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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로 유명한 E.H.곰브리치는 "미술이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는 일반 대중의 태도에 달려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갖느냐 아니냐, 이해심을 갖느냐에 따라 미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곰브리치에 따르면 미술은 어떤 경향이 유행되느냐에 따라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하고,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술뿐만 아니라 세상사가 대개 비슷하다. 

일반 대중이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을 때 뭔가를 내놓고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외톨이가 되기 쉽다. 수많은 페미니스트와 평화주의자, 환경론자들은 일반 대중이 관심 갖기 전에 외롭게 이슈를 들고 나섰던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는 시대를 앞서간 탓에 공격의 대상이 되고,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고 외면당했던 이들도 있었다. 미술에 있어서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랬고, 한국 문단에서는 마광수가 대표적이다. 

반면 당대에도 좋은 반응을 이끌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 큰 공감을 얻는다면 그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소설가이자 번역가, 신화학자였던 이윤기는 그런 면에서 운이 좋은 작가다. 탁월한 번역가로 이름 높은 이윤기는 페미니즘 성격이 짙은 <진홍글씨>와 같은 작품으로 시대를 앞서갔던 작가였다. 그는 생전에도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같은 상을 통해 인정받았고, 시대를 더할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작품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윤기 다시 읽기
 
이윤기 산문, 작가정신 출판
▲ 이윤기가 건너는 강 이윤기 산문, 작가정신 출판
ⓒ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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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작가정신이 고 이윤기(1947~2010) 작가의 8주기를 추모하며 '이윤기 다시 읽기'를 통해 내놓은 수필집 <이윤기가 건너는 강>은 그 중 대표적이다. 이 책은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약 6년간, 수필 전문 잡지에 연재했던 글들과 주요 일간지와 문예지에 쓴 글들을 모아 엮었으니, 벌써 사반세기 전에 쓴 글도 있는 셈이다.

너무 시대를 앞서가서 당시에는 수수께끼 같았던 말들을 살펴보면 그 혜안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윤기는 최근에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모양의 문제들을 이미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는 시대가 갈수록 사랑받는 수수께끼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먼저 각종 소셜미디어에서 최근 흔하게 접할 수 있는 AI(인공지능) 번역을 보면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움베르코 에코의 <장미의 이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A.J.크로닌의 <천국의 열쇠>,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등 250여 권에 이르는 다방면의 책들을 우리말로 옮겼던 번역가 이윤기는 AI 번역이 일상인 세상이 올 것을 예감했던 모양이다. 그는 그런 시대를 살더라도 '잘 익은 말을 찾아서' 우리말과 씨름하는 씨름꾼 같은 번역가는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봤다.
 
"번역 과정에서 일어나는 언어의 변화가 '단순한 물리적 변화'여서는 안 된다. 그런 번역은 컴퓨터도 해낸다. 문제는 '화학적 변화'다. 텍스트의 문장이 우리말로 변하게 하되 화학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 19쪽

화학적 변화가 가능한 번역을 위해 이윤기는 사전 속의 말을 펄펄 살아 있는 저잣거리의 말로 바꾸는 싸움, 우리말의 어구와 어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일을 끊임없이 했다. 더불어 전부터 우리가 써왔고,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을 찾아내는 노력도 멈추지 않았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푹 익은 우리말 찾기'였다. 가령, '부족한 지식은 위험한 것이다(A little learning in a dangerous thing)'라는 영국 속담을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우리 속담에 이르기까지 노력했다는 것이다. 

올해처럼 난민이라는 단어가 우리 일상에 가깝게 다가왔던 적은 없다. 지난여름 전쟁으로 고국을 떠난 500여 예멘인들이 제주도에서 난민 신청을 하자 시작된 청와대 난민거부 청원은 70만 이상이 찬성하며 '혐오'라는 민낯을 우리사회에 드러냈다. 난민뿐 아니라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민 등에 대한 혐오나 차별을 드러내는 이들은 다름과 틀림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 이윤기는 사반세기 전에 이미 '다름'과 '틀림'을 혼용하는 기이한 시대에 일침을 가했었다. 다문화시대에 다름과 틀림을 바로 쓰지 않는다면 우리사회는 큰 병을 앓고 있는 거라고 지적했던 셈이다. 
 
"'다르다'는 '같다'의 반대말, '틀리다'는 '옳다'의 반대말이다.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는 뜻인가? 나와 '같지 않은 녀석'은 '틀려먹은 녀석'이라는 것인가? 오늘부터라도 바로 쓰면 큰 병 하나 고치는 셈이 된다." - 68쪽

"나는 방 한 칸 내어놓을 용의가 있소"

지난 27일 서울시교육청이 중·고등학생 두발 자유화와 편안한 교복 공론화 추진을 발표하자, 찬반논란이 팽팽하게 갈리고 있다. 이날 조 교육감은 "이 제안에 대해 현장에서는 갑론을박, 찬반논쟁이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유독 '교복 입은 시민'을 반복 강조했다. 학생이면 학생이지, 왜 꼭 '교복 입은 시민'일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기본권 보장'을 말하면서도 학생은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여전히 군사부일체와 같은 이데올로기를 학생들에게 들이대는 어른들은 학생들에게 환영받긴 글렀다. 평생 말을 다듬고 살았던 이윤기는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학생 인권을 아무리 떠들어 봐야 변하는 게 없는 학교, "요즘 애들은 옛날 같지 않다"며 교권이 무너졌다고 걱정이 태산인 현실을 봤다면 이윤기는 이렇게 일갈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원래 예전 같지 않은 법이다. 예전과 똑같으면 그것은 아이들이 아니다. 예전과 똑같은 것은 어른들이지 아이들이 아니다." - 72쪽

이윤기는 학생들이 변해야 하는 게 아니라 어른들이 변해야 함을 벌써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교권은, 오로지 가르치는 분들이 그 가르치는 태도로써만 확립할 수 있다"고 의견을 피력했던 이유를 곱씹어봐야 할 때다. 

분단국가를 사는 작가에게 현실은 외면할 수 없는 천형이다. 이윤기는 툭하면 '퍼주기' 논란에 불을 지피며 상호주의를 부르짖는 보수주의자들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는 '남북문제가 다른 국제 문제와 다른 것은, 서로 헐뜯은 경험이 있는 형제 사이, 혹은 부부 사이와 비슷하다'고 봤다. 그래서 남북관계에서 상호주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언했다.

이윤기는 남북관계에서마저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는 작가였다. 이윤기가 자신의 친구 인하대 교수 차동의 박사의 말을 빌려 했던 말은 '방 한 칸 내놓지 않으면서 입에 거품을 무는 이들'에게 한 방 먹이고 있다. 
 
"당신, 방 한 칸 내놓을 용의 있어? 통일 문제, 그런 자세로 시작해야 풀려."… 차 교수, 나는 방 한 칸 내어놓을 용의가 있소. - 103쪽
 
이윤기는 직업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고백한 바 있다. 당대 최고 번역가라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잘 익은 말을 찾아서 사전을 훑었던 그였다. 야전 군인처럼 전방에서 글을 다듬기 위해 싸웠던 그의 흔적을 살펴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그가 글, 작품 속에 숨기고 간 수수께끼가 어디에 숨겨 있는지 찾다보면 이 시대에 필요한 지혜를 얻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윤기가 건너는 강 - 이윤기 산문

이윤기 지음, 작가정신(2018)


태그:#이윤기, #수수께끼, #AI 인공지능, #산문, #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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