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06 09:43최종 업데이트 18.09.06 16:08
서촌에 대한 아련한 기억

한국 민속학 연구의 선구자 중에 임석재(任晳宰, 1903-1998) 선생이 있었다. 원래 경성제국대학에서 철학 전공을 한 심리학 교수였으나, 한국 민속학에 매료되어 민속학에 일생을 바치신 분이다. 본래 충청도 논산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살았고 민속학을 오래 연구하여 서울 사정에 정통한 분이었다.


순박한 인상의 선생은 참으로 입담이 좋았다. 한 번은 민속학을 연구하는 후배들 앞에서 서울의 옛날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선생은 마치 당시 거리를 걸으며 말하듯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서울의 모습을 흥에 겨워 말씀을 하였다.

조선시대 사대문 안 이야기에서부터 북촌, 남산골, 종로, 광화문 앞 육조거리 등에 대한 감칠 맛 나는 이야기였다. 예전에 서울 토박이라는 분들의 서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임석재 선생의 말씀은 특히 실감나고 재미있었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중인들이 살았던 '서촌' 이야기였다. 조선시대 중인에서부터 근대의 개화된 중인들까지 섞어 이야기하는데 그 진진한 이야기는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 재미있는 소설 같았다. 그때 이후로 서촌은 항상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동네로 자리 잡았다.

광통교 위쪽 우대와 아래쪽 아래대

근대기 서울 문화의 한 축을 이루는 곳이 광통교를 중심으로 나뉘는 '우대'와 '아래대'이다. 우대는 광통교 위쪽으로 인왕산 아래쪽을 지칭하는데, 주로 중인 중에서 비교적 고급 관리가 살았다. 그에 비해 아래대는 광통교 아래 쪽 왕십리 쪽을 말하는데, 주로 훈련원의 하급 관리들이 살았다.

그래서 우대에 사는 이들은 아래대에 사는 이들을 같은 중인이라도 내려다보는 경향이 있었다. 우대는 지금 통상 '서촌'이라 불리는 곳인데, '웃대' 즉 '상촌(上村)'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서촌'은 경복궁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토박이 서울 사람들은 서촌을 '웃대'라 발음하지 않고 주로 '우대'라 하였다.

한자로 '하대(下臺)'라 썼던 아래대 또한 '아랫대'라 하지 않고 '아래대'라 불렀다. 그래서 지금도 나이 많은 원로 중에는 여전히 경음화시키지 않고 '우대', '아래대'로 말하는 이들이 있다. 아마 세칭 '서울말'이라는 관습이었을 것이다.

광화문 너머 바라보이는 인왕산
 

광화문 너머 바라보이는 인왕산 ⓒ 황정수


중인은 조선시대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있던 신분으로 주로 기술직에 종사하는 계층이었다. 양반을 도와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 의학이나 법률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 외국과 교류할 때 외국 사람과의 통역을 맡은 역관 등이다. 도화서에 속한 화원들 또한 대부분이 중인이었다. 당시는 유교 사회였기 때문에 기술 교육이 상대적으로 천대받아 중인은 양반 사대부 계층에 비하여 차별대우를 받았다.

중인의 신분과 직업은 세습되었으며, 중인은 육조와 삼사 등의 일반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으며 관직 승진에도 제한이 많았다. 그러나 중인들은 현실적인 실학에 종사한 덕에 현실 적응력이 매우 뛰어났다. 중인들 중에는 대대로 이어오는 전문 지식과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양반을 능가하는 큰 부자가 된 사람도 생겨났다.

조선 후기에 중인들의 경제력이 커지자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도 더욱 강해졌다. 이들은 처음에는 자신들끼리 모임을 만들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지만, 19세기 들어 신분 제도가 흔들리자 점차 양반의 차별 대우에 맞서 신분 향상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중인 계급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 제도가 폐지되면서 사라졌고, 이후 중인들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전문 지식을 활용해 근대 사회를 앞당기는 선진 지식인의 역할을 하였다.

그들 중에는 재주와 학문을 겸비한 이가 많아 근대기의 새로운 변화에 적응이 빨랐다. 이러한 중인들의 후예들은 여전히 서촌을 떠나지 않았는데, 서촌은 점차 다른 지역에 비해 문화 수준이 높은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지역의 입지 또한 궁궐에서도 가깝고 창의문이 가까워 도성 밖으로 나가기도 좋아 실용적인 신흥세력들이 모여들었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일본인들이 들어와 산 것도 이러한 입지때문이었다. 자연 환경 면에서도 인왕산을 배경으로 수성동 등 아름다운 계곡이 있고, 마을 앞으로는 개천이 흘러 산수가 조화로운 천혜의 환경을 가진 곳이었다.

서촌을 향해 걷다 '동십자각'을 만나다
 

조계사 앞 도화서 터 ⓒ 황정수


서촌을 가려고 조계사 앞 도화서 터에서 발걸음을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화원들이 봄꽃을 찾아 산에 오르거나 여름 더위를 피해 인왕산 계곡을 찾던 발길을 따라 해보고자 하는 뜻이다. 옛날에는 흙길을 따라 개천을 끼고 걸었겠지만, 이제 길은 아스팔트나 보도블록으로 깔려 있어 흙 맛을 보기는 어렵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살짝 발을 옮겨 율곡로를 오르자 바로 저 멀리 인왕산이 보이고, 아래쪽으로 위엄 있는 경복궁의 자태가 내려다 보인다.

산이나 궁궐은 옛날 화원들이 바라보았던 그대로이나 새로운 문명이 손을 댄 길이나 건축물은 그때의 모습은 아니다. 흙길은 덮여져 발길을 어색하게 하고, 물길은 사라져 물 흐른 흔적조차 볼 수 없다.

몇 발자국을 옮기자 경복궁의 시작을 알리는 동쪽 끝 동십자각이 우뚝 솟아 있다. 동십자각은 본래 궁궐의 중요한 동쪽 망루였는데,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광화문을 옮기고 궁성을 철거할 때 담장에서 떨어져 나와 지금과 같이 길 가운데 남게 되었다. 일제의 이러한 무도한 정복적인 문화정책은 당시에도 비판이 많았다.
 

김용준 '동십자각'(좌), 현재의 동십자각(우) ⓒ 황정수


공사가 진행되던 1924년 당시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은 근처 계동에 있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학생이었다. 당시 중앙고보에는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서양화가 이종우가 도화 선생으로 있었다. 김용준은 이종우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미술에 뜻을 두기 시작한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김용준은 학교를 오가며 궁궐의 유적이 파헤쳐지는 모습을 보며 많은 충격을 받는다.

그는 학교에 돌아가 이때 느낀 것을 화폭에 옮기기 시작한다. 작업은 주로 중앙고보 도화 교실에서 하였다. 이종우의 지도를 받으며 완성한 이 작품은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을 한다. 이 작품은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비판적인 내용과 고보 4학년 학생 신분으로 입선을 한 것으로 당시에 화제가 되었다.

이종우의 회고에 의하면, 이 작품은 전람회 출품 제목인 '동십자각'으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 제목은 '건설이냐? 파괴냐?'였다고 한다. 김용준의 의식을 잘 보여주는 일면이다. 그런데 작품 제목이 경복궁 담장을 허무는 공사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강하고, 너무 시국적인 느낌이 나 제목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작품이 화제가 되자 당시 중앙고보 설립자였던 인촌 김성수의 관심을 받게 된다. 김성수는 자신의 학교 학생인 김용준을 격려하고 이 작품을 구매한다. 김성수는 작품 대금을 넉넉하게 주었는데, 김용준은 이 돈으로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미술학교로 미술공부를 하러 떠나게 된다.

광화문에서 바라 본 백악
 

광화문에서 바라본 백악 ⓒ 황정수


동십자각의 끊어진 담장을 찾아가며 잠시 걸으면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이 우뚝 솟아 있다. 광화문은 조선왕조 500년을 간직하고 있는 조선의 상징일 뿐 아니라 현재 한국을 상징하는 대문이기도 하다. 광화문은 조선왕조 건국 직후인 1395년 경복궁의 건립과 함께 세워졌다.

건립 당시 이름은 '사정문(四正門)'이었으나, 1425년 세종 때에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의 '광화문(光化門)'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는 '빛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는 뜻의 <서경>에 나오는 '광피사표 화급만방(光被四表 化及萬方)'에서 차용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경복궁은 동서남북 정 방향에 따라 건춘문ㆍ영추문ㆍ광화문ㆍ신무문 등 4개의 대문이 있는데 광화문은 남쪽의 정문이다.

이렇게 당당해야 할 광화문은 500년 조선 왕조의 역사과 함께 영욕을 함께 한다. 임진왜란 때 화재를 당해 고종 때에 중건되었고, 다시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제5공화국 시절 복원 되는 등 많은 수난을 겪는다. 근래에는 현판이 복원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시련을 겪고 있다. 광화문의 수난사는 한민족의 수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안중식 <백악춘효> 여름 작(왼쪽)과 가을 작(오른쪽) ⓒ 황정수


가을 날 맑은 하늘을 보며 광화문에서 백악을 반듯이 바라보면 조선 마지막 화원인 심전(心田) 안중식(安仲植, 1861-1919)의 작품 '백악춘효(白岳春曉)'가 떠오른다.

조선시대에서 근대기를 이르는 동안에 이곳 광화문과 백악을 응시하며 그린 그림으로는 안중식의 작품이 단연 압도한다. 사실 안중식의 작품 외에는 광화문과 백악을 그린 작품이 거의 없다. 이렇게 된 되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조선시대에 임금이 사는 궁궐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조선 전기 왕권이 강하던 시절에 궁궐을 소재로 사적인 작품을 그리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로는 경복궁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00년간 유허로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 사실적인 풍경을 그리는 일이 많아졌으나, 경복궁은 고종 때 와서야 중건되었으니 작품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후기 강희언이 그린 '북궐조무'같은 그림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곳이 경복궁인지 창덕궁인지 확실하지 않고, 안중식 작품의 넓은 시야와 규모를 따르지 못한다. 이러한 안중식의 솜씨는 그의 타고난 필력의 우수함도 있지만 중국에 영선사를 따라 가서 일 년 동안 북경에 머무르며 경험한 것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중국에 머무르며 자금성 등 고궁의 모습을 보며 궁궐을 그리는 회화적 기법에 눈을 떴을 것이다.

안중식은 '백악춘효'라는 제목의 작품을 1915년 한 해에 두 점을 그린다. 한 점은 여름에 그리고, 가을에 또 한 점을 그린다. 두 점 모두 다른 계절에 그렸는데, 작품 소재는 같은 '봄 풍경'을 그린 것이다. 백악을 배경으로 광화문을 바라보며 봄날의 경복궁 모습을 그렸다. 운무에 쌓인 궁궐의 모습이 신비로운 기운을 느끼게 한다. 장승업의 수제자라는 명성에 어울리게 화려한 필치의 산수에 대한 해석이 명쾌하다.

또한 궁중 화원이 가져야 할 기본기가 충실하여 궁궐의 집채를 그린 표현이 좋고 각 소재들 간의 배치가 뛰어나 여백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이 두 작품 속에 묘사된 것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같은, 해에 같은 소재를 그렸는데도 작품의 구성이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한 계절 차이인데도 다른 점이 있는 것은 그 사이에 궁궐 주변의 모습이 변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 중 가장 눈에 두드러진 것은 가을에 그린 작품 속에는 작품 전면에 배치된 해태가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안중식의 실수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신문물을 접하고 사실적인 그림을 배운 그가 작품 속에 균형감을 잃게 할 정도의 중요한 소재를 빠뜨렸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는 당시 경복궁에 주변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품을 그린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린 해이다. 일본과 조선이 함께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이 행사는 경복궁에서 열렸다. 행사를 위해 건물을 새로 짓고 기물들이 옮기는 일제의 만행이 저질러졌다. 필시 이 가을에 일본은 행사를 위해 해태를 옮기는 일을 했었을 것이다.

안중식의 입장에서 조국의 궁궐이 파헤쳐지는 만행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서슬 퍼런 제국의 힘 앞에 자신의 뜻을 마음껏 드러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그림 한 구석에서나마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편으론 저물어가는 조국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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