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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의 큰 화두는 엄마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지 않느냐였다. 종종 언니에게 맞곤 했는데, 엄마는 끝내 모르쇠로 일관했다. 보복이 두려워 낱낱이 고하진 못했다. 대신 울어서 퉁퉁 부어오른 눈을 엄마에게 들이밀거나 맞은 흔적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떤 것도 효과는 없었다. 엄마는 끝내 몰랐다. 천천히 깨달았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른 체다. 엄만 모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확신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큰 병 작은 병 가리지 않고 모두 걸려가며 잦은 병치레를 했다. 방과 후 몸이 아프면 이부자리를 펴고 드러누워 끙끙 앓으며 곧 귀가할 엄마를 기다리는 것도 익숙한 일이었다.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나를 살폈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하다가도 나를 보기 위해 방에 들락거렸다. 깨어 있을 때면 내 이마를 짚는 엄마의 손에 옅게 배어 있는 양파나 마늘 따위의 냄새를 맡으며 생각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한다, 분명.

잊고 있던 옛 이야기라고 핑계 삼아 보지만, 나의 회고는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유치하기 그지없어 낯이 뜨겁다. 자신의 지난 날을 감상이나 미화 따위 완전히 제거하고 회고할 수 있는, 역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회고 정도가 아니라 '다시 살면서' 기록할 수 있는 소설가란 어떤 인물일까.

노벨상을 타고, 한 사람에게 두 번 수여하지 않는다는 부커상을 이례적으로 두 번이나 받은 작가 J.M.쿳시. 쿳시의 소설 <소년 시절>은 '그'라는 삼인칭으로 지칭되는 주인공 소년의 열 살부터 열 여섯 살의 시기를 담고 있다. 지독하리만치 섬세하고 사실적인 서술이 돋보인다.

역자에 따르면, 이 소설을 자서전이자 소설로 분류해도 되냐는 질문에 쿳시는 "소설과 자서전 사이에 분명한 선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p264)고 답했다 한다. 이 소년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독자로서 자신의 지난 날을 떠올리지 않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모든 소년에게는 스스로 성장해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진다. 소설 속 소년이 보는 <어린이 백과사전>은 유년 시절을 "순진무구한 환희의 시기"(p25)라고 말하지만, 그에겐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 자기만의 혼란을 겪어내야 했듯이.

J.M.쿳시 장편소설 '소년 시절'
 J.M.쿳시 장편소설 '소년 시절'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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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마음 속에서 아버지가 일찍이 존재를 부정당한 것에 반해, 어머니는 훨씬 복잡한 애증의 존재다. 소년은 어머니의 보호가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그를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만든다는 것에 화가 난다.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부담스럽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녀는 그를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따라서 그도 그녀를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그녀가 그에게 강요하는 논리다. 그는 그녀가 그에게 쏟는 모든 사랑을 결코 갚을 수 없을 것이다. 평생 그런 사랑의 빚을 안고 허덕일 것을 생각하자 몹시 당황스럽고 화가 난다."(p77)

동시에 어머니가 자신에 대한 사랑을 철회할까 봐, 소년이 알리고 싶지 않은 모습을 어머니가 알게 될까 봐 두렵다. 그녀가 그에 대해 최종 판결의 말을 선언하게 될 것이 공포스럽다. 
"그는 듣고 싶지 않다. 정말이지 너무 듣고 싶지 않아서 그의 머릿속에서 손이 불쑥 나와 귀를 막고 눈을 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되느니 차라리 눈이 멀고 귀가 먹고 싶다. 차라리 껍데기 속에 사는 거북이처럼 살고 싶다."(pp252-253)

소년은 어머니가 자신을 떠날까 두려운 나머지, 자전거를 배우고 싶은 어머니를 아버지와 한 편이 되어 비웃고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어머니의 이중성과 모순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수치스럽다고 말하면서도,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이끌어야 했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연민은 소설 전체에 묻어난다.

"그는 어머니가 죽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녀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견고한 존재다. 그녀는 그가 서 있는 바위다. 그녀가 없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p58)

독자로 하여금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것에 그치는 소설이었다면, 쿳시가 이토록 대단하게 여겨지지는 않았으리라. 소설 속엔 저자가 태어나고 자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현실이 오롯이 담겼다.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인종차별, 체벌이 당연시되는 교육은 물론 세상을 가득 메운 폭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쿳시의 아버지는 아프리카너, 즉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백인의 후손이고, 그의 어머니는 남아프리카에 이주한 폴란드계 독일인의 후손이다. 국가를 지배하는 인종차별은 소년의 눈에도 또렷하고, 그는 태어날 때부터 우월한 위치를 점한 자로서의 수치심을 느낀다. 소년은 맨발로 다니는 원주민과는 다른, 부드러운 발을 지닌 자신의 이질성을 느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한정되지 않은, 세상 어디라도 마찬가지일 인간의 이중성 또한 치밀하게 그려지는데, 놀라운 것은 그 대상이 어머니를 포함하여 모든 인물을 망라했을 뿐 아니라 소년 자신에게도 가차없다는 것이다. 소년은 성장을 원하면서도 성장하지 않을 핑계를 찾는다. 아프리카너를 비하하는 영국인에게 실망감을 느끼면서도 그 자신도 아프리카너가 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공포스럽다.

미화라곤 없이 날카롭지만, 소설이 품고 있는 것은 애정이다. 어머니를 향한 것은 물론, 작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해서도 그렇다. 모순과 비합리성을 깨닫는 소년의 모습은, 그곳에 희망과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 노인이 된 작가지만 나는 소년의 혼란을 응원하며 우리 모두의 성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책의 마지막, 소년의 고모할머니가 죽는다. 소년은 그녀가 남긴 책들을 생각한다. 이 때가 그가 소설가의 일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시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소설의 마지막 구절을 옮기며 글을 맺는다.

"이제 애니 할머니는 빗속에 누워 누군가 시간을 내서 그녀를 묻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직 그만이 생각하도록 남겨진다. 그는 어떻게 그 모든 것을, 그 모든 책과 모든 사람과 모든 이야기를 머릿속에 간직하게 될까? 그가 그것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렇게 할까?"(p260)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동시 게재합니다.



소년 시절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문학동네(2018)


태그:#소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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