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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점에 다다른 과거지향적 명절문화
 

해마다 명절 전후엔 일상에서 어설프게나마 봉인되었던 남녀차별 문제가 주요 쟁점이 되어 무수한 보도와 콘텐츠들로 쏟아져 나오곤 한다. 작년 이맘때쯤 게재된 필자의 기사, '17년차 아줌마의 양성평등론, 명절문화를 중심으로' 또한 오랜 체증과 같던 명절증후군을 혼자서는 풀어가기가 어려운 나머지 사회적으로 풀어가 보고자 하는 바람에서 작성한 것이었다.

올해의 몇 건의 기사를 보면 적어도 우리 세대에는 바뀌지 않을 것만 같던 명절문화에도 빠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설거지 하는 아들의 뒷모습을 통해 본 어머니의 욕망, 합쳐진 명절 밥상, 뒤섞인 차례 상 앞 대열, 시어머니로 시작된 차례 보이콧 도미노......'

우리 사회는 역시 빠르다. 경제적 성장이 빨랐듯 정신문화의 혁신도 빠르다. 한때는 '나의 생각이 너무 빠른 속도로 앞서서 남녀차별에 대해 유별나게 과민한 불만을 품게 된 것인가?'를 짚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겠다. 내가 명절문화에 더 이상 따를 수 없는 그 지점이 바로 이 사회의 명절문화를 통한 남녀차별 문제가 곪을 대로 곪은 상태였다는 것을.

지극히 평범한 나 역시 그 즈음에 발 맞춰 십 수년간 머릿속에 그리면서도 선뜻 나서서 이행하지 못한 명절 지내기의 대안들을 글로 풀어내며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달랬던 것이다. 사실, 작년 추석을 포함하여 올 설까지 두 번의 명절에 시집도 친정도 방문하지 않았다. 아이들과 남편만 시집에 보내놓고 혼자 집에 남아 휴식을 취하기도 했고, 우리 가족끼리만 단출한 여행을 가기도 했다.

착한 딸이고 며느리였던 나의 부재는 두 집안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시집도 친정도 일찍이 남편을 잃은 홀어머니시니 명절에라도 잘 해야 하는 것은 맞는 일이지만 나는 두 어머니의 일방적인 인정과 기대가 더 이상은 버거웠다. 나의 욕구와 반대되는 행동을 할수록 칭찬하고 인정하며, 그 뒤로도 지속해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담되었던 것이다.

착한 며느리, 든든한 사위, 과연 누구의 욕망인가?

결혼을 하자마자 첫 아이를 임신하여 큰아들을 낳은 나는 일약 착하고 자랑스러운 외며느리가 되었다. 남 부럽지 않게 배웠고, 든든한 직장도 있고, 참한데다가(실은 참해야했던 데다가) 결혼 전 몇 년간 독립된 생활을 한 덕에 살림살이도 야무진 알찬 며느리였다. 아들을 둘이나 낳아 경상도 지방에서 부끄럽게도 딸을 둘이나 낳은 끝에 겨우 아들 하나를 얻은 어머니의 평생의 콤플렉스를 해소해준 며느리기도 했다. 어머니는 늘 친척들이나 친구들에게 나를 보이며 자랑하고 싶어 하셨다.

감사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마음 한 편엔 전리품이 된 듯 한 불편함도 적지 않았다. 어머니가 사랑한 나는 그 어떤 욕구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일만 하는 며느리였다. 그 모습은 어머니 스스로가 지닌 자화상이었다. 나는 결혼과 동시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머니의 분신이 된 것이다. 어머니의 인정과 기대는 잠시 맛보기엔 적잖이 달콤했기에 바로 뿌리치지 못했다. 더군다나 어머니와는 크게 다르게 생겨난 그대로의 나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어머니에겐 큰 불효였기에 강요나 협박보다 더한 올가미에 스스로를 꽤 오래 가둬 두었었다.

서로 다른 지역에 살면서 1년에 서너 번 만나는 신혼 때까지는 그럭저럭 연기가 가능했다. 그러나 둘째 아이 출산이후 5년 동안 한 집에 살면서 매일매일 연기를 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특히, 왕성한 식욕을 감추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어머니 입장에서 볼 때 맛있고 귀한 것을 덥석덥석 집어 먹는 나의 이기적인 행동은 엄마답지도 아내답지도 못한 비행 중 최고의 비행이었을 것이다. 나름 꽤 오래도록 지속 하다가 식욕 억제에 실패하면서 들통 나고만 나의 정체성은 평화로웠던 고부관계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일상에 만연한 남녀차별 문화를 두 아들이 그대로 보고 배운다는 점이었다.

지속된 스트레스로 나의 건강이 위기에 처할 지경이 되자 어머니와의 살림을 분리하여 따로 살게 되었다. 다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게 되었지만 그간에 쌓인 갈등의 찌꺼기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명절과 제사를 다 합쳐봐야 365일 중 단 며칠에 불과하지만 명절이나 제사를 통해 여전히 알찬 며느리인지 평가 받는 듯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 체증의 씨앗이 되어 몸과 마음을 힘들게 했다. 특히, 몇 년 전부터 여행이나 외식을 제안하며 좀 다르게 명절을 지내보려는 시도를 해보았지만 집안에서 거하게 음식을 차려놓고 끝없이 먹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어르신들의 관성은 쉽게 제어되지 않았다.

착한 딸과 사위의 전리품 노릇도 쉽지 않았다. 배우지 못한 설움과 가난의 압박 속에서 힘겨운 홀어머니로 살아온 친정엄마는 반듯하게 자라 평범하게 살아주는 자식들을 친척들과 이웃에게 보이는 맛에 사시는 것 같았다. 명절이 아니어도 의논 없이 모임을 계획하여 음식을 장만해 놓고 얼른 오라고 독촉 전화를 하는 것은 자식들과 그 배우자들 모두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엄마의 대표적인 위력 중 하나였다.

시어머니에 비해 과감하게 자신의 욕구표현을 하는 친정엄마는 자신의 욕구를 일절 드러내지 않는 시어머니에게 익숙한 남편에게 핵폭탄 같은 문화충격이었다. '어찌 어머니란 존재가 저럴 수 있는가?' 도무지 믿기지 않고 익숙해지지 않는 것인 듯 했다. 남편의 연기력은 나에 비해 좀 서툴러서 든든한 사위 노릇이 좀 간당간당 했지만 그럭저럭 들통 내지 않고 몇 년간은 지속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유보된 감정의 찌꺼기들은 끝내 고름이 되어 터져 나왔다. 그래서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나 괴롭고 불편해졌다.

남편도 나도 친정엄마와 시어머니에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감추고 상대가 지닌 기대에 부응하려한 것은 두 분 모두 일찍이 혼자되어 다자녀를 홀로 양육해 오신 안쓰러운 홀어머니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고생된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다소 연기력을 발휘해야 한다면 못할게 또 뭐있겠냐는 갸륵한 마음 때문이었지 싶다. 그러나 연기는 연기일 뿐, 진짜 며느리와 사위를 만나지 못한 공전의 시간만 계속 되었다. 실존하는 며느리와 사위를 안겨드리지 못한 헛헛한 시간의 부작용은 관계의 끈끈함을 해쳤고 극심한 트라우마를 남겨왔던 것이다.

갈등이 표면에 드러난 뒤로는 자식 내외가 함께 방문하지 않으면 온갖 부정적인 상상을 하며 '얘들이 잘 못 살고 있는 건 아닌가?', 또는 '어른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가?'하는 등의 오해를 하실 듯 했다. 그래서 불편한 감정을 누르며 양가를 방문할 때마다 한 동안 부부관계는 화기에 노출된 화약고 마냥 아슬아슬했다. 심지어는 명절이 다가오면 마치 꾀병처럼 온몸이 아파오기도 했다. 이런 저런 여러 가지 대안을 만들어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칠순이 넘으신 두 어머니들의 관습의 고리를 끊고 대안 명절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또 다른 대안을 찾아서

그래서 작년 추석, 나는 결단을 내렸다. 가지 않고 혼자 집에서 버틴 것이다. 해오던 것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홀로 집에 머무는 3일여의 시간이 학교에 가지 않고 동네 어귀를 맴도는 어설픈 부적응아 같았다. 그래서 그 날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등록하여 가슴 속에 쌓인 독소를 글로 뿜어내며 마지막 날을 견뎌냈던 것이었다. 단 한 번의 부재는 일시적 일탈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 설 명절도 우리 가족만 단출하게 떠나는 여행으로 방문을 건너뛰었다. 남편과 나는 설이라는 사실을 서로 모른 척 함구하며 현실 도피성 여행을 즐겼다. 갈등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고 또 다시 애써 봉인한 것이다.

그러나 명절에 원가족과의 반가운 만남을 매번 생략하는 건 스스로도 서운했다. 부모, 형제, 조카들과의 훈훈한 만남이 왜 싫기만 하겠는가? 문제는 우리 부부와 양가 부모 간 대립되는 욕구의 충돌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욕구 충돌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친정도 시집도 명절만큼은 현재의 변화된 부모관계 보다는 과거의 관계를 다시금 추억하는 날로 여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시어머니는 어린 시절의 아들을 돌보듯 그저 먹고 마시며 편안히 쉬고 노는 과거의 아들을 추억하고 싶은 듯 했다. 그래서 며느리 혼자 일하게 되더라도 아들은 다른 가족들과 쉬거나 노는걸 보고 싶어 했던 것이다. 친정어머니도 그랬다. 자식들이 어렸을 때는 극한 생활고로 잘 챙겨주지 못했던 한이 남아 뒤늦게라도 좋아하는 음식을 잔뜩 준비해놓고 오매불망 기다렸던 것이다.

두 부모님들 모두 이미 출가한 자식들이 사돈 집 보다는 내 집에 오래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자기 스스로의 삶 보다는 엄마로 살아왔던 힘겨운 시절,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장 사는 거 같았던 내 젊은 날의 추억을 자녀와 함께 오래도록 추억하고 싶었던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또 다른 대안을 마련해 보고 싶었다.

명절이 다가오자 어김없이 우리 부부의 마음은 불편해졌다. 평소 대화에 더 적극적인 내가 명절에 대한 화두를 던졌지만 남편은 때마다 안절부절 자리를 뜨고 싶어 했다. 그래서 사실상은 나의 일방적인 결정과 통보에 가깝게 명절 전날, 각자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뵙자고 제안했다. 매사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남편은 단 번에 좋다고 찬성했다. 어쩌면 나보다 더 오래전부터 이런 명절 행사를 바라 왔는지도 모른다. 남편은 기질 상 모든 문제를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풀어갈 때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어쩌면 양가 어머니의 욕망을 지레 알아차리고 어설픈 연기를 제안했던 건 오히려 주로 내 쪽 이었던 것이다.

명절 하루 전에 가니 남동생 내외와 언니를 만나 국내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가 친정엄마와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언니네 시집은 명절 당일에 모여 함께 성묘를 가는 것으로 차례를 지내기에 가능했고, 혼자 데리고 다니기에 너무 어린 연년생 영유아 자녀를 둔 남동생 내외는 각자의 길을 가기 어려웠던 데다가, 올케의 친정 사정상 명절 저녁에나 부모님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나의 두 아들은 첫 날과 둘째 날 중 원하는 대로 선택해 보라고 했더니 명절 이틀 전에 친할머니 댁에서 하루 자고 명절 전날 밤은 외할머니 댁에서 보내며 하루를 자겠다고 의사를 표했다. 친정 집에 가기전에 형제지간에 먹을 음식을 나누어 맡아 가지고 갔다.

엄마는 간단한 밑반찬만 준비하셨다. 설거지나 잔심부름을 올케한테 시키지 않도록 감시하기도 했다. 올케가 자발적으로 심부름에 나설 때 마다 남동생이 먼저 일어나려고 노력하는 게 보였다. 남녀차별에 반대하는 누나가 또 발길을 끊을까봐 애써 노력하는 모습이 고마웠다. 여긴 엄마 집이고 올케 보다는 엄마의 친자녀들이 먼저 돕는게 맞다는 나의 주장을 받아들여준 것이다.

한편, 외아들인 남편은 어머니와 단둘이 명절 전야를 보내고 명절 당일에 조촐한 차례를 지냈다. 남편의 누나들은 각자의 시집 사정이나 직장일 때문에 이번 추석엔 한 자리에서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몇 주 전에 따로 모임을 가졌었다. 늘 한결같이 해맑은 막내아들의 엄마 이고픈 어머니에게도 아들과 단둘이 있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혹시 나빴더라도 앞으로의 인생에서 몇 번 안되는 기회니 만큼 나름의 의미를 찾아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명절 당일이 되자 부부가 함께 지척에 있는 양가를 번갈아 찾아 반나절씩 다과나 식사를 하며 보내고 돌아왔다. 두 번이나 패싱한 딸 혹은 며느리의 부재 덕에 본인들의 기대에 완벽하게 맞춰지지 않은 명절 방문임에도 불구하고 두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셨다. 처음으로 내가 두 분의 전리품이 아닌 나 그대로의 존재 자체로 아낌 받는 느낌을 받았다.

그간의 수많은 시도가 있어왔지만, 결혼 18년 만에 처음으로 부부지간에 냉전 없는 명절을 보내게 되었다. 무척 평화로웠다. 어르신들 입장에서 보면 극단적인 방법을 쓴 것이 못내 죄송했다. 하지만 이렇게 찾은 부부지간의 탄탄한 관계는 앞으로 그 어떤 형태의 새로운 명절 문화 창조에도 힘을 낼 수 있는 기본기가 될 것이다. 더 많은 실험과 도전이 있을지라도 가장 근본적인 관계인 우리 두 부부의 관계가 건강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면 결코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이제야 우리는 비현실적인 통일의 압박에서 벗어나 서로의 다른 특성을 그대로 보듬어 안아줄 수 있는 진짜 가족이 되어 가는 것이다.

미움 받을 용기와 관계의 성장

결국 잠시 미움 받을 용기를 내었던 나의 결단이 진정한 나를 상대와 연결시켜주는 바람직한 관계로의 성장을 이끌어 내었다.

누군가가 그려놓은 자화상에 맞춰 연기하는 나는 궁극적으로 귀한 존재가 될 수 없다. 드라마 속 인물이란 아무리 매력적이어도 드라마가 방영될 때만 존재하는 허상일 뿐인 것이다. 그 매력적인 허상을 깨는 것이 두렵더라도 처음부터 잘근잘근 깨 나가는 것이 더 빨리 건강한 관계로 발전시키는 길이었음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여전히 추석 명절의 용기 있는 각종 보이콧 소식이 반갑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보이콧 이전에 서로의 프레임이 정한 나로 연기하는 기간을 생략한 채 있는 그대로의 나로 바로바로 커밍아웃 하기를 바란다. 어찌 보면 허다한 양성 불평등에 대한 논란의 적지 않은 부분은 타인이 정한 각자의 프레임에 스스로 갇힌 개인들의 자존감 결핍의 문제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차별과 혐오는 나로부터
 

나는 나다. 상대가 만나야할 대상은 바로 나, 있는 그대로의 나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스스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순간, 있는 그대로의 그를 수용하고 인정할 수 있다.

특히, 타의 눈을 크게 의식하는 우리 문화의 특성상 사회가 정한, 조직이 정한, 관습이 정한, 부모가 정한, 배우자가 정한 프레임 속에서 꾸역꾸역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 사회의 극히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자신의 욕구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일수록 조직과 관계에서 환영 받아왔다.

이러한 우리네 근성이 복잡한 현대사회로 들어서면서 서구의 개인주의 문화와 혼재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든든한 끈끈함 보다는 성가시게 끈적끈적한 후진적 요소로 퇴색되어 버렸다. 그 성가시고 끈적끈적해진 유통기한 지난 전체주의의 잔해를 거두어 내고 개인의 특성이 살아있는 더 힘 있고 탄력 있는 끈끈한 전체주의로 성장해 나가야할 중요한 전환점이 다가온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온갖 차별을 거부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무르익었다. 그 어떤 논리도 차별을 지속해 나갈 근거가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허다한 관습의 강요로부터 나 자신을 구출해 내어 과감히 슥슥 걸어 나와야한다. 극단적인 보이콧이 일어나기 전에 나 다운 나를 부정하게 만드는 온갖 관습과 프레임을 거부하고 표준화가 쉽지 않은 나라는 한 인간을 세상에 드러내며 당당히 소개해야 한다.

나 스스로의 별남을 인정하지 못하는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지금의 만연한 차별과 혐오 문화를 양산해 온 것에 작지 않은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나 한 사람'을 먼저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 나 한 사람의 해방을 시작으로 우리는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새 세상을 향해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강압적으로 통일된 전체가 아닌 개별성이 공존하는 전체가 되어 더 위대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태그:#명절문화, #성차별, #혐오, #전체주의, #17년차 아줌마의 양성평등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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