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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은 독재정권이 아닙니까?"

2012년 8월, 한국방송(KBS) 새 노조 공정방송추진위원회는 당시 KBS 보도를 총괄한 이화섭 전 보도본부장에게 이렇게 물었다. KBS 간부진이 그달 17일 <9시 뉴스>가 보도한 '의문사 37년... 고 장준하 사인 논란 재점화' 리포트 내용을 수정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을 다룬 이 리포트는 원래 장준하 선생을 '해방 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3선 개헌에 반대하며 반독재 투쟁을 벌인' 인물로 소개했지만, 보도 간부진은 '독재'라는 단어를 지우고 '반독재 투쟁' 역시 '민주화 운동'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2012년 8월 17일 KBS 간부진은 <9시뉴스> ‘의문사 37년... 고 장준하 사인 논란 재점화’ 보도에서 ‘독재’라는 단어를 빼라고 지시했다.
 2012년 8월 17일 KBS 간부진은 <9시뉴스> ‘의문사 37년... 고 장준하 사인 논란 재점화’ 보도에서 ‘독재’라는 단어를 빼라고 지시했다.
ⓒ 뉴스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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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보도본부장은 당시 공정방송추진위의 질의에 "저널리즘적으로 특정 정부와 관련해서 독재정권이냐 아니냐 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리포트 한 것이) 데스킹을 잘한 것이라 본다"라며 "독재처럼 평가가 마무리되지 않은 사안에 객관적이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우리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2013년 5월 KBS를 떠나 지난해까지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초빙교수로 일한 이 전 본부장은 2010년 4대강 문제를 다룬 KBS 시사프로그램 <추적 60분> 방영을 막는 등 이명박 정부 옹호에 앞장섰다는 비판을 받는 인물이다.

독재를 독재라 부르지 못하는 게 '객관'인가

당시 KBS 공정방송추진위 간사를 맡았던 최경영 <뉴스타파> 경제미디어팀장은 지난 5월 열린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에서 "'객관'이라는 단어는 저널리스트라면 죽을 때까지 고민해야 하는 문제"라며 언론이 독재를 독재라 부르지 못하는 게 과연 '객관'인지 의문을 표했다.

KBS 기자 시절 '고위공직자 재산 검증' 보도 등 굵직한 탐사 특종을 터뜨린 최 팀장은 2012년 이명박 정권의 공영방송 탄압에 굴복한 KBS 경영진을 비판하다 정직 처분을 받았고, 이듬해 3월 KBS를 나와 탐사 전문 독립언론 <뉴스타파>로 자리를 옮겼다.

최경영 <뉴스타파> 경제미디어팀장이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강의하고 있다.
 최경영 <뉴스타파> 경제미디어팀장이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강의하고 있다.
ⓒ 아로요 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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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팀장은 2012년 9월 KBS 간부진의 역사 인식에 분노를 느끼고 <뉴스타파>에 '시선-독재를 독재라 부르지 못하고'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해 내보냈다. 당시 KBS 정직 중이라 기자 이름도 달지 못했다는 그는 "한국에서는 박정희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직 엇갈리지만, 외국에서는 대부분 그를 독재자라 평가한다"라고 말했다.

실제 미국 최대 일간지 <USA투데이>는 2011년 2월 7일 미국의 우방이면서도 폭정과 독재로 미국을 곤란하게 했던 지도자로 니카라과 소모자, 이란 팔레비, 필리핀 마르코스와 함께 한국의 박정희를 꼽았다. 영국 통신사 <로이터>, 미국 <블룸버그>, <보스턴글로브> 등 유수 매체는 물론 극우 성향인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조차 박정희를 독재자로 평가한다.

최 팀장은 "어떤 개념을 정의하는 기준은 이를 뒷받침하는 사실(fact)"이라며 수잔 페이지 <USA투데이> 워싱턴지국장과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했다. 페이지 지국장은 박정희가 독재자인 이유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긴급조치를 발동해 국회를 해산하고 헌정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라며 "그는 표현의 자유, 언론 자유도 위축시켰다"라고 말했다. 건조하면서도 명료한 대답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주한 미국대사를 역임한 지한파 보수정치인 도널드 그레그도 1999년 8월 23일 <타임> 기고문에서 1972년 유신체제를 '독재 회귀'라고 정의한 뒤, '많은 정치지도자를 구속하고 정보기관을 동원해 반대파를 진압하고 고문하는 공포정치는 많은 측면에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연상케 했다'고 적었다.

최 팀장은 "그레그는 공화당 내부에서도 우파에 속하는 정치인"이라며 "공화정, 민주국가에서 국민주권, 법치, 표현의 자유 등이 유린당한 '팩트'가 박정희 정권이 독재정권인 이유"라고 말했다.

2012년 8월 21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선후보 지명 소식을 보도한 미국 <보스턴글로브> 인터넷판. 박근혜를 ‘남한 독재자의 딸’로 지칭했다.
 2012년 8월 21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선후보 지명 소식을 보도한 미국 <보스턴글로브> 인터넷판. 박근혜를 ‘남한 독재자의 딸’로 지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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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적 균형? 7:3을 5:5로 보도하면 현실 왜곡

최 팀장은 한국 언론의 '기계적 균형 강박'에 일침을 가했다. 그는 "흔히 언론을 '세상을 비추는 창'에 비유하는데, 모든 문제를 5:5로 치환하는 기계적 균형에 매달리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 못하게 된다"라며 "7:3인 여론을 5:5로 보도하는 건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기계적'이라는 말 자체가 사실 인간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법관이 판결을 내릴 때 법과 '양심'에 따르듯, 기자가 '중립'을 지킨답시고 사회 문제를 방관하며 양심을 속여서는 안 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 팀장은 "기자가 언론 활동을 하는 순간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된다"라며 "완벽한 객관주의란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1시간짜리 <9시 뉴스>에서 제외되는 뉴스가 얼마나 많나"라며 "아이템 선정부터 취재, 편집까지 뉴스 생산 과정에서 언론인의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역사와 인간을 잘 이해하고 양심에 따라 보도하려는 언론인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태생이 권력적∙주관적인 미디어

최 팀장은 정보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미디어는 애초에 객관적이지 않았다며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예로 들었다. "약 1000년 전, 사람들이 힘들게 나무를 깎아 기록한 것은 민중의 이야기가 아닌 호국불교, 부처의 이야기"였으며, 이는 "왕들이 불교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 조선왕조실록은 이씨 왕들을 500년 동안 기록한 책이고, 근대 최초 신문은 프랑스 혁명 당시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옹호할 목적으로 탄생했다고 덧붙였다.

신정시대에도 왕정 때도 미디어는 권력이었다. 우리나라 공영방송 KBS도 원래 문화공보부 산하 부서였으며 1973년 3월 3일 KBS가 국영에서 공사화했을 당시 대통령이 '유신 이념의 구현'이라는 지향점을 밝혔다.

KBS의 공무원들은 승진하려고 이를 충실히 수행했다. 당시 KBS 직원은 5급, 7급 등의 공무원이었으며 KBS 대표는 사장이 아니라 국장이었다. 방송사보다 방송국이 우리 입에 더 익숙한 이유이기도 하다.

1973년 3월 3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공영방송을 만들겠다며 KBS “유신이념의 구현”이라는 역할을 부여했다.
 1973년 3월 3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공영방송을 만들겠다며 KBS “유신이념의 구현”이라는 역할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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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자의 줄임 말은 '기자'였다

1975년 <동아일보> 기자들이 유신 독재에 맞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꾸렸다. 박정희 정권은 <동아>에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했고, <동아>는 언론인 113명을 대량 해직했다. 1980년에는 전두환 신군부세력은 '사이비 기자들'이 많다며 언론통폐합을 실시했다.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으로 우리 경제는 10%대 고성장을 기록해 광고홍보수요가 급증했는데 언론사가 한정되다 보니 기득권 언론이 생겨났다. 그때 당시 <조선일보> 기자는 보너스로 연봉의 1000%를, <부산일보> 기자는 700%를 받았다.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 언론 특혜인 '기자아파트'는 1987년 서울 강남구 일원동에 지어졌다. 최근 재건축을 승인받은 아파트는 완공 당시 31평형을 기준으로 3400만 원에 거래됐지만 지금은 시세로 15억 원대에 이른다.

2014년 <기자협회보>는 50년사 기념 책에 일원동 기자아파트를 '주거복지'로 내세웠다. 이로써 언론기관은 권력과의 상호 협조 아래 독점 재벌화했고, 언론기관 종사자는 체제 옹호의 선전자로 전락하는 대신 물질적 보상을 받게 됐다. 최 팀장은 "지금도 '제도화한' 사이비 기자가 많고, '기레기'는 과장된 말이 아니다"며 "이런 기자가 될 바에는 차라리 기업 홍보팀에 들어가는 게 좋다"라고 꼬집었다.

객관적 저널리즘의 탄생 배경

19세기까지 미국 신문은 정파적이었으나 20세기 초 모스부호와 텔레그램의 발명, 대서양 해저케이블 설치로 객관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미국 이민자들은 고국 소식을 보다 빠르게 주고받게 됐지만 내용이 길수록 비용이 커졌다.

각 언론사는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메시지 전송비용을 갹출하기 시작했고 이는 AP(Associated Press)의 전신이 된다. 철저히 산업적 논리로 탄생한 객관주의는 '왜'보다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같은 팩트를 중요히 여겼고 이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발전했다.

기자, 사주, 산업, 이익이 결합해 '객관'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객관은 '100%의 보편'이므로 신화일 수밖에 없다. 최 팀장은 인간은 주관적이고 편향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되 팩트로 이야기할 때 보편적으로 설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컴퓨터가 보급돼 과학적 글쓰기가 가능하니 데이터저널리즘과 탐사보도를 활용한다면 독자에게 객관적으로 보이고, 그들을 설득할 수 있으며, 세상을 잘 비출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만드는 비영리 대안매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최경영, #뉴스타파, #저널리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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