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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타고난 복 몇 개쯤은 있을 텐데, 나 역시 있다. 재물 복도 아니요, 부모 복도 딱히 아닌 것 같고(엄마 미안), 남편 복은 있는 것 같긴 한데(남편은 제 기사의 애독자입니다), 어찌됐든 제일 타고난 것은 따로 있다. 별 것도 아닌 것이 해를 지날수록 빛을 발하니, 바로 더위에 둔감하다는 것이다.

폭염이 심하지 않은 해엔 선풍기 한번 틀지 않고도 여름을 나곤 했다. 언젠가는 사무실 에어컨 바람에 지쳐 밖에 나와 '따뜻해서 좋다'라고 했다가 동료에게 구박을 받기도 했다. 따뜻하다는 말에 더위가 더 뻗친다나 뭐라나. 동료는 당시 몇 도 높아진 사무실 냉방 온도 때문에 힘겨워 하고 있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나라고 전혀 덥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더운 여름일수록 그해 겨울이 춥다는 속설을 듣고는 한여름부터 지레 겨울을 걱정했으니, 그동안 참 속편한 여름을 보냈다.

하지만 내 복도 이제 수명을 다한 것일까. 이런 나에게조차 올 여름은 혹독했다. 짧은 거리라고 호기롭게 대낮의 도보를 시도했다가, 몇 분 만에 혼이 나가 황급히 택시를 타기도 했다. 쏟아지는 햇볕은 그야말로 사람 잡았다. 내가 이럴진대 노약자와 더위에 취약한 분들은 어떻게 이 여름을 나셨을까 생각이 미치고, 막연하게나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불 안 쓰는 요리를 찾아서

불 쓰는 것을 최소화하고 요리를 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불 쓰는 것을 최소화하고 요리를 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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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그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폭염 때문에 무섭도록 치솟은 장바구니 물가는 한 번 더 고난이었다. 이천 원 전후로 사곤 했던 양배추는 육천 원까지 올랐고, 만 원대로 살 수 있던 수박이 삼만 원을 넘기기도 했다. 초여름에 맛 본 수박은 폭염이 절정에 달할 땐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사실은 그때 먹어야 제맛인 것을.

덕분에 가장 많이 찾은 것은 맥주다. 결혼하며 남편과 함께 음주는 일주일에 1회 미만으로 약속했고 잘 지켜왔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올 여름, 이 약속이 깨졌다. 그간 피치 못할 행사 때문에 약속이 깨진 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순전히 우리 둘의 자발적 의사로 깨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이었고, 무수히 깨졌다.

맥주를 마실 때 이런저런 안주를 만드는 것도 내 취미 중 하나였는데, 올 여름은 그럴 수도 없었다. 기껏해야 견과류나 시판 과자를 안주 삼았다. 가만히 있으면 그런대로 괜찮은 나도 움직이기만 하면 땀이 쏟아졌으니, 불 앞에서 요리하는 건 최소한으로 해야 했다. 머리를 쓴답시고 가스레인지 대신 오븐을 돌렸다가, 내가 오븐 속 피자가 되어 구워지는 줄 알았다.

아무리 폭염이라도 먹긴 먹어야 한다. 외식을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요리를 아예 안 할 수는 없다. 불 쓰는 것을 최소화하고 요리를 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베테랑 주부는 못 되는지라, 가지와 양배추를 전자레인지에 쪄내는 것도 이번에 터득했고, 칼질할 수 있게 물러질 만큼만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리던 단호박도 끝까지 전자레인지로 익혔다. 전자레인지가 좋을 것 없다는 항간의 설은 폭염에 살아남기 위해서 가뿐히 무시할 수밖에.

냉면과 김치밥

나만의 팁이 하나 있다. 보기만 해도 더운 가스렌지를 켜지 않고 전기포트를 이용하는 것
 나만의 팁이 하나 있다. 보기만 해도 더운 가스렌지를 켜지 않고 전기포트를 이용하는 것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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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내내 거의 매일같이 냉면을 해먹기도 했다. 동치미 국물을 육수로 물냉면을 말아 먹기도 하고, 매콤새콤한 비빔냉면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여름에 냉면이야 밥 먹으면 배부르다는 말처럼 새로울 것 없는 말이긴 하지만, 나만의 팁이 하나 있다. 보기만 해도 더운 가스렌지를 켜지 않고 전기포트를 이용하는 것.

오랫동안 삶거나 지지고 볶고 해야 하는 음식은 어쩔 수 없지만, 단 15초 전후로 데치듯 삶아내는 냉면은 끓인 물을 붓는 것으로도 충분히 익는다. 어쨌거나 물이 끓으면 집안 온도는 올라가지만, 기분 탓일까. 가스렌지보다는 훨씬 나은 듯하다. 나는 이 방법을 수년째 이용중이고 아무 탈이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체에 무해함이 검증된지는 잘 모르겠음을 덧붙인다.

일품 요리를 주로 해먹기도 했다. 소스와 각종 재료, 파스타를 한 번에 넣고 끓이는 한냄비 파스타, 반숙 계란에 끓이지 않고 만든 간장소스를 부어 양념이 배인 뒤 먹는 일명 '마약 계란'도 만들어 덮밥처럼 먹었다.

내가 무엇보다 좋아하는 일품 요리는 김치밥이다. 밥을 지을 때부터 잘 익은 김장 김치를 썰어 넣고 불에 올리면 되니 이토록 간편할 수 없고 맛 또한 좋다. 밥이야 어차피 지어야 하고, 폭염에 치솟은 물가와 무관한 김장 김치를 먹으니 일석이조. 안타까운 것은 남편은 나만큼 이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혼자였다면 냉면과 김치밥, 단 두 가지로 올 여름을 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한솥밥을 먹는 식구끼리 입맛이 다른 것은, 영양 불균형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

엄마의 콩국수

어느 날은 작정을 하고 제대로 된 밥상을 차려보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내장과 알을 푸짐하게 넣은 얼큰한 동태탕을 끓이고, 부추전을 부치고, 몇 가지 밑반찬을 하며, 그야말로 양동이로 들이부은 듯 땀을 흘렸다. 헐렁하던 옷은 땀으로 온몸에 찰싹 달라붙어 에어로빅복이 되고, 땀이 잔뜩 들어간 눈은 따가워 정신이 없었다.

그러고 있는 나나 귀가 후 내 모습을 본 남편이나 몸이든 마음이든 불편하긴 매한가지였으니, 이건 누구를 위한 일도 아니었다. 제대로 된 밥상은 곧 찾아올 가을로 미뤄본다.

해가 지나고 요리를 하면 할수록 한식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정성스러운 음식인지 깨닫게 된다. 밥과 여러 개의 반찬을 차려 내고도 모자라 한 가지 종류 이상의 김치를 올려야 하는 우리네 밥상은 초보 주부가 혼자 차려내기엔 버겁다.

글 서두, 웃겨보려는 욕심으로 무리수를 뒀다. 엄마 덕분에 여름이면 닭백숙이다, 육개장이다 해서 뜨거운 보양식과 시원한 콩국수를 먹으며 쑥쑥 자란 내가 부모 복이 없을 리가 있나. 콩국수야 먹는 사람에게나 시원한 음식이지, 몇십분 동안 불 앞에서 콩을 삶고 콩국물을 거르고 하는 과정은 해보고 나서야 고생인 걸 알았다.

올 여름 폭염을 견뎌온 모두에게, 특히 폭염 속에서도 가족들의 건강한 식사를 책임진 베테랑 살림꾼들에게 이 날라리 주부는 박수를 보낸다. 이 박수 멀리 보낼 것도 없이, 오랜만에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려야겠다. 남은 여름 모쪼록 시원하게 보내시라는, 터무니없지만 진심어린 인사를 올리며.


태그:#폭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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