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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크리스토발 거리 기념품 파는 아이.
 산크리스토발 거리 기념품 파는 아이.
ⓒ 유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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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세 여행자 청마오 동

아바나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이십 분을 날아 바다 건너 멕시코 칸쿤에 닿았다. 공항에는 번듯한 유니폼을 입고 버스 요금을 두 배로 뻥튀기해서 파는 호객꾼들로 붐볐다. 국경을 건너 낯선 나라에 처음 도착할 때는 언제나 조금 긴장하게 되는데, 멕시코도 입구부터 만만치가 않았다. 발품을 팔아 공항을 헤맨 끝에 정상 가격에 표를 파는 매표소를 찾았다.

멕시코 유명 휴양지 칸쿤을 피해 플라야 델 카르멘, 카르멘의 해변으로 이동했다. 한적한 바다를 찾아오긴 했지만, 마야 후손들의 땅 유카탄 반도의 7월은 쿠바보다 열기가 더 강했다. 체감온도가 40도가 넘는 것 같았다. 저렴한 도미토리 숙소에는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는 날이 장날, 숙소는 때마침 하수도 청소 중이라 냄새도 진동했다. 

옆방에는 65세의 중국인 여행자 청마오 동 Chengmao Dong 아저씨가 장기 투숙 중이었다. 중남미를 1년 10개월째 여행하고 있는 동씨는 몇 주 동안 이 무덥고 저렴한 숙소에 머물며 그동안의 여행 사진과 글을 정리하고 인터넷 블로그 연재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노트북으로 자신의 구글 지도를 보여주었는데, 그동안 여행한 곳에는 핑크색 하트 표시가, 앞으로 여행하고 싶은 곳은 초록색 팻말 표시가 되어 있었다. 아시아와 아메리카 지도가 핑크색 표시들로 빼곡했다. 이번 중남미 여행도 아름다운 곳이 많지만 그동안 가본 가장 경이로운 자연으로 티베트를 꼽으며 자신이 찍은 멋진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동씨와 나이가 비슷한, 한국에서 일하는 나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숙소의 유일한 동양인 동 씨와 서양인 친구들.
 숙소의 유일한 동양인 동 씨와 서양인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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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술자예요. 원래 베이징 사람인데 젊은 시절 문화대혁명 기간에 동북 지역으로 하방(下放)된 걸 계기로 동북농업대학에서 공부했어요. 이후 수십 년 동안 베이징 슈강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했어요. 지금은 제 딸이 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지요. 몇 년 전 퇴직하고 세계여행을 시작했어요. 공장 일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 줄곧 꿈꿔 오던 일이지요. 

중국에 있는 나의 부인은 다리가 불편해서 잘 걸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중국 국내에서는 항상 함께 승용차를 타고 여행했는데, 이곳 아메리카까지는 같이 오지 못했죠. 다음 번에는 꼭 부인과 같이 여행할 수 있능 방법을 찾고 싶어요. 그게 남은 꿈이에요.

Don't rush! 저는 서두르지 않아요. 늘 천천히 여행해요. 중남미는 물가가 싼 곳도 많고, 친절한 사람들이 많아서 이렇게 오래 여행하게 됐어요."


인터뷰를 하자고 하니 더위에도 셔츠를 꺼내어 입으셨다. 다른 여행자들에게 항상 조심스럽고 예의바르게 대해서 영어로 하시는 말씀도 세심한 존댓말로 들려왔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의 문장을 절로 떠오르게 하는 동씨. 다음 번 여행은 그의 애틋한 꿈처럼 아주머니와 함께하실 수 있기를.
 
청마오 동 씨와 함께.
 청마오 동 씨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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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첸이트사, 공포와 눈물의 밀림 호텔

쿠바에서 신나게 수영을 하다가 몇 시간 만에 살이 빨갛게 타서 크게 고생을 한지 몇 주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쉽지만 멕시코 바다 수영을 포기했다.

더위와 습도를 피해 산악지대로 이동하자고 친구와 생각을 모았으나 그곳까지의 거리는 1천 킬로미터,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이동해야 하는 거리였다. 멕시코에는 산적과 강도가 많아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를 많이 들었는데, 우리가 여행한 멕시코는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한적한 쿠바와는 달리 골목마다 다국적 기업의 프랜차이즈, 편의점과 현금인출기, 식당과 상점이 많았고, 광고와 간판들이 번쩍번쩍 손님을 끄는 익숙한 자본주의 사회의 거리였다. 

버스 회사에서 관리하는 터미널들은 깨끗하고, 버스는 깨끗할수록 더 비싸졌다. 13세기 마야 문명의 중심지였던 치첸이트사 유적지 옆 마을 피스테 Piste로 가는 2등 버스를 탔다. 1등 버스가 아니어서일까, 아니 아마도 뜨거운 태양 때문이었으리라.

버스는 툴룸을 지나 바야돌리드로 향하던 중 밀림 한가운데 뚫린 고속도로 위에 조용히 멈춰서더니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버스 기사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태연했으나 휴대폰의 전파도 터지지 않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이 익숙한 듯 승객의 절반 이상이 택시와 콜렉티보를 잡아 타고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갈 길이 멀거나 버스비가 아까운 사람들 십여 명만이 땡볕의 고속도로 위에 서서, 버스 기사가 어서 방법을 찾기를 기다렸다. 삼십여 분이 지난 후 같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세워 합승을 할 수 있었고, 바야돌리드 터미널에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 다음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땡볕 고속도로에 멈춰선 버스. 전화기의 전파가 터지지 않자 버스기사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땡볕 고속도로에 멈춰선 버스. 전화기의 전파가 터지지 않자 버스기사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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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도착한 피스테는 시골 마을이라 부유한 관광객을 위한 고급 호텔 말고는 황량해 보이는 낡은 숙소 두 곳 밖에 없었다. 다음 날 새벽 치첸이트사로 가야하므로 다른 선택지가 없어 낡은 숙소로 들어갔다. 일곱 개의 방에 투숙객은 아무도 없고, 주인 노부부가 고양이 몇 마리와 살고 있었다.

언제 또 손님이 왔는지 모를 어두침침하고 퀘퀘한 방, 그래도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가 돌아가고 물은 나오는 듯 보였다. 시설에 비해 저렴하지도 않았지만, 길가에 거대한, 아니, 1미터가 넘는 이구아나가 꿈뻑꿈뻑 활개치고 다니는 밀림 마을에서 섣불리 텐트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생존 전문가 베어 그릴스가 아니다. 비싼 입장료에도 굳이 치첸이트사를 들렀다 가기로 결정한 게 조금 후회스러웠다. '텔레비전과 책에서 본 마야 피라미드와 내일 직접 볼 피라미드는 엄청 다르겠지, 아마도.'
 
다른 투숙객이 아무도 없고 비가 오면 물이 차는 밀림 호텔의 복도.
 다른 투숙객이 아무도 없고 비가 오면 물이 차는 밀림 호텔의 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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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덥고 지친데다 숙소의 열악한 분위기에 충격을 받은 친구는 급기야 눈물을 흘렸다. 친구가 평생 동안 만난 최악의 숙소라고 했다. 짐을 풀자 게릴라성 폭우가 쏟아져 숙소 복도까지 물이 흥건해졌다. 씻으려고 하니 욕실에 커다란 바퀴벌레가 나왔고 어두워지자 손바닥만한 나방들이 방으로 뛰어들었다. 작은 도마뱀은 쫓아내도 자꾸만 머리맡으로 다시 기어와 울어댔다. 

"덥지만 않으면 이런 시설도 견딜만할 텐데 여름 우기의 쿠바와 유카탄 반도는 진짜 힘드네요. 여기 주민들은 이 날씨가 익숙하잖아요. 사계절이 없고 일 년 내내 더운 건 어떤 느낌일까요." 

무더위를 피해 고산지대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여행자인 우리는 이곳 현지인들의 삶과 계절의 느낌을 영영 알기 어려울 것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가 새벽 녘 닭들이 우는 소리에 깨어났다. 치첸이트사 매표소가 문을 열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 주인 할머니를 깨우러 가는데 지붕 위에 처음 보는 커다란 동물이 조용히 기어가고 있었다. 둥글둥글한 몸통과 긴 꼬리. 아르마딜로, 남미 천산갑이었다. 아르마딜로도 우리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하더니 고양이처럼 순식간에 지붕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새벽 안개 속의 신기루 같았던 아르마딜로는, 밀림 호텔에서 무사히 하룻밤을 보내고 떠나는 우리를 배웅하러 나온 건 아니었을까. 

배낭을 매고 걸어서는 한 시간이 훌쩍 넘을 거리라 합승 콜렉티보나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싶었지만 이른 아침이라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난감한 마음에 잡아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지나가는 트럭을 향해 손을 흔들었는데 신기하게도 트럭이 그 자리에 딱 멈춰섰다. 흔쾌히 우리를 태워준 사람들은 치첸이트사 유적지의 기념품 상인들이었다. 가득 실린 짐들 사이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휘청대다 보니 금새 유적 입구에 다다랐다. 
 
피스테와 치첸이트사 길가 곳곳에는 커다란 이구아나가 기어다녔다.
 피스테와 치첸이트사 길가 곳곳에는 커다란 이구아나가 기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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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봉지과자에 하나씩 들어 있던 동그란 플라스틱 딱지를 모았던 기억이 있다. 딱지의 주제가 세계의 유적지였고 그중에는 '멕시코, 치첸이트사'의 그림도 있었다. 그 피라미드가 눈앞에 나타났다. 서기 450년경 지금의 과테말라 지역에서 이주해온 마야 족의 한 부족인 이트사 족이 처음 건설을 시작했고, 1000년경 멕시코 북부에서 이주한 톨텍 족이 200년에 걸쳐 완공했다는 세계적인 유적지. 2007년 '새로운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마야의 달력과 우주관을 형상화한 쿠쿨칸(마야의 뱀신) 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신전, 천문대, 수녀원, 경기장, 기우제를 지내던 80미터 깊이의 우물 '세노테'를 둘러보았다. 또 치첸이트사는 인간의 심장을 올려놓았다는 재단 차크몰 chac mool 이 있는 곳이다. 해골 조각도 유난히 많다. 고리에 공을 넣는 경기의 승부에 따라 선수들은 산재물이 되었고 우물에는 주로 여자아이들이 던져졌다고 한다. 인신공양이 이루어지던 종교와 정치, 사회, 문화란 어떤 모습과 감정이었을지,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먼 옛날의 이야기로 느껴졌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유적지,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세계문화유산, 미디어와 책에서 추천하고 남들이 얘기하는 장소, 그런 수많은 곳들 중 하나인 치첸이트사를 '직접 보았다'라는 만족감은 있었지만 엄청나게 놀랍거나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이트사 족의 땅이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로 가득찬 정오 무렵 우리는 메리다로 가는 버스를 탔다.

여행자의 천국과 거리의 아이들 

16세기부터 유카탄 주의 중심지였던 메리다는 활기차고 예스러웠다. 광장과 시장을 실컷 구경하며 며칠을 지내고, 야간 버스로 열두 시간을 달려 2200미터 산맥에 자리한 작은 도시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로 이동했다. 고도가 100미터씩 높아질 때마다 온도는 0.6도씩 떨어지니, 바닷가 유카탄과 이곳의 온도 차이는 약 13도. 이게 얼마만의 선선한 날씨인지,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변했다. 

산크리스토발은 식민지 시대 광산 개발을 위해 형성된 도시로 지금도 스페인식의 좁은 자갈길과 붉은 지붕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과테말라와 국경을 마주한 치아파스 주의 중심지이고 주민 대부분이 마야 족이다. 광산업이 주산업이지만 1974년 정부에 의해 역사 기념 도시로 지정된 후 관광업도 성장하고 있다. 숙박비와 식비가 저렴하고 날씨가 좋고 볼거리가 많아서 장기간 머무는 여행자들이 많다. 나와 친구도 일정을 늦춰 일주일을 머물렀다. 매일 해 질 녘이 되면 중심가 차 없는 거리에는 각양각색의 여행자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수공예품을 팔거나 거리 공연을 열었다.
 
산크리스토발 골목에서 '샹송 방랑자 Chanson Vagabonde' 디 제프 D'Jef 씨와 즉석 합주를 했다.
 산크리스토발 골목에서 "샹송 방랑자 Chanson Vagabonde" 디 제프 D"Jef 씨와 즉석 합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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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파스 주는 멕시코에서 가장 가난한 지방으로 무장 혁명 단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jército Zapatista de Liberación Nacional; EZLN)의 본거지이다. 사파티스타라는 명칭은 1910년대 멕시코 혁명 당시 농업 개혁을 주장했던 남부 해방군 사령관 에밀리아노 사파타에서 비롯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제도혁명당(PRI)의 일당독재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저항한다. 농민 생존권을 위한 정책인 옥수수 수입제한, 커피 가격 보조금, 공동토지소유를 포기하며 체결된 북미자유무역협정 나프타 NAFTA에 반대해 1994년 치아파스 다섯 지역을 점령하고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1996년 정부는 원주민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겠다는 협정을 맺었지만 시행은 지지부진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다. 23개 지역의 협의에 의해서만 활동하는 민주적 자치 공동체에 가깝다고 보는 주장이 있는 반면, 사파티스타 역시 또 하나의 권위적인 권력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거리의 상점에서 파는 사파티스타 엽서에는 정의로운 단어들이 가득했다.
 거리의 상점에서 파는 사파티스타 엽서에는 정의로운 단어들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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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상점들에는 사파티스타 기념품이 가득했다. 화가 베아트리스 오로라 Beatriz Aurora의 사파티스타 그림 엽서에는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들, 'Paz 평화, Libertad 자유, Democracia 민주주의, Independencia 독립, Salud 건강, Trabajo 직업, Tierra 토지, Pan 빵, Educacion 교육, Techo 기술, Cultura 문화' 등의 팻말을 든 '여남노소' 다인종의 사람들과 동물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 이념과 상징들은 정의롭고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여행자의 '천국'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수많은 원주민 아이들은 거리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학교에 가지 못하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오전부터 밤까지 관광객들에게 손을 내밀어 장사를 하는 예닐곱 살의 아이들. 기념품이 잔뜩 담긴 짐가방을 매고, 껌과 사탕이 진열된 좌판을 매고, 동전 몇 개를 벌어서 거리 음식으로 허기를 달래는 아이들. 물건을 파는데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아무런 표정 없이 그저 하루 종일 거리를 맴돌며 "싱코 페소, 싱코 페소(5페소)"를 되뇌는 아이들.

"저 아이들은 싱코 페소를 셈할 줄이나 알까요? 저 아이들 얼굴을, 눈을 못 쳐다보겠어요." 

'식민지풍 자갈길 도로'를 걷다가 친구가 말했다.

원주민, 빈민의 권리와 평화를 추구하는 사파티스타의 가치는 아직 이 땅에서 실현되지 않은 것 같았다. 한 가지 모습을 통해 그 사회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너무나 가난한 거리의 아이들과 원주민의 삶이, 사파티스타의 주장처럼 나아지지 않는한, '여행자의 천국'은 진정한 천국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캄보디아와 인도의 관광지에도 "1달러"를 되뇌며 작은 손을 내미는 거리의 아이들이 많았다. 지구별 어디를 가든, 가난한 땅에 있는 '여행자의 천국'이란 이런 슬픈 모습일 것이다. 

"유럽인, 미국인들은 온 세계로 여행을 많이 다니잖아. 나랑 내 친구처럼. 그런데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평생 단 한 번도 다른 나라로 여행을 할 수가 없어. 나는 이게 아주 불공평하다고 느껴. 그래서 슬퍼. 그 사람들도 여행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무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그게 내 꿈이야."
 
커다란 봇짐을 매고 산크리스토발 거리를 헤매는 원주민 아이.
 커다란 봇짐을 매고 산크리스토발 거리를 헤매는 원주민 아이.
ⓒ 유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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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 최저가 도미토리 숙소에서 만난 파란 눈의 프랑스인 피에르 Pierre가 말했다. 많은 여행자들이 거리의 아이들과 노점의 원주민들을 마주하며, 이런 불공평한 세상에 대해 슬픔을 느낄 것이다.

1492년 콜롬버스와 정복자들이 아메리카에 온 이후, 또다른 침략자들이 아프리카에 간 이후, 이 불공평한 세계의 구조는 21세기 지금까지도 큰 변화 없이 견고하다. 수십 년 동안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룬 남한 국민인 나는, 몇 년 동안 일하며 아껴 모은 돈으로 세계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 치아파스의 가난한 아이들은 몇 년을 일해도 세계 여행을 꿈꾸기 어려울 것이다.

세상은 정말로, 조금씩, 공평해지고 나아지고 있는 걸까. 짧은 마주침과 슬픔의 감정 이후에, '무언가' 변화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산크리스토발 광장의 원주민 시장.
 산크리스토발 광장의 원주민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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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모이, #세계여행, #멕시코여행, #사파티스타, #중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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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바다 미륵섬에서 유년기를, 지리산 골짜기 대안학교에서 청소년기를, 서울의 지옥고에서 청년기를 살았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82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여행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생활놀이장터 늘장,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섬마을영화제에서 일했다. 영화 <늘샘천축국뎐>, <지구별 방랑자>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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