 발끝으로 버티며 간신히 강을 건넜다. 

중국에 와서는 금방 돌아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머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아버지는 집을 나서기 전이나 중국에 와서나 한국에 간다는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한국행 계획은 두 달이 지나서야 처음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 계획에 격렬히 반대했다. 내 머리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게다가 어머니와는 인사도 못 하고 떠나왔고, 집에 남겨진 동생들과 가족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북한의 비극을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현실 앞에서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중국에서 중장비 운전하는 일을 했는데, 똑같은 일을 할 때 중국 사람은 중국 돈 3천 원을 받는데 우리는 500원을 받았다. 비자가 없는 것을 중국 사람들이 이용한 것이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이렇게 해서는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나를 설득하셨다. 

"너 여기서 이런 식으로 언제 돈 벌어서 가족들 데려올래. 한국에 가서도 브로커 쓰면 가족을 데려올 수 있다. 한국으로 가자."

이번에는 아버지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7월 고향을 떠나, 8월 두만강을 넘고, 중국·라오스·태국을 거쳐, 12월 3일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고향을 떠나온 지 5개월 만이었다. 

한국에 처음 온 날 엄청나게 추웠던 기억이 난다. 태국에서 출발할 때는 나름 따뜻한 옷을 입고 온다고 츄리닝을 걸쳐 입고 왔는데, 한겨울에 한국 날씨를 견디기에는 부족했다. 다행히 입국하자마자 조사기관으로 이동했는데, 건물 실내로 들어가 몸을 녹이고서야 '여기가 한국이구나!' 싶었다. 

태국에서 40일 감옥 생활, 조사 3개월, 하나원 3개월, 몇 달을 갇혀 지내며 진짜 한국이 궁금했다. 안에서 건물만 봐도 잘 사는 곳인 것이 느껴지는데, 바깥세상은 어떨지 상상이 안 갔다. 

물론 밖에 생활은 쉽지 않았다. ATM 기계에서 돈을 뽑을 줄도 모르고, 말도 안 통해서 길도 못 찾고, 택시 요금을 왕창 바가지 쓰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좋은 사회였다.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자유를 완전히 느끼고 나서야 아버지가 왜 그렇게 한국에 오고 싶어 하셨는지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중에 아버지가 고백하시길, 북한의 비극을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자식들만큼은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어서 일생을 걸고 탈북을 준비하신 것이다. 

가족들 걱정에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자유의 행복을 온전히 알게 되니 빨리 돈을 벌어서 북에 있는 가족을 데려오고 싶었다. 아버지와 나는 열심히 돈을 모았고 브로커를 고향 집으로 보냈다. 어머니를 모시고 오면 어디를 먼저 데려갈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이 전해왔다. 브로커가 중간에 잡혔다는 것이다. 상황이 복잡해졌다. 잡혀간 브로커는 결국 모든 것을 실토하고 풀려났다. 대신에 탈북을 시도한 어머니와 가족들이 노동 단련대(북한 구금시설의 한 종류)에 잡혀갔다. 

노동 단련대에 잡혀온 사람들은 고된 노동을 하며 옥살이를 해야 한다. 그리고 고된 노동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제대로 된 식사가 안 나온다. 일반 인민들에게도 배급이 나오지 않는데 감옥까지 식량이 배급될 리가 없는 것이다. 들어보니 하루 옥수수 열 알이 식사의 전부란다.

밖에서 돈을 써서 사식을 넣어주지 않으면 굶어 죽고 병들어 죽기 일쑤다. 그런 고초를 어머니와 가족들이 한 달을 겪었다. 게다가 보위부에 배치를 받았던 친척은 탈북한 친척이 있다는 것이 밝혀져 임용이 취소되기도 했다. 가족들 걱정에 편히 잠들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다시 돈을 모아 다른 브로커를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우리 가족은 특별 감시 대상에 올라 이동이 쉽지가 않다. 특히 평양에서 국경지대까지 이동하려면 통행증뿐 아니라 이동 수단이 있어야 하는데 교통 상황이 여의치 않다. 가장 쉬운 이동 방법이 철도인데 한국처럼 서울에서 부산까지 4시간 거리가 아니다.

아무리 빠른 기차를 타도 최소 3박이 걸린다. 열차는 급행, 준급행, 완행이 있는데 제일 느린 완행을 타면 열흘도 걸린다. 전기가 부족해서 역이 아닌 곳에 정차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기차가 중간에 서면 다시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 보니 지금까지 가족들 얼굴을 못 보고 있다.
 미디어눈 은성 작가
 미디어눈 은성 작가
ⓒ 미디어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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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어 자려고 누우면 눈물이 흘렀다. 가족들을 떠올린 것도 아니다. 그냥 자려고 눕기만 하면, 나도 몰래 눈물이 흘러 베개가 젖었다. 잘 때마다 기도한다. 건강히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말이다.

전 재산이 일주일 만에 사라지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한 끼를 배불리 먹을 수가 없고, 옥수수 열 알을 먹으며 고초를 겪어야 하는 곳. 그리고 그런 일을 겪어도 불평할 수 없는 사회. 북한 사람들의 아픔이자 나의 아픔이다.

언젠가 반드시 고향에 가족들과 친구들이 지금 내가 누리는 이 자유를 누리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평화의 그날 가족들과 행복하게 만나기를 소망한다. 나는 평화의 그 날을 꿈꾸는 청년 송광현이다. 
 
 탈북청년 토크콘서트
 탈북청년 토크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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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취재. 글: 조은총 에디터 l 삽화: 은성 작가
미디어눈 팀 블로그에도 연재중입니다. https://brunch.co.kr/@medianoon/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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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LINK(Liberty in North Korea)와 함께 영화 '장마당세대' 상영과 탈북청년 취재원들이 참여하는 LIVE 토크콘서트를 엽니다. 신청: https://goo.gl/forms/FdqicRyfOKJ48u6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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