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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간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소박하게나마 하고 싶은 일을 꾸려가며 사는 것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80년이 넘은 한옥과의 첫만남부터 고치고 수선하는 과정을 담아갈 이 연재는 앞으로 공간의 완성, 그 이후 공간에서 만들어갈 예정입니다. - 기자말

살던 집에 계약하신 분이 들어오는 날짜가 8월 16일로 잡혔다. 계약하려는 분들이 많으면 날짜를 우리 형편에 맞추겠지만, 정말 오래 기다렸다 만나게 된 분이라 그분 형편이 우선이었다. 그래도 우리 형편을 배려해주신 덕분에 시간을 꽤 벌 수 있었다. 

이사는 매우 피곤하고 복잡한 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살던 집에서 새 집으로 바로 이사를 하고 싶었다. 계약을 할 때만 해도 그때쯤이면 집이 완공될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한여름 타는 더위는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들어올 분들께 한없이 기다려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살던 집에서는 나가야 하고, 들어갈 집은 아직 공사가 덜 끝났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이러다가 길거리에 나앉겠다는 친구의 우스갯소리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임시 거처 구하기, 멘붕이 왔다
 
애초에 짐이 많다면 창고를 빌려 가져다 두는 것을 고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짐은 참, 여러모로 애매했다.
 애초에 짐이 많다면 창고를 빌려 가져다 두는 것을 고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짐은 참, 여러모로 애매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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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에서 한 달 정도 머물 임시 거처를 구해야 했다. 알아보니 나 같은 경우가 꽤 많았고, 주로 오피스텔 등을 단기임대로 구하거나, 에어비앤비를 골라 장기 투숙을 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짐이었다. 애초에 짐이 많다면 창고를 빌려 가져다 두는 것을 고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짐은 참, 여러모로 애매했다. 일단 큰 가구와 가전은 모두 처분을 해야 했다. 새로 들어갈 집에 맞게 가구 등을 새로 짜고, 가전제품도 새로 구입을 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정리할 것 정리하고, 처분할 것 처분하고 나니 남은 건 책과 옷, 그릇과 신발, 소형 가전제품 몇 개와 작은 가구 몇 개가 전부였다. 오피스텔이나 에어비앤비에 가져가기에는 짐이 너무 많고, 창고를 빌리기에는 너무 적으며, 게다가 창고에 짐을 두면 그걸 옮기는 비용이 따로 드는 것도 그렇고, 이사 날짜를 확정할 수 없는 것도 문제였다. 

다행 중 다행이란 이런 것이다. 마침 이전 세입자가 나가고, 다음 세입자와의 계약을 위해 비어둔 집과 인연이 닿았다. 오피스텔이나 에어비앤비가 아닌,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마당이 있다는 것에 솔깃했다. 창고 같은 걸 빌리는 대신 새로 이사할 집에 들고 갈 짐들을 모두 박스에 싸서 마당에 쌓아두면 된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기 때문이다. 

어차피 짐이라고 해봐야 책과 옷, 그릇 등이 대부분일 테고, 그 짐을 모두 박스에 싸놓고, 임시 거처가 될 집 마당에 나무 팔레트를 깔아놓은 뒤 짐박스를 쌓아두면 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맞다. 나는 정말 몰라도 뭘 너무 몰랐다.  

다음 수순은 이사 업체를 정하는 것이었다. 이게 또 간단치가 않았다. 표준에서 어긋난 삶이란 매우 피곤하다. 지금까지 몇 번의 이사를 해왔다. 당연히 포장이사였다.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이사할 때의 견적이란 피차 매우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는 달라도 무척 달랐다. 일단 고려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우선 이사를 두 번 해야 하는 것부터 설명이 복잡했다. 한 번은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골목길 안쪽에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 한꺼번에 짐을 싸서 옮기는 게 아니다. 책꽂이, 침대, 책상 등 큰 가구들은 사다리차로 내린 뒤 따로 처분할 곳으로 보낸다. 의자, 작은 가전, 수많은 박스 등은 이삿짐으로 가져가야 하니 짐을 분리하는 것부터가 복잡하다. 수많은 박스는 임시 거처에 그대로 쌓아둘 것과 사는 동안 실생활에 필요한 짐으로 또 나뉜다.

그렇게 임시 거처로 이사한 뒤에는 다시 골목 안쪽의 단독주택, 즉 내가 지은 한옥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 게다가 이 골목은 집 앞까지 차가 들어가지도 못한다. 또 날짜를 특정할 수도 없다. 공사 진척 상황에 따라 2주 후가 될지 3주 후가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특이사항으로 점철된 이사 조건이었다. 설명하는 나도 말이 길어지고, 듣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한 번에 알아듣기가 매우 곤란했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전에 비해 포장이사 비용이 엄청나게 오른 데다가 특이사항으로 점철된 조건으로 옵션이 계속 붙었다. 게다가 이사를 두 번 해야 하니 비용이 곱절이었다. 몇 군데 포장이사 업체의 견적을 받다가 과연 지금 이 상황에서 포장이사가 맞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 가구며 가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릇과 책, 옷 등을 박스에 담아 임시 거처에 쌓아두면, 다시 그 박스를 새 집에 가져다 놓는 일이었다. 새 집의 가구는 이삿짐센터에서 운반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과감하게 포장이사를 제외하고, 일반 이사업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필요에 의해 모든 것이 이미 갖춰져 있다는 걸 절감했다. 이런 이사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가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사=포장이사' 이렇게만 생각했던 내가 한심할 지경이었다. 그 중 몇 군데 견적을 받고, 드디어 결정을 했다. 

버릴 것인가, 가져갈 것인가... 끝나지 않는 신경전
 
해도해도 끝이 없는 박스 작업에 나중에는 쌓여 있는 책을 보며 머리 끝까지 화가 나기도 했다.
 해도해도 끝이 없는 박스 작업에 나중에는 쌓여 있는 책을 보며 머리 끝까지 화가 나기도 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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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짐 박스를 구하러 다니는 게 일이었다. 쌓아야 하는 짐이 도대체 몇 박스가 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우체국 택배 박스를 살까 했는데, 얼마나 될지 모르는 데다 쓰고 버릴 것에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편의점이나 마트 등에서 박스를 구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박스를 구하는 건 그러나 만만치가 않았다.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직원분께 양해를 구하고 카트 가득 박스를 차로 실어 날랐다. 그런데 이게 한도 끝도 없었다. 아무리 박스를 가져다 쌓아도 박스가 턱없이 부족했다.

밤이면 밤마다 남편과 둘이 택배회사 직원처럼 박스와 씨름을 했다. 처음에는 버려야 할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두고 이견을 보이기도 했으니, 차차 너무 지쳐 알아서 하라고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물건에도 팔자와 운명이 있나보다. 박스 작업 초반만 해도 아깝고 아쉬워서 못 버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후반에 접어들면서 너무 지쳐서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버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버리기도 했고, 마땅히 버려도 될 만한 것이 살아남기도 했다. 

가장 우리를 괴롭게 한 건 바로 책이었다. 해도해도 끝이 없는 박스 작업에 나중에는 쌓여 있는 책을 보며 머리 끝까지 화가 나기도 했다. 처음에는 요령이 없어 큰 박스에 책을 한가득 담아놓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운반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릇은 또 깨질 게 걱정이었다. 하나하나 에어캡으로 포장을 하는데 손가락 끝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릇을 싸다가 사놓은 에어캡이 떨어져 수건과 옷으로 둘둘 말아 싼 것도 많았다. 

그나마 옷은 가볍기도 하고 싸기도 쉬워서 수월했지만 버릴 것과 버리지 말 것을 두고 남편과의 신경전이 꽤나 피곤했다. 버리고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는 게 일이었다. 물건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사그라들었다. 꼭 필요한 것만 가져가기로 했다.

어차피 가지고 가봐야 넣어둘 곳도 없었다. 가족을 떠나 독립이라는 것을 한 지 어언 25년여. 그동안 끌고 다닌 온갖 묵은 살림을 이렇게 떠나보냈다. 추억과 애틋함이 어찌 없으랴. 이걸 어찌 버리나, 망설인 것도 많았다. 의미 없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추억과 애틋함은 잠시, '지난 3년 동안 쓴 적이 있는가 없는가'로만 판단하기로 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쌓이기 시작한 다이어리, 업무노트, 달력 등만 수십 권이었다. 눈 딱 감고 다 버렸다. 처음 독립하며 큰맘 먹고 사들인 그릇 세트도, 하나 둘 늘어나던 머그컵도, 아깝다고 남겨둔 이빠진 찻잔도 다 버렸다.   

끝도 없을 것 같던 박스 작업이 드디어 끝나니, 이사 전날이 되었다. 한여름 비지땀을 흘리며 쌓아둔 박스를 앞에 두고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파주출판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한 게 2002년 겨울이고, 2003년 봄부터 그곳이 생의 터전이었다. 서울에서 출퇴근하기가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던 터라 이 무렵 서울을 떠나 출판단지 가까이에 있던 신도시로 이사를 왔다. 그렇게 15년여를 살았던 동네를 떠나게 되었다. 

"이 도시에서 다시 살게 될 날이 있을까?"

나의 물음에 남편은 간단히 답했다. 

"아마도 없을 걸?"

아마도 그럴 것이다. 30대 중반부터 살아온 도시를 떠나기 전날,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다. 다음날 꼭두새벽, 이삿짐센터 사장님의 전화벨이 울렸다. 자, 떠날 시간이다. 나의 집으로 가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되었다.(https://blog.naver.com/hyehwa11-17)


태그:#작은한옥수선기, #혜화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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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드는 일을 오래 했다. 지금은 혜화동 인근 낡고 오래된 한옥을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어 그곳에서 책을 만들며 살고 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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