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29 16:04최종 업데이트 18.09.29 16:04

매국노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변삼사'를 지키고자 국치를 통탄하면서, 그리고 국민의 궐기를 호소하면서 순국ㆍ순절자가 뒤를 이었다. 대표적인 몇 분을 골랐다.

이한응(1874~1905)은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진사시에 합격하여 한성부지사가 되고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전출했다. 1904년 주영공사의 귀국으로 서리공사에 임명되어 영국에서 활동하고,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체결되자 치욕과 망국의 한을 참을 길 없어 귀국하기를 단념하고 임지에서 음독 순국하였다. 이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민영환ㆍ조병세 등 분사자가 속출했다.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린 민영환의 모습. ⓒ 중학교 국사 교과서

 
민영환(1861~1905)은 문과에 급제하여 약관에 병조ㆍ형조판서를 역임하고 미국 공사 등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외부ㆍ학부ㆍ탁지부대신을 지내면서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으려고 분투하다가 독립당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대신 자리에서 쫓겨났다. 

시종무관장 재임 때 을사늑약 폐기를 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조병세(1827~1905)는 노론파의 명문에서 태어나 음관으로 참봉에 임명되었다가 증광병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암행어사ㆍ대사헌ㆍ공조판서ㆍ이조판서ㆍ우의정ㆍ좌의정 등 요직을 거쳤다. 동학혁명과 일제침략기에 정계를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하여 중추원의장과 임금의 고문인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1896년 폐정개혁 19조를 상소하고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을사5적 처단을 주창한데 이어 이상설 등과 을사늑약의 폐기를 상소했다. 왜경에 연행되어 가평 향리로 추방당하자 1905년 8월 음독자결했다. 

박승환(1869~1907)은 구한국군 참령으로 시위연대 제1대대장으로 있던 중, 1907년 7월 고종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퇴위당하자 복위운동을 펴기 위해 궁중에 돌입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해 8월 한국군 해산령이 내리자 이에 불복하여 자결했다. 이를 계기로 다수의 구한국군 출신들이 의병에 참여하면서 의병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준(1859~1907)은 이상설ㆍ이위종과 함께 고종의 밀서를 갖고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을사늑약의 불법ㆍ부당성을 호소하고자 했으나 일본과 열강의 반대로 무산되자 울분 끝에 순국했다. 함북 북청출신으로 법관양성소에서 공부하고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으나 조정 대신들의 비행을 파헤치다가 면직되었다.

일진회에 대항하여 공진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과 함께 을사5적을 규탄하다가 헤이그특사로 선정되었다. 사후 궐석재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홍범식(1871~1910)은 충북 괴산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전북 태인군수 재임시 의병을 보호하여 일본군의 검거망을 피하게 하였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선산에 올라가 목메어 자결했다. 남긴 유서 5통은 왜경에 압수돼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황현 선생과 '매천 야록' 전라도 광양에서 태어난 황현 선생은 한말 4대 시인으로 꼽히며, 젋은 시절 한양으로 올라와 과거를 보고 성균관 유생이 되기도 했으나 과거제도의 부패를 목격하고 낙향했다. 오른쪽 사진은 선생이 남긴 편년체 역사서 ‘매천 야록’ ⓒ 매천황현선생기념사업회

 
황현(1855~1910)은 전남 광양출신으로 생원시에 장원급제했으나 부패한 조정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향리에 묻혀 살았다.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순절했다. 재야에 있으면서 1864년부터 병탄 때까지 47년 간의 우리나라 최근세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매천야록>을 지었다.
   

정치인으로 살았던 나인영(좌)과 종교인으로 살았던 나철(우)은 두 인생을 살았던 동일인이다 ⓒ 서정일

 
나철(1863~1916)은 본명은 나인영으로 전남 승주출신으로 관직에 있으면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오기호 등과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매국노 암살을 시도하다가 적발되어 낙도에 유배되었다. 

풀려나서 1909년 1월 15일(음) 중광절에 단군교를 창시, 1년만에 교도수가 2만 명으로 늘었고, 교명을 대종교로 고쳤다. 1910년 한국병탄 후 울분을 품은 채 지내다가 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서 일제의 학정을 고발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삼일신고>ㆍ<신단실기>등의 저서가 있다. 

박재혁 의사를 비롯하여 항일투사들은 국치를 전후하여 순절한 선열들의 뜻을 이어 조국광복전쟁에 나섰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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