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타이완(台灣)에는 국가를 대표하는 도시가 사방에 각각 하나씩 있다. 수도인 타이베이(台北)와 옛 수도인 타이난(台南), 두 도시 사이에 자리한 타이중(台中), 그리고 외따로 태평양에 면한 막내 타이둥(台東)까지, 모두 타이완의 앞 글자 '타이(台)'를 앞세우고 있다. 동서남북 중에 서쪽이 빠져있지만, 위치상 중서부 지방인 타이중을 '타이시(台西)'라 봐도 무방할 듯하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중국 대륙 코앞에 가시처럼 박힌 타이완령 진먼다오(金門島)가 곧 '타이시(台西)'라는 이야기도 있다. 도시의 규모로 따지자면 가오슝(高雄)이 타이베이 다음이지만, 타이완의 역사를 담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 '신도시' 가오슝은, 항구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앞의 도시들과는 달리 타이완의 유일한 국제 무역항으로, 우리로 치면 부산과 같은 도시다.

'국가대표 도시' 네 곳 중 세 곳은 시내 인구만 100만 명이 훌쩍 넘는 대도시지만, 유일하게 타이둥만은 도시가 관할하는 현의 인구까지 모두 합해도 23만 명(2015년 기준)이 채 안 된다. 고속철도로 서로 연결되어 1시간 남짓이면 오갈 수 있는 세 곳과는 달리, 타이둥은 고속철도는커녕 일반 기차편마저 여의치 않다. 편수도 적을 뿐더러 가자면 한나절이 소요된다.

기차는 하루 세 번뿐, 예약은 필수

그나마 타이완의 관문인 수도 타이베이에서 타이둥을 연결하는 직통버스 노선은 아예 없다. 타이둥에 다녀온 많은 여행자들이 차라리 요금이 비교적 저렴한 국내 항공편을 이용하는 게 낫다고 권하는 이유다. 항공편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타이베이에서 타이둥에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일단 가오슝까지 고속열차로 갔다가 타이둥 행 기차 편을 갈아타는 것이다. 그마저 하루 세 편뿐이라 예약은 당연 필수다.

이렇듯 타이둥이 소외된 이유는 타이완을 남북 방향으로 막아선 거대한 산줄기 탓이다. 철도든 도로든 동서를 관통하는 길이 없어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든 남쪽으로든 반 바퀴를 돌아야만 가닿을 수 있다. 타이둥의 다른 이름이 '후산(後山)'이고, 그 의미가 '산 너머'이고 보면, 타이완에서 얼마나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인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타이둥 시내에서 해안선을 따라 50km 남짓 거리를 왕복운행하는 버스노선이 있는데, 어느 곳에서 내려도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태평양을 마주할 수 있다.
▲ 소수민족촌에서 내려다본 태평양 타이둥 시내에서 해안선을 따라 50km 남짓 거리를 왕복운행하는 버스노선이 있는데, 어느 곳에서 내려도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태평양을 마주할 수 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천신만고 끝에 타이둥에 도착한 건 밤 9시가 다 되어서였다. 고도(古都) 타이난의 매력에 빠져 지나치게 여유를 부린 탓일까, 기차 편을 예약하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출발 이틀 전이었는데도 이미 좌석이 매진되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타이난에서 가오슝을 거쳐 타이둥으로 가는 기차가 하루에 고작 세 편뿐이라는 사실을, 예약하러 간 그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곧장 타이난 기차 역 근처의 장거리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가 버스 편을 알아봤지만, 그 또한 허사였다. 남쪽으로 가는 버스 편은 아예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원은 오로지 타이중이나 타이베이 등 북쪽 도시를 연결하는 버스 노선만 운영한다면서, 우선 가오슝으로 통근열차를 타고 간 뒤, 버스든 기차든 타이둥으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결국 하루를 길에서 고스란히 허비한 셈이 됐지만, 천만다행으로 가오슝에서 타이둥으로 떠나는 마지막 기차 편 좌석이 몇 장 남아 있었다. 밤 기차 안은 유독 외국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표정으로 보아 그들에게도 타이둥 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도착하기도 전에 타이둥은 여행자들의 발길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 새침떼기 같은 도시로 각인됐다.

하지만 타이둥은 그러한 교통의 불편함을 몇 갑절로 되갚아주는 엄청난 매력을 지닌 도시였다. 어떤 목적으로 찾았든 모두 만족해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타이둥 시내와 주변을 여행하다 보면, 타이완의 다양한 문화를 이해할 수 있고, 일망무제 태평양을 가슴에 담을 수도 있으며,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는 축제와 예술의 힘을 절감하는 기회도 갖게 된다.

새벽 5시, 열기구가 뜹니다

우선, 타이둥은 대륙에서 건너온 중국인들에 터전을 빼앗기고 밀려난 원주민들이 많이 사는 도시다. 소수민족이 전체 주민의 35% 정도를 차지하는데, 타이완 내에서는 인접한 '화리엔(花蓮) 현'과 더불어 단연 압도적인 수치다. 그래선지 도시의 공기도 타이완 내 다른 곳과는 사뭇 다르다. 어떤 이는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의 어느 도시에 온 듯한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실제로도 타이완의 고대 문화를 이야기할 때, 중국 대륙보다 필리핀과 오키나와, 팔라완 등 오세아니아 여러 섬들과의 관련성이 먼저 거론된다. 의식주 등 문화적 특징이 인접한 중국이나 우리나라보다 저 멀리 인도양 너머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와 더 유사하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 타이완에서 그러한 주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곳 타이둥이다.

아메이 족은 타이둥 지역의 대표적인 소수민족으로,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두 차례씩 무료 공연을 연다.
▲ 아메이 족의 전통 공연 아메이 족은 타이둥 지역의 대표적인 소수민족으로,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두 차례씩 무료 공연을 연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인터넷을 비롯한 교통통신의 발달로 지방색을 유지하기 힘든 시대라지만, 지금껏 타이둥만의 독특한 문화를 보전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고 있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소수민족인 '아메이(阿美)족'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매일 전통 공연을 선보이는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참고로, 아메이족 전통 공연은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두 차례씩 관람료 없이 진행된다.

한편, 타이둥만의 지리적 환경을 활용한 행사가 세계적인 축제로 발돋움한 사례도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여름철 타이둥의 '여명'과 '황혼'을 밝히며 타이완을 넘어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열기구 축제'다. 매년 6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해가 뜨는 새벽녘과 해지는 저녁 시간 때에 매일 두 번씩 타이둥의 하늘엔 동화의 한 장면처럼 열기구가 뜬다.

2011년 시작된 이 축제는 시작된 지 서너 해만에 타이둥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조용하던 소도시의 여름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민관의 협력을 기반으로 일궈낸 사례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에워싸여 바람이 약한 타이둥 인근 '루예(鹿野)'의 고원지대를 무대로 한 이 축제는 한 촌로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본디 루예 고원은 퇴락한 비행장 터였는데, 열기구가 뜨면서 덩달아 타이완 레포츠의 성지로 부상했다. 동이 트는 새벽녘에 열기구를 타고 오르면, 눈앞으로 타이완의 육중한 산맥과,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광활한 태평양이 동시에 펼쳐진다. 열기구 축제를 처음 기획할 때의 프로젝트 이름이 왜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이튿날,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새벽 3시에 눈을 떴다. 4시 10분에 버스터미널에서 셔틀버스가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 새벽에 누가 갈까 싶었지만, 이미 승강장에는 줄이 길었다. 행사장까지는 타이둥에서 버스로 1시간, 창밖으로 여명이 밝아왔다. 공기 주입을 기다리는 알록달록한 열기구들과 경사진 풀밭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관광객들로 행사장은 일찌감치 만원이었다.

그저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디자인의 열기구들의 비상을 구경하는 것일 뿐인데도, 한 해 수십 만 명의 관광객이 타이둥을 찾아온다. 사실 타이둥의 여름은 유난히 무덥고 습해서 1년 중 비수기로 친다. 하지만 열기구 축제가 인기를 끌면서 그러한 기후로 인한 제약은 의미를 잃었고, 적어도 타이둥 여행의 성수기와 비수기 구분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정각 새벽 5시, 열기구 축제가 열리는 현장의 모습이다. 각자 돗자리까지 준비해 비탈진 풀밭에 삼삼오오 모여 앉았는데, 그 앞으로 다양한 형태의 열기구가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 열기구 축제를 보기 위해 모인 관광객들 정각 새벽 5시, 열기구 축제가 열리는 현장의 모습이다. 각자 돗자리까지 준비해 비탈진 풀밭에 삼삼오오 모여 앉았는데, 그 앞으로 다양한 형태의 열기구가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열기구가 하나둘씩 떠오르자 일제히 눌러대는 관광객들의 셔터 소리가 함성소리처럼 크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동녘의 해처럼 비상하는 둥근 열기구들의 모습은 웅장하면서도 선명해 마치 컴퓨터 그래픽의 가상 화면 같은 착각이 든다. 관광객들을 위한 변변한 편의 시설 하나 없는 황량한 벌판이지만, 저토록 많은 관광객들이 꼭두새벽부터 이곳을 찾는 이유를 알 만하다.

소수민족의 삶과 열기구 축제, 이것만으로 타이둥을 다 봤다고 할 수 없다. 다음에 이어질 글에서도 잠깐 다루겠지만, 타이둥은 타이완의 '오래된 미래'를 가장 잘 보여주는 도시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에다 주민들의 순박한 정서, 다른 곳에서는 맛보기 힘든 지방색 도드라진 음식 등 타이둥을 찾아야하는 이유는 숱하다.

그나저나 최근 우리나라에서 한 해 타이완을 찾는 여행자 수가 100만 명을 넘었다는 통계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대부분 수도인 타이베이 주변과 멀어야 아리산과 타이난 근교를 둘러보는 여정으로, 타이둥까지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 타이베이에 산 너머 타이둥까지 여정에 포함시키자면 여행기간을 족히 3~4일은 더 늘려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이둥은 동남쪽 궁벽한 곳일지언정 타이완을 찾는다면 계절과 상관없이 한 번쯤 욕심을 내볼 만한 곳이다. 아마도 타이둥을 만나지 못했다면 타이완을 여행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게 될 날이 조만간 올 것만 같다.

여름 열기구 축제는 처음 시작된 지 서너 해만에 한 해 수십 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타이둥을 대표하는 얼굴로 자리 잡았다.
▲ 하늘로 비상하는 열기구들의 모습 여름 열기구 축제는 처음 시작된 지 서너 해만에 한 해 수십 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타이둥을 대표하는 얼굴로 자리 잡았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태그:#타이완 여행, #타이둥, #소수민족, #열기구 축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