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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무늬토기1(양양 오산리, 27cm), 덧무늬토기2(양양 오산리, 26.1cm), 백자 철화포도문호(국보 제107호. 18세기 초. 높이 53.8cm. 입 지름 19.4cm. 밑 지름 19.1cm)
 덧무늬토기1(양양 오산리, 27cm), 덧무늬토기2(양양 오산리, 26.1cm), 백자 철화포도문호(국보 제107호. 18세기 초. 높이 53.8cm. 입 지름 19.4cm. 밑 지름 19.1cm)
ⓒ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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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현대적인 디자인

양양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그릇 가운데 눈에 띄는 항아리 두 점이 있다. 나는 두 항아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항아리 모양과 같은 그릇은 다른 신석기 유적에서는 볼 수 없고, 삼국·통일신라·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에 와서야 비로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세계 신석기시대 그릇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그 기본 모양은 조선 항아리와 같다. 7200년이 지나서야 볼 수 있는 그릇을 신석기시대 오산리에서 빚은 것이다. 더구나 위 사진에서 덧무늬토기1 그릇 무늬는 오늘날 디자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현대적이다.

위 세 항아리 모양은 여성의 몸을 닮았다. 특히 세 번째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국보 제107호)는 여성의 배꼽부터 시작해 골반과 다리까지, 그것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내가 '남성의 눈'으로 그릇을 보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릇은 여성, 여신(女神), 비구름·비·물(만물생성의 기원), 만병(滿甁 찰만·항아리병, 마찬가지로 만물생성의 기원), 어머니, 들판 같은 상징성을 기본 베이스로 한다.

신석기시대 그릇을 빚었던 장인이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릇이 지금의 냉장고처럼 생활필수품이었던 만큼 편리성이 아주 중요한데, 그 편리성의 발전 속도가 아주 더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릇에 손잡이를 다는 것이나 물그릇에 귀때나 부리를 붙이는 것, 이런 것이 수백에서 수천 년에 걸쳐 이루어진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그릇을 빚었던 장인은 그릇을 늘 쓰는 여자였다기보다는 바깥일을 주로 했던 남자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두산백과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엽맥(葉脈 잎엽·맥맥)’ ‘나뭇잎 모양’이라 나와 있다. 위 사진에서 가장 오른쪽 평양시 남경유적에서 나온 민무늬토기 그릇 밑바닥은 나뭇잎 모양이라 할 수 있다. 그에 견주어 오산리 덧무늬토기 바닥은 나뭇잎이 아니라 ‘나뭇가지’ 모양이다. 이것은 그릇 임자를 표시한 것이다. 이렇게 무늬를 잘못 읽는 것은 유물을 자세히 보지 않고 지식이나 관념에 기대어 보기 때문이다.
▲ 오산리 덧무늬토기 밑바닥 무늬 두산백과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엽맥(葉脈 잎엽·맥맥)’ ‘나뭇잎 모양’이라 나와 있다. 위 사진에서 가장 오른쪽 평양시 남경유적에서 나온 민무늬토기 그릇 밑바닥은 나뭇잎 모양이라 할 수 있다. 그에 견주어 오산리 덧무늬토기 바닥은 나뭇잎이 아니라 ‘나뭇가지’ 모양이다. 이것은 그릇 임자를 표시한 것이다. 이렇게 무늬를 잘못 읽는 것은 유물을 자세히 보지 않고 지식이나 관념에 기대어 보기 때문이다.
ⓒ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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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성보다는 디자인을 고집한 조선 사기장

조선시대 사기장도 여자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다 남자들이었다. 조선 이전 삼국, 신라, 고려시대에도 그릇 빚는 장인은 대개 남자였을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들이 구워 냈던 그릇을 보면 여성적인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그릇을 쓰는 여자의 처지에서, 그 '편리성'을 기준으로 놓고 조선시대 백자철화 포도무늬 항아리를 보면 한마디로 불편하고 위태위태하다. 높이가 53.8cm나 되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큰 항아리다. 그런데 바닥 밑 지름은 고작 19.1cm밖에 안 된다(남자의 손 손목 관절까지 길이가 보통 20cm 안팎이다). 살짝 건드리기라도 하면 바로 넘어질 것 같은, 그런 불안한 디자인이다.

그렇다면 사기장은 이것을 몰랐을까. 사기장도 그런 것쯤은 충분히 알았다. 하지만 밑굽을 넓게, 안정적으로 하면 예쁘지 않다는 것, 여자의 몸매에서 벗어난다는 것, 이것이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오산리 덧무늬토기보다는 굽을 좀 더 넓게 했고, 골반과 엉덩이는 더 크게, 또 허리를 잘록하게 했다. 아래 두 그릇을 견주어 보면 이것을 바로 느낄 수 있다. 왼쪽 그릇 백자 철화매죽문 항아리는 굽이 넓어 안정감이 있지만 오른쪽 그릇에 견주면 경쾌하지 않고 답답하다.
 
조선 16세기 높이 41.3cm. 국보 제166호. 철화백자란 철분이 많이 들어 있는 밤빛 흙을 이겨 무늬를 그리고 유약을 둘러 구운 백자를 말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왼쪽 그릇 밑굽 무늬를 ‘파도무늬’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것은 파도가 아니라 우리나라 신석기 때부터 그릇에 그린 타원형 비구름이다. 비구름에서 이 세상 만물이 태어난다는 우운화생(雨雲化生)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 백자 철화매죽문 항아리(왼쪽)와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조선 16세기 높이 41.3cm. 국보 제166호. 철화백자란 철분이 많이 들어 있는 밤빛 흙을 이겨 무늬를 그리고 유약을 둘러 구운 백자를 말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왼쪽 그릇 밑굽 무늬를 ‘파도무늬’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것은 파도가 아니라 우리나라 신석기 때부터 그릇에 그린 타원형 비구름이다. 비구름에서 이 세상 만물이 태어난다는 우운화생(雨雲化生)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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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인이 덧무늬를 새기는 방법

토기는 크게 그릇 겉면에 빗살무늬를 긋거나 찍어 갖가지 무늬를 새겨 넣은 빗살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이전 신석기 전기에 썼던 덧무늬토기,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대표 그릇 민무늬토기가 있다.

덧무늬토기는 무늬가 그릇 겉면에 약간 돋아 있어 '융기문(隆起文)토기'라고도 한다. 이 토기는 그릇 겉면에 진흙 띠를 덧붙이거나 그릇 겉면을 엄지와 검지로 맞집어 도드라지게 하여 무늬를 낸 그릇으로, 중·후기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신석기를 대표하는 그릇이다.

강원도 양양 오산리에서 나온 항아리 두 점 또한 덧무늬토기다. 그런데 무늬를 넣은 방법이 서로 다르다. '덧무늬토기2'는 가는 진흙 띠를 붙여 무늬를 돋보이게 했다. 반면에 '덧무늬토기1'은 동그란 막대기로 겉흙을 눌러 골을 낸 다음 엄지와 검지를 맞집어 무늬를 도드라지게 했다.
 
먼저 동그란 막대기로 골을 낸 다음 엄지와 검지를 맞집어 덧띠를 도드라지게 했다. 가장 오른쪽 사진을 보면 맞집은 자국이 보인다.
▲ 오산리 덧무늬토기1 무늬 내는 방법 먼저 동그란 막대기로 골을 낸 다음 엄지와 검지를 맞집어 덧띠를 도드라지게 했다. 가장 오른쪽 사진을 보면 맞집은 자국이 보인다.
ⓒ 김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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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에 무늬를 새기게 된 내력

빗살무늬 그릇처럼 문양을 넣는 까닭을 보통 그릇을 빚어 구울 때 불 속에서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도 설명하는데, 이것은 썩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전에 벌써 곱돌이나 운모를 갈아 진흙 반죽에 넣어 그릇이 터지는 것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평양시 남경유적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는 84cm나 된다. 이렇게 큰 그릇도 불속에서 터지지 않게 구을 수 있는 신석기 장인이었다.

문양을 넣은 까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그릇을 쓸 때 미끄러지지 않게, 즉 '편리성'이다. 또 하나는 이 편리성과 더불어 그들의 '세계관'을 새겼다고 볼 수 있다. 글자가 없고, 당연히 종이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런데 바위는 너무 단단했다.

그와 달리 진흙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그리고 표현할 수 있었다. 또 일단 그릇을 구워 놓으면 그릇이 깨질 때까지 그 무늬는 남아 있고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보다는 자신이 보고 생각한 것, 다시 말해 세계관을 새기기 시작한다. 또 두려움과 공포도 새긴다. 그래서 신석기 그릇 무늬를 보면 그들의 세계관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19세기. 25.3×37.5cm. 일본의 목판화가 카츠시카 후쿠사이가 70년대에 새긴 《후지산 36경》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다. 그는 파도를 바닷가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바다 한가운데에서 보고 있다. 생선 운반 배 ‘오시오쿠리’ 세 척이 파도를 헤쳐가고 있다. 그리고 저 멀리 후지산이 보인다.
▲ 가나가와 앞바다의 높은 파도 아래 19세기. 25.3×37.5cm. 일본의 목판화가 카츠시카 후쿠사이가 70년대에 새긴 《후지산 36경》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다. 그는 파도를 바닷가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바다 한가운데에서 보고 있다. 생선 운반 배 ‘오시오쿠리’ 세 척이 파도를 헤쳐가고 있다. 그리고 저 멀리 후지산이 보인다.
ⓒ 기메 국립아시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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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신석기인의 구름무늬 '삼각형'

나는 오산리 덧무늬토기 두 점을 보면서 일본의 목판화가 카츠시카 후쿠사이가 새긴 〈가나가와 앞바다의 높은 파도 아래〉가 떠올랐다. 특히 덧무늬토기2가 그랬다. 나는 이 토기 겉면에 붙인 삼각형 덧띠무늬를 파도로 보았다. 양양 앞바다 그 성난 파도가 잇따라 내리치는 모양을, 삼각형을 이어 붙여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었다.

더구나 〈가나가와 앞바다의 높은 파도 아래〉에서 왼쪽 가장 큰 파도를 보면 옅은 굵은 선으로 솟아오르는 바닷물의 무서움과 힘(물기둥)을 나타냈다. 이것은 덧무늬토기2에서 삼각형 안에 친 흙띠 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덧무늬토기1도 성난 파도의 물결을 표현한 것 같았다.

오산리는 바다에서 200미터 남짓 떨어진 곳이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성난 파도와 물결을 표현했을 것이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래 그릇은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신석기인이 빚었던 그릇이다. 모두 다 삼각형 무늬가 있다. 과연 이 삼각형은 무엇을 뜻할까.
  
1. 나이지리아 신석기 항아리 2. 이집트 신석기 항아리(기원전 3800년, 높이 16cm) 3. 스페인 발렌시아 물그릇(높이 12.4cm, 발렌시아선사시대박물관) 4. 영국 비커(높이 13.8cm, 대영박물관) 5. 러시아 얌나야(Yamnaya) 물병.  6. 초기 아시리아, 시리아 샤가르 바자르 신석기 그릇(기원전 1900-1700, 높이 22.8cm, 대영박물관) 7. 중국 양사오 물병(기원전 5000년) 8. 과테말라 마야 토기 복제품. 9. 미국 애리조나 호피족(Hopi) 그릇
▲ 세계 신석기인의 구름무늬 삼각형 1. 나이지리아 신석기 항아리 2. 이집트 신석기 항아리(기원전 3800년, 높이 16cm) 3. 스페인 발렌시아 물그릇(높이 12.4cm, 발렌시아선사시대박물관) 4. 영국 비커(높이 13.8cm, 대영박물관) 5. 러시아 얌나야(Yamnaya) 물병. 6. 초기 아시리아, 시리아 샤가르 바자르 신석기 그릇(기원전 1900-1700, 높이 22.8cm, 대영박물관) 7. 중국 양사오 물병(기원전 5000년) 8. 과테말라 마야 토기 복제품. 9. 미국 애리조나 호피족(Hopi) 그릇
ⓒ 김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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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인은 이 삼각형을 무슨 뜻으로 새겼을까. 아직 세계 고고학계에서는 이것을 풀지 못한 것 같다. 세계 여러 나라의 박물관 설명글을 읽어 보면 거의 다 '기하학적·비유적·추상적인 삼각형'이라 할 뿐이다. 한마디로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도 〈사진 3-6〉 같은 삼각형 무늬를 '기하학적 추상무늬' 또는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이라 말하고 있다.

이 삼각형과 빗금무늬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신석기 문화에서 볼 수 있고, 무늬의 시작이자 중심이다. 더구나 이 무늬는 신석기에 그치지 않고 청동기와 철기시대까지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청동기와 철기를 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래 삼각형 무늬의 기원은 반타원이고, 이것의 각진 형태가 삼각형이다(삼각형 구름'에 대해서는 앞 글, 관련기사: 부산 영선동 '토기 융기문 발' 무늬는 무엇을 새긴 것일까)을 참고하길 바란다). 

반타원은 뭉게구름 '뭉게뭉게(뭉실뭉실)'의 한 부분 '뭉게'를 1차원 평면에 새긴 것이다. 여기서 반타원은 비(雨 또는 수분(水))을 안고 있는 '비구름'이다. 비는 보통 삼각형 안에 빗금을 긋거나 점을 찍어 표현한다. 〈사진1-9〉 그릇은 세계 신석기 그릇에서 볼 수 있는 '삼각형 구름'이다.
 
세계 신석기인이 구름을 왜 삼각형으로 그렸는지는 두 측면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하나는 어떤 구상(삼각형 꼴의 움집, 빗물에 젖은 나뭇잎)에서 왔을 것이다. 그들은 구름을 비(雨·水)를 품고 있는 집으로 보았다. 또 하나는 디자인 측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원에 가까운 그릇에 다시 타원형 구름을 새기는 것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진 삼각형 꼴 구름무늬를 새겼다고 볼 수 있다.
▲ 신석기인의 구름무늬 ‘삼각형’ 세계 신석기인이 구름을 왜 삼각형으로 그렸는지는 두 측면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하나는 어떤 구상(삼각형 꼴의 움집, 빗물에 젖은 나뭇잎)에서 왔을 것이다. 그들은 구름을 비(雨·水)를 품고 있는 집으로 보았다. 또 하나는 디자인 측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원에 가까운 그릇에 다시 타원형 구름을 새기는 것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진 삼각형 꼴 구름무늬를 새겼다고 볼 수 있다.
ⓒ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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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0년 전 신석기인이 그린 강원 양양 앞바다 구름 그림

그릇을 볼 때는 아가리 쪽을 '하늘'로 봐야 한다. 그래서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보통 아가리에 가깝게 그린다. 〈사진3〉 스페인 발렌시아 그릇은 몸통에 수평으로 선을 몇 겹으로 그려 하늘과 그 아래를 구분 짓고, 하늘 속(파란 하늘 너머)을 그들의 세계관에 따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사진6〉 시리아 샤가르 바자르 유적에서 나온 신석기 항아리는 본질적으로 양양 오산리 덧무늬토기2와 도상이 똑같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삼각형 속 비(雨)를 빗금을 엇갈려 표현했을 뿐이다. 그리고 오산리 덧무기토기1 또한 〈사진4〉 영국 신석기 비커처럼 삼각형 구름을 엇갈려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오산리 덧무늬토기 두 점은 구름을 아가리 쪽에 새기지 않고 몸통 전체에 표현했다. 나는 이것을 양양 앞바다 수평선 위로 떠 있는 구름으로 읽고 싶다. 양양 오산리 신석기 유적은 기원전 5500년까지 내려 잡고 있다. 그렇다면 이 덧무늬토기 두 점에 그린 구름은 지금으로부터 7500년 전 신석기인이 그린 양양 앞바다 구름인 셈이다.

오산리 덧무늬토기 두 점은 우리나라 신석기 그릇 빗살(빗금)무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된다. 다음 글에서는 우리나라 '빗살무늬토기'의 비밀을 풀고자 한다. 이 빗살무늬의 뜻을 해석하는 일은 우리 한국미술의 기원을 찾는 일이고, 또한 그것은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까지 맥을 잇는 작업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전공은 문학이지만 어느 순간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2007년 문화체육부는 한국 100대 민족문화상징을 발표했다. 그 해 나는 그것을 누구나 읽을 수 있게 정리해 <우리 민족문화 상징 100>(한솔수북) 1-2권을 썼다. 그 뒤 <문화유산으로 보는 역사 한마당>(웅진) 1-3권을 쓰고, 최근에는 <한국유산답사-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발자취>(사계절), <조선왕조실록-목숨을 걸고 기록한 사실>(사계절), <삼국유사-역사가 된 기이한 이야기>를 냈다. 한국 역사와 미술사를 공부할 때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이 일은 늘 즐겁다.


태그:#오산리덧무늬토기, #백자철화포도문호, #백자철화매죽문 항아리, #카츠시카 후쿠사이, #김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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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말에는 저마다 결이 있다. 그 결을 붙잡아 쓰려 한다. 이와 더불어 말의 계급성, 말과 기억, 기억과 반기억, 우리말과 서양말, 말(또는 글)과 세상, 한국미술사, 기원과 전도 같은 것도 다룰 생각이다. 호서대학교에서 글쓰기와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https://www.facebook.com/childk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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