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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 기자말

'동작 민주올레' – <대방길> 4회

▶ 코스안내 : ①서울영화초 - ②영등포고 - ③유일한기념관 - ④실미도 사건의 현장 - ⑤캠프 그레이 미군기지 터(미군 502군사정보단) - ⑥서울시립부녀보호소 터 - ⑦공군기념탑 - ⑧숭의여중고 - ⑨성남고 - ⑩서울공고

[기사 수정 : 2020년 2월 10일 오후 5시 50분]

이제 서울시립 부녀보호소 터(서울여성플라자)를 뒤로 하고 '공군 기념탑'으로 가기 위해서는 대방공원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대방공원으로 향하는 서울여성플라자 뒷길의 이름이 특이하고 낯설다. 알마타길.

알마타는 카사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의 러시아식 표현이다. 그런데 왜 난데없이 대방동에 알마타길이 있는 걸까? 그동안 동작주민들은 동작구와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타와 교류한 것을 기념해 도로명을 알마타길로 정했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작구청은 지난 2010년 "몽고 울란바토르시와 1997년 1월 27일 자매결연을 기념하기 위해 부여"했다는 뜻밖의 답변을 했다. "카자흐스탄 알마타와 자매결연을 맺은 사실은 아예 없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동작구청이 몽골 울란바토르시 바얀주르흐구와 자매결연을 맺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알마타라는 지명은 몽골 울란바토르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알마타길'은 동작구청의 실수로 탄생한 정체불명의 도로명인 셈이다. 적절한 도로명인지에 대해 재검토가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대방동 주변은 지금도 군부대 시설이 남아있고, 군인 아파트도 있다. 6.25 한국전쟁 이후 공군본부와 해군본부가 자리 잡다보니 군인들도 많이 살았고, 그중에는 한국 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도 여럿 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당시 한강을 제일 먼저 건넌 공수특전단(단장 박치옥)의 대대장이었던 김제민 중령, 1973년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주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했으니 이제 형님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가 쿠데타 모의 혐의로 군복을 벗고 감옥에 가는 '윤필용 설화 사건'의 윤필용(당시 수도경비사령관), 박정희 유신독재의 몰락을 알리는 총성을 울린 '10.26 사건' 당시 박흥주(비서실장)와 더불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박선호(의전과장)도 대방동에 살았다. 군인들이 주도하던 시절 대방동은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동작구청은 잘못된 푯말을 계속 방치하고 있는 걸까?

공원 입구에 도착하니 동작구청이 설치한 안내판이 우리를 맞이한다. 대방동을 소개하는 안내판이다. 동작구청은 '충효길'을 따라 이런 안내판을 여럿 설치해 놓았다. 동작구청은 동작구의 둘레길을 '충효길'이라고 부르는데,  이름부터 구태의연하고 시대에 뒤쳐진 느낌을 준다.   

그런데 설명을 자세히 보니 "일제 때 번대방리라 일컫다가 광복후 대방동으로 부르게 되었다"라고 돼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번대방이라는 명칭은 이미 정조의 화성행차 때에도 확인된다. 조선후기 내내 번대방리로 불리다 1936년 이곳이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행정구역상 번대방정으로 바뀌었고, 해방 이후 대방동이 됐다.

동작구청이 동작구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여러 차례 관련 자료까지 제공하면서 바꿀 것을 요청했음에도 동작구청은 "전문가를 통한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라면서 잘못된 내용을 몇 년째 방치하고 있다. 동작구청이 '충효길'을 따라 설치한 이런 안내판 중 잘못된 부분은 이것 말고도 여럿 더 있다. 
  
동작구청은 '충효길'을 따라 이런 푯말을 여러개 설치해 놓았는데, 여기 말고도 잘못된 내용을 담은 푯말이 여럿 있다.
▲ 동작구청이 설치한 대방동 이야기 푯말 동작구청은 "충효길"을 따라 이런 푯말을 여러개 설치해 놓았는데, 여기 말고도 잘못된 내용을 담은 푯말이 여럿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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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한국 공군의 탄생 과정을 보여주는 '공군 기념탑'
  
대방동에 공군본부가 있었던 사실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 공군 기념탑 대방동에 공군본부가 있었던 사실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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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공원 정상에 오르면 '공군 기념탑'이 있다. 이 일대는 과거 33년 간(1956~1989년) 공군본부가 있던 곳인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공군 기념탑'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공군본부는 1989년(7월 18일) 충남 계룡시의 계룡대로 이전했다.

대한민국 공군의 뿌리를 찾아서

대한민국 공군은 육군과 해군보다 늦은 1949년 10월 1일 창군된다. 이때부터 육·해·공 3군 체제가 성립되는데, 이를 기념해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삼았다. 일부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38선을 처음 돌파한 날인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삼았다고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국군의 날을 처음 정한 1956년 당시까지도 38선을 처음 돌파한 날로 3사단 사령부가 38선을 넘은 10월 2일을 중시했다(<국군의 날은 '현대식 3군 체제' 완성된 날>, <국방일보>, 2017. 9. 10).

현재 공군은 자신의 역사를 1919년 3.1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논의된 비행대 편성 기획과 그에 따라 1920년 미국 윌로우스 비행학교 안에 설립·운영한 한인 비행학교에서 그 뿌리를 찾고 있다. 이때부터 공군이 정식으로 창설된 1949년 10월 1일 직전까지를 공군의 태동기로 설명하고 있음은 대한민국 공군 홈페이지(www.airforce.mil.kr)와 공군박물관(충북 청주시)의 공군 역사관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1995년에 세워진 '공군 기념탑'에서는 비록 6월 민주항쟁 이후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가 한참 진행 중이던 상황이었음에도 공군의 역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부터 찾으려는 새로운 시도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기념탑에 부착돼 있는 설립 취지 동판에는 1949년 10월 1일 이후의 역사만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친일파 김정렬(초대 참모총장) vs. 독립운동가 최용덕(2대 참모총장)

'공군 기념탑'에는 역대 공군참모총장 명단이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국 공군의 성립과정과 그 면모를 알 수 있다.
 
동판에는 1대 참모총장 김정렬, 2대 참모총장 최용덕 등의 이름과 재임 기간이 새겨져 있다.
▲ "공군 기념탑"에 새겨진 역대 공군참모총장 동판에는 1대 참모총장 김정렬, 2대 참모총장 최용덕 등의 이름과 재임 기간이 새겨져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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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공군참모총장 김정렬(1917~1992)은 일제 강점기 일본육군사관학교 항공과(1941)와 아케노 비행학교 갑종과를 졸업(1943)하고 일본군의 비행중대장과 비행전대장으로 일본군 비행기부대를 이끌고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인물이다. 김정렬은 3대 공군참모총장도 지냈다. 5대 참모총장 김창규(1920~ ) 역시 일본육사 항공과를 졸업(1942)한 일본군 대위 출신으로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을 상대로 '맹활약'한 인물이다.

반면, 2대 참모총장 최용덕(1898~1969)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출신이며, 6대 참모총장 김신(1922~2016)은 백범 김구의 둘째 아들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특히 최용덕은 한국청년독립단(1919)과 의열단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중국혁명군 항공부대 장교를 거쳐 한국광복군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1943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 공군창설을 건의하고 공군 창설을 추진한 인물이기도 하다. 1946년 7월에 귀국해 난립해 있던 항공 관련 단체의 통합을 주도한 인물도 최용덕이었다. 최용덕은 '한국항공건설협회'를 창립(1946. 8)하여 초대 회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초대 공군사령관에 한국광복군 출신의 최용덕이 아니라 일본군 출신의 김정렬이 임명된 것은 해방 이후 한국군 창설 과정이 일본군과 만주군 중심으로 추진된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4대 참모총장 윤자중, '80년 민주화의 봄'이 "월남과 흡사"하다고? 

역대 공군참모총장 중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하는 인물이 더 있다. 바로 14대 참모총장 윤자중(1929~2017)이다.

윤자중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참모총장이었다. 그는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의 정치개입을 결정한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군이 적극적으로 나가서 고쳐야 할 때입니다, 월남과 흡사하며 초기단계입니다, 월남은 학생들이 공산당이었습니다"라고 발언해 '80년 민주화의 봄' 상황을 왜곡하고 전두환을 적극 지지한 인물이다.
 
윤자중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다.
▲ 윤자중 14대 공군참모총장 윤자중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다.
ⓒ 대한민국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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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한 언론에, 윤자중이 1980년 5월 21일경 수원 비행장 비행사들에게 "공대지 무장을 장착하고 출격 대기를 지시"했다는 증언이 당시 공군 장교의 입을 통해 나와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는 새로 출범할 '5·18 진상조사특위'에서 밝혀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동작 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뿌리 '시흥농민봉기'
시흥농민봉기는 1898년과 1904년 두 차례에 걸쳐 경기도 시흥군에서 발생한 농민봉기를 말한다. 1898년의 1차 봉기는 전임군수 문봉오의 가렴주구와 향리들의 비리에 맞서 일어났고, 1904년의 2차 봉기는 일본의 병참 기지와 경부철도 건설을 위한 역부 강제 모집에 대응하여 역부 모집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이의 중지를 요구하면서 일어났다.
 
남면 집강 성우경 등이 주도하고 시흥군 6개면 42개 동리 전반이 봉기에 참여한 농민봉기에는 당시 경기도 시흥군 하북면에 속해 있던 번대방리 사람들도 함께 한다. 번대방리 사람들은 집강 김회상을 중심으로 봉기에 참여했다.

시흥농민봉기에는 동작구의 다른 지역 사람들도 참여한다. 시흥군 동면에 속해 있던 상도리와 성도화리(지금의 상도동) 사람들, 시흥군 하북면에 속해 있던 고사리(대방동), 우와피리(신대방동) 사람들이 그들이다. 성도화리 집강 신동희, 상도리 두민(頭民, 우두머리 백성) 강희, 번대방리의 집강 김회상, 우와피리 집강 이용 등은 봉기의 주모자 중 하나였다.
 
두 차례의 시흥농민봉기는 각 면과 리의 집강이 주모자가 되어 사발통문으로 향회(민회)를 개최하여 주민의견을 수렴하는 형식을 빌려 각각 수천 명의 참여를 조직했다는 점, 제2차 시흥농민봉기의 경우 일제의 침략에 맞선 시흥 군민의 항일 의식이 강하게 표출된 사건이라는 점, 역부 모집의 부당성을 언론(황성신문)을 통해 대외에 알리고자 하였다는 점 등에서 근대적인 농민 의식의 성장을 엿볼 수 있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동작 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전통은 시흥농민봉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동작 민주올레]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역사 탐방 ⑤ 기사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씨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입니다.


태그:#동작 민주올레, #시흥농민봉기, #대방동, #대방길, #공군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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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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