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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10.10 08:08수정 2018.10.19 11:45
몇 년 전,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가을 주말에 혜화역 근처에서 열린 '마르쉐@' 행사를 구경 간 적이 있다. 시장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마르쉐(marché)'에 장소 전치사 'at(@)'을 더해 어디서든 열릴 수 있는 '이동 시장'이라는 의미다. 

매월 두 번째 일요일은 혜화역, 네 번째 토요일은 성수에서 열린다. 그때 그때 수확하는, 혹은 지역 식재료로 만든 식품들이 마르쉐 시장에 나온다. 시간이 되는 주말에 가끔 나가서 구경했지만 그날은 목적을 갖고 나갔다. 

몇 해 전 '마르쉐@'에서 산 토종 쌀
 
토종 쌀 '북흑조'.

토종 쌀 '북흑조'. ⓒ 김진영

그날의 목적은 '토종 쌀'이었다. 예전에 녹미, 적미 등의 토종 쌀을 맛본 적이 있었다. 주로 백미에 넣어 먹는 잡곡으로 만났지, 오롯이 백미 상태로 맛본 적이 없었다.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4호선 혜화역을 나와 마로니에 공원으로 나가니 이미 장터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장터 한편에 토종 쌀이 전시돼 있었다. 나락 달린 벼와 그 쌀로 빚은 막걸리, 그리고 설명문을 붙어 있었다. 쌀을 구경하고 막걸리 맛을 보니 토종 쌀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졌다. 사실 막걸리보다는 밥맛을 보고 싶었다.

토종 쌀을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은데, '굳이 밥맛도 모르는 상황에서 막걸리보다는 살짝 간한 주먹밥을 만들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궁금증이 일었지만 소심한 마음에 행사 담당자에게 그 까닭을 묻지 못했다. 

많은 쌀 가운데 '버들벼'(이삭이 여물면 버드나무처럼 예쁘게 흩날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와 '대관도'(大關稻, 양반이나 왕가에서 주로 먹었다 알려진 고급 품종)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일전에 제주도 밭벼인 '산듸'로 밥을 한 경험이 있어서 충분히 불린 뒤 밥을 지었다. 현재 우리가 먹는 쌀은 대략 20~30분 정도 불린 다음 밥을 하지만, 산듸를 비롯한 토종 쌀은 한 시간 이상 불려야 밥맛이 제대로 난다. 

대관도로 밥을 지었다. 충분히 불렸음에도 지금 먹는 쌀과 식감이 다르다. 차진 밥맛이 부족하다. 다음날 버들벼는 불리는 시간을 더 길게 하고 밥을 지었지만 여전히 차진 식감이 요즘 먹는 쌀에 비해 부족했다. 다만 구수한 향이 부족한 찰진 맛을 채워줘 밥맛이 나쁘지는 않았다. 토종 쌀 두 봉지를 다 먹어도 쉽게 친해지지 못했다. 차진 밥맛에 길들여진 탓이다. 

몇 해가 지나 최근 방송 때문에 토종 쌀을 다시 만났다. SBS <폼나게 먹자>에 식재료 전문가인 '김재료'로 출연하면서 토종 쌀을 생산하는 우보농장의 이근이 생산자를 만났다.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몇 해 전 혜화역에서 열린 마르쉐의 토종 쌀 막걸리가 생각났다. 당시 궁금했던, 주먹밥이 아닌 왜 막걸리를 시음하게 했는지 물었다. 사람들에게 토종 쌀을 알리기에는 막걸리보다는 밥이 더 낫지 않느냐는 질문도 함께.

듣고보니 까닭이 있었다. 개량종 쌀이 이 땅에 주류를 차지하기 전에 한반도에는 약 1500종의 토종 쌀이 있었다고 한다. 십 리, 즉 4km만 지나도 동네마다 재배하는 쌀의 품종이 달랐다고 한다. 옛날 동네 어귀에는 지금의 편의점(약 3만5000개)보다 더 많은 수의 주막이 있었고, 그 주막에서는 각각 다른 쌀로 막걸리를 빚고, 밥을 지었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 주먹밥 대신 막걸리로 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왜 토종 쌀 막걸리로 내놨는지 이해가 됐다.

볶음밥과 덮밥에 어울리는 토종 쌀
 
차진 맛이 떨어지는 대관도 쌀로 밥을 짓고 볶음밥을 했다. 동남아의 볶음밥 맛은 아니더라도 지금 먹고 있는 개량 종보다 볶음밥 용으로 훌륭했다. 토종 쌀은 볶음밥도 좋지만, 덮밥에 더 잘 어울렸다.

차진 맛이 떨어지는 대관도 쌀로 밥을 짓고 볶음밥을 했다. 동남아의 볶음밥 맛은 아니더라도 지금 먹고 있는 개량 종보다 볶음밥 용으로 훌륭했다. 토종 쌀은 볶음밥도 좋지만, 덮밥에 더 잘 어울렸다. ⓒ 김진영

답사 겸 회의를 마치고 다시 쌀 두 봉지를 샀다. 몇 해 전과 똑같이 '버들벼'와 '대관도'를 샀다. 처음 먹고 난 후 토종 쌀을 조금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어느 날 출장 길에 기름에 절은 볶음밥을 먹으면서 한 가지 방법이 생각났다. 

'자포니카 벼'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곳 가운데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생산하고 먹는다. 차진 성질을 가진 자포니카 종은 맨밥으로 먹기에는 좋지만 볶음밥 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볶음밥 용으로는 자포니카보다는 찰기가 없는 인디카 종이 훨씬 낫다. 기후가 따듯한 지역, 동남아시아에서 먹는 볶음밥이 맛있는 이유가 볶음 기술도 있겠지만, 사실 쌀 영향이 크다.

차진 맛이 떨어지는 대관도 쌀로 밥을 짓고 볶음밥을 했다. 기름을 팬에 달구고 다진 마늘로 향을 냈다. 그리고 밥과 달걀을 함께 넣고 볶았다. 동남아의 볶음밥 맛은 아니더라도 지금 먹고 있는 개량 종보다 볶음밥 용으로 훌륭했다. 볶음밥도 좋지만, 덮밥에 더 잘 어울렸다. 요새 '핫' 하다는 거리마다 판매하는 리소토, 필래프, 파에야 등 유럽 음식용으로도 좋을 듯 싶었다. 일부 셰프들이 토종 쌀을 활용해 요리하는 것을 봐서는 수입 쌀 대체품으로도 괜찮을 것 같다. 

찬기가 묻어나는 가을 바람에 차를 몰고 경기도 고양시 우보농장을 다시 갔다. 가을 날, 우보농장의 전경은 황금들녘 대신 검, 적, 노, 청, 녹의 풍경이 펼쳐진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색이 섞여있는 논 주변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아파트가 뜬금없었지만 참으로 예쁜 풍경이었다. 

조생종 벼는 이미 수확을 했고, 중생종은 물을 빼놓은 상태였다. 만생종은 아직 논에 물이 있다. 중생종을 수확하기 전에 아이들과 구경 삼아, 나들이 가면 좋을 듯 싶다. 논이나 벼는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도 볼 수 있지만, 다양한 색이 있는 벼 익은 들녘은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을 날, 우보농장의 전경은 황금들녘 대신 검, 적, 노, 청, 녹의 풍경이 펼쳐진다.

가을 날, 우보농장의 전경은 황금들녘 대신 검, 적, 노, 청, 녹의 풍경이 펼쳐진다. ⓒ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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