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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기자말

⑰ 여행은 이별을 만든다

로만 부모님의 환대


잠깐 눈을 붙였다 싶었는데 로만이 깨운다. 아침이다. 정신이 없는 상태로 호숫가로 산책을 갔다.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호숫가는 아직 이슬이 남아있는 공기로 둘러싸여있다.

로만은 나에게 새벽의 호수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어젯밤에는 술을 먹은 데다 가로등 같은 조명도 없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니 호수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호수는 밤에 봤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다. 불그스름한 하늘과 촉촉한 공기 속에서 잔잔한 물결이 밀려온다.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낭만적이다. 모래사장에 앉아 두 발을 모래 깊숙이 파묻고 아무 말 없이 파랗게 변하는 하늘과 호수를 바라봤다.

잠시 후 로만은 부모님에게 우리를 소개시켜주고 싶다며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를 따라가니 별장 옆에 나무로 된 근사한 2층 주택이 있다. 그의 안내를 따라 2층으로 들어가니 머리카락이 희고 강인한 인상의 아버지가 우리를 맞이하신다. 잠시 후 주방에서 나온 인자한 인상의 어머니는 빵과 차를 내주신다.
로만 아버지의 책장
 로만 아버지의 책장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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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은 아버지가 직접 지은 집이라고 했다. 벽에는 여러 동물들의 가죽도 있는데, 아버지가 사냥한 것들이란다. 산양의 뿔이 한쪽 벽을 채울 정도로 많고, 늑대와 여우 가죽도 있다. 다른 벽에는 곰 가죽도 있다.

곰을 직접 잡으신 거냐고 놀란 표정으로 묻자, 아버지는 별거 아니라며 새끼 곰이라고 하신다. 가죽 크기가 벽 한쪽을 다 채울 정도인데 새끼 곰이라니, 어미 곰은 어떠할까?

그는 내심 자랑스러우셨는지 사냥용 장총 두 정과 총알들을 가져와 보여주신다. 한 정은 굉장히 낡아 보였는데, 젊었을 때부터 사용했던 총이라며 사냥하는 포즈를 취해주시기도 한다.
파티를 했던 별장
 파티를 했던 별장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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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차를 다 먹고 나서 로만의 안내로 집 안 곳곳을 구경하고 별장으로 돌아왔다. 다른 친구들도 모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정리하는 중이다. 친구들이 아침을 먹는 동안 집 주변 쓰레기를 치우고 어젯밤 놀았던 흔적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치타로 출발했다.
별장을 정리하고 로만의 낡은 차를 타고 치타로 돌아왔다.
 별장을 정리하고 로만의 낡은 차를 타고 치타로 돌아왔다.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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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바이크 화물로 부치기

치타까지는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함께 놀았던 친구들을 모두 집에 데려다주고 루슬란의 집에 도착하니 오후다. 루슬란은 바이크를 화물로 보내고, 밤 기차로 이르쿠츠크로 가면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집에서 잠시 쉬다가 화물회사로 향했다. 샤샤의 차가 앞장서고, 그 뒤를 고장 난 내 바이크로 천천히 운전해 따라갔다.
이동하던 중, 루슬란은 이 장소에서는 치타가 한 눈에 들어온다며 사진을 찍으라고 말했다.
 이동하던 중, 루슬란은 이 장소에서는 치타가 한 눈에 들어온다며 사진을 찍으라고 말했다.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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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샤샤가 자기 속도대로 가서 길을 잃을 번하기도 했는데, 곧 속도를 낮춰줘 다행히 길을 잃지 않고 화물회사에 도착했다.

서류 작성은 루슬란이 도와줬다. 큰 회사여서인지 영문으로 된 서류가 있어 루슬란의 안내에 따라 어렵지 않게 작성했다. 바이크를 큰 조립형 나무 박스 안에 넣어 보내는 방식인데, 백미러 등 유리 제품을 모두 떼어 박스에 따로 넣어야 한단다. 우리는 부랴부랴 주변 사람들에게 공구를 빌려 바이크를 분리했다.
화물로 바이크를 부치기 위해 분해하고 기름을 빼냈다.
 화물로 바이크를 부치기 위해 분해하고 기름을 빼냈다.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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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크를 다 분리한 후 무게를 재려고 하니 직원이 막아서며 뭐라 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나는 루슬란을 바라봤고, 그는 바이크 연료통에 있는 기름을 모두 빼야한다고 했다.

기름을 뺄만한 마땅한 도구가 없어 난감했다. 바이크를 뒤집어 털어낼 수도 없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속이 비어있는 고무줄을 발견했다. 그 고무줄을 입으로 빨아 기름을 빼기 시작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휘발유 맛을 봤다.

입 안이 다 헐어버리는 기분이다. 물로 몇 번을 헹궈냈는데도 휘발유 냄새가 가시질 않아 헛구역질을 계속 했다. 내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낄낄 웃던 루슬란이 담배를 하나 건네며 불을 붙이려고 해, 뽑아낸 휘발유를 끼얹는 것으로 복수했다.

겨우겨우 기름을 다 빼내고 휴지를 빌려 입 안을 닦아냈다. 바이크 무게를 달아 돈을 지불하고, 남은 서류를 다 작성하고 나니 저녁이다.

매운 맛과 한국인의 오기?
바이크를 화물로 부치고나서 샤샤의 차를 차고 루슬란의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는 루슬란이 좋아하는 음악과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한 번씩 돌아가면서 틀었다.
 바이크를 화물로 부치고나서 샤샤의 차를 차고 루슬란의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는 루슬란이 좋아하는 음악과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한 번씩 돌아가면서 틀었다.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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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슬란은 어머니가 이 동네에 오셨다며 함께 저녁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가 어떤 음식을 먹고 싶으냐고 묻길래, '한국에서는 맵고 뜨거운 국물로 해장을 한다. 아직 술이 안 깨 그런 음식을 먹고 싶다'고 했더니, 시내에 있는 중국음식점에 가잔다.

식당엔 어머니가 먼저 와 기다리고 계셨는데, 정장차림에 굉장히 세련된 중년 여성이다. 목걸이와 시계, 반지 등 보석 장신구도 많다. 역시 루슬란의 집안은 상류층임에 틀림없다.

메뉴를 잘 모르는 우리는 루슬란에게 주문을 부탁했고, 그는 탕수육과 고기완자 등을 주문했다. 또, 아주 매운 탕을 주문하며 '코리안 스타일'로 해달라고 종업원에게 얘기했다. 종업원은 나를 보고 알겠다는 웃음을 짓더니 잠시 후 음식을 내왔다.

빨간 국물에 얼핏 짬뽕같이 생긴 그 탕은 냄새만 맡아도 코가 아찔해질 정도로 매웠는데, 원래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나는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자마자 땀이 줄줄 흘렀다. 루슬란도 그 맛이 궁금한지 숟가락 끝으로 살짝 찍어 맛보더니 격한 기침과 함께 '미친 음식'이라고 했다.

못 먹을 정도로 매웠지만 루슬란이 생각해 주문해준 음식이고, 매운 것을 잘 먹는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오기도 생겨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겨우 다 먹었다.

루슬란의 어머니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셔서 많은 대화를 할 수는 없었지만, 한국 김치를 좋아하신다며 나중에 루슬란과 함께 한국에 놀러가겠다고 하셨다.

안녕, 내 소중한 친구여

식사를 끝내고 어머니와 인사를 하곤 집에 남은 짐을 챙기러 갔다. 짐을 챙기고 떠날 준비를 하면서 루슬란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바이크 무게를 줄이느라 꼭 필요한 물건 말고는 다 버린 상태여서 줄만한 게 없었다. 결국 줄만한 선물을 찾지 못해 지갑에 있는 한화 5만원권과 1만원권, 1000원권을 선물로 줬다. 언젠가 한국에 왔을 때 이 돈으로 내가 있는 곳까지 택시를 타고 오라는 말과 함께.

짓궂은 장난도 많이 치고 과격하기도 하지만 루슬란은 정말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많은 친구인 것 같다. 영어를 잘 못하는 우리와 대화하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게 귀찮았을 텐데, 하나하나 챙겨주고 좋은 추억을 선물하려는 그가 정말 고마웠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충분히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덕분에 알았다. 그는 소중한 내 친구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제 떠난다는 게 슬펐다. 그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마 다시 만나기는 힘들겠지.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고, 삶도 서로 다르니까.

그의 집을 나와 가로등 불빛 아래 길을 따라 기차역으로 향했다. 헤어지는 게 아쉬운지 가는 내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차역에서 본 치타의 마지막 모습
 기차역에서 본 치타의 마지막 모습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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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에 도착해 이르쿠츠크로 가는 표를 샀다. 우리는 가장 싼 좌석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고, 루슬란은 2층 침대가 있는 좌석을 구해줬다.

이르쿠츠크까지는 기차로 꼬박 이틀이 걸린다. 그는 기차 안에서는 음식이 비싸니 미리 사서 들고가는 게 좋겠다며 우리를 마켓으로 데려갔다. 마켓에서 빵과 과자, 컵라면과 물 등 이틀 동안 먹을 음식들을 사고 플랫폼에서 말없이 기차를 기다렸다.

여행은 이별을 만든다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있는데 어느새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플렛폼에 들어왔다.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있는데 어느새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플렛폼에 들어왔다.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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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서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와 불빛이 보였다. 이제 정말 떠나야할 때다.

여행이 무조건 좋지만은 않다. 여행은 사람이든 장소든 이별을 만든다. 누군가와, 어딘가와 이별해야한다. 그리고 아주 오래 그 순간을 그리워하며 살아야한다. 그 순간의 행복을 위해 미래의 그리움을 감당해야하는 게 여행 아닐까.

기차는 어느새 정거장에 들어왔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린다. 루슬란은 우리에게 말레이시아 여행 때 산 행운의 팔찌라며 나무 조각들이 이어진 팔찌를 선물했다. 그와 한 번씩 포옹하고 서로 행운을 빌어줬다.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나길 바라며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긴 거리를 달린다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라탔다.

자투리 여행정보 17. 시베리아 횡단열차

시베리아 횡단열차(Транссибирская магистраль, 뜨란씨비르스카야 마기스트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를 연결하는, 단일 노선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다. 전 구간을 통과하는 데 7박 8일이 걸린다.

001M, 002M 등 숫자가 낮은 열차는 다른 러시아 열차보다 쾌적하고 빨리 달리지만 운임이 조금 더 비싸고, 099M, 100M 등 숫자가 높아질수록 시설이 낡았고, 느리고 정차하는 역도 많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타면 정말 할 게 없다. 와이파이는 당연히 안 되고, 현지인들의 핸드폰도 잘 터지는 구간이 많지 않다. 현지인들은 주로 책을 읽거나 승무원 몰래 술을 마신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온수기가 있어 라면 등을 먹을 수 있다. 중간 중간 정차할 때 역 앞에 노점에서 음식을 사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에도 게시 되었습니다.



태그:#모터사이클다이어리, #러시아, #시베리아횡단열차, #바이크, #세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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