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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 있는 '가요황제 남인수 동상'.
 진주에 있는 "가요황제 남인수 동상".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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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저녁 방영된 KBS-1TV의 <가요무대-진주공연>가 '친일 미화를 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는 4일 낸 성명을 통해 "개탄한다"고 밝혔다. 

<가요무대-진주공연>에서 진주 출신으로 대표적으로 소개된 대중음악가는 남인수(南仁樹, 1918∼1962), 손목인(孫牧人, 1913∼1999), 이재호(李在鎬, 1919∼1960)다.

이들의 구체적인 친일행적은 무엇이 있는가. 일부 사람들은 대중음악가들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하는 수 없이, 살기 위해, 이른바 '생계형 친일'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이들의 친일 행적은 너무나 뚜렷하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는 5일 <친일인명사전>이 기록된 이들의 친일행적을 거론하며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했다.

뚜렷한 친일행적... 민족문제연구소 "제대로 알아야"

남인수의 친일행적은 뚜렷하다. 그는 본명이 강문수(姜文秀)이고, 원래 최씨 집안에서 태어나 처음 이름도 최창수(崔昌洙)였는데 어머니가 강씨 집안으로 개가(改嫁)하면서 강문수로 호적에 올랐다.

남인수는 1935~1936년 사이 '시에론'레코드사를 직접 찾아가 테스트를 받고 선발되어 1936년 2월에 방송에 출연하면서 가수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인수가 녹음한 일제 군국가요로 현재 확인되는 것은 1942년 <강남(江南)의 나팔수>, <그대와 나>, <남쪽의 달밤>, <낭자일기(娘子日記)>, <병원선(病院船)>이 있고, 1943년에는 <이천오백만 감격>, <혈서지원(血書志願)> 등이 있다.

<그대와 나>는 1941년에 '조선군보도부'에서 내선일체와 지원병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영화(그대와 나, 君と僕, 감독 허영)의 주제가다. <이천오백만 감격>과 <혈서지원>은 '조선징병제 실시 축하 기념'으로 만들어져, 조선지원병 실시 기념음반에 수록되었다.

남인수는 1944년 9월 부민관에서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로 열린 <성난 아세아(怒りの亞細亞)>에 출연했다.

손목인은 본명이 손득렬(孫得烈)이고, 양상포(楊想浦)라는 예명으로 작곡하기도 했으며, 손안드레·임원(林園)이라는 예명으로 가수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가 작곡한 군국가요로 지금까지 확인되는 것은 1937년 <총후(銃後)의 기원(祈願)>, 1943년 <보내는 위문대(慰問袋)>, <참사랑>이다. 이 노래는 모두 콜럼비아레코드사 전속으로 있을 때 발표되었다.

손목인은 1943년 1월 부민관에서 제일악극대가 공연한 <아세아교향악>, 향토악극 <고향>, 방첩악극 <간첩은 아직 살아 있다> 등을 총지휘했다.

1944년 2월에는 매일신보사가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후원으로 조직한 '매신산업전사위문격려대' 대원이 된 그는 경기인천지역 군수공장을 돌며 공연했다.

이재호는 본명이 이삼동(李三同)이고, 무적인(霧笛人)과 남촌인(南村人)이라는 예명을 쓰기도 했다.

그가 작곡한 군국가요로 현재 확인되는 것은 1942년 <결전태평양(決戰太平洋)>, <일억 총진군>, <조국의 아들>이 있고, 1943년 <달 있는 모항(母港)>, <전선(戰線)의 달>, <천리전장(千里戰場)>이 있다. <조국의 아들>은 '지원병의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는 모교인 진주중학교에서 한때 음악교사를 하기도 했다. 1960년 7월 3일 사망한 그는 1996년 '문화훈장 보관장'이 추서되었다.

태그:#남인수, #손목인, #이재호,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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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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