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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근은 한양 북문 밖 삼계동에 별업(別業)이 있었다. 서울에서 제일가는 명원(名園)이었다. 흥선대원군이 그것을 팔라고 청했으나 김흥근은 듣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이 다시 청하며 "하루만 놀게 빌려 달라"고 했다. 대개 원정(園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남들이 놀이에 빌려달라고 하면 부득불 허락하는 것이 당시 서울의 옛 풍속이었다. 김흥근이 마지못해 허락하자 흥선대원군은 마침내 임금에게 행차할 것을 권하여 모시고 갔다. 그 후 김흥근은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았다. 임금의 발길이 머문 곳을 신하된 도리로 감히 거처할 수 없어서였다. 그리하여 삼계동 별업은 마침내 운현궁의 소유가 되었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흥선대원군이 탐이 나서 빼앗을 정도로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의 정원은 서울 제일의 명원이었다. 여기서 말한 김흥근의 별업(별서)이 지금의 석파정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흥선대원군과 김흥근의 질긴 악연을 엿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왜 이곳을 빼앗았고 김흥근은 어찌해서 빼앗길 수밖에 없었을까. 그 내막을 좀 더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흔히 조선 말기에 세도정치를 일삼았다고 알고 있는 안동 김씨, 그중 장동 김씨에 대해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좀 더 살펴보자.

석파정 전경 건너편 석탑에서 본 석파정 풍경이 그윽하다.
▲ 석파정 전경 건너편 석탑에서 본 석파정 풍경이 그윽하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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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근과 흥선대원군

장동 김씨는 어떤 가문이었을까. 사실 장동 김씨의 선대는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 문곡 김수항, 몽와 김창집 등으로 모두 당대를 주름잡았던 덕망과 명망이 있는 인물들로 가득했다. 장동 김씨라 불린 것은 김조순 때에 이르러서였다.

김창집의 5대손인 김흥근에게 김조순은 당숙(5촌)이었다. 김조순은 글에 능했고 일처리가 능란하며 후덕하다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그의 자손 대에 이르러 탐욕과 교만, 사치에 빠져 외척으로 나라를 망치는 화근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오직 '장김'을 알아도 국가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한다고들 했다.

김조순이 예전에 살았던 곳은 경복궁 북쪽 창의문 아래 자하동(紫霞洞)이었다. 지금의 종로구 효자동, 창성동 일대이다. 자하동은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있어 계곡과 숲이 그윽하고 고요하여 성 안과 비할 수 없이 좋았다.

자하동을 줄여 '자동'이라 부르기도 하고, 빨리 불러 '장동(壯洞)'이라고도 했다. 김조순이 임금의 장인이 되어 조정의 권세를 잡고 장동에서 교동으로 이사를 했다. 이때부터 국권을 쥐고서 3대에 걸쳐 국혼을 맺었는데, 외척이 이토록 번성한 적은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없었다. 이 때문에 안동 김씨를 '장김(壯金, 장동 김씨)'이라고 했다.

석파정 원래 일고여덟 채로 사랑채와 안채, 별채와 별당, 중국풍의 정자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중 4개 동이 남아 있다.
▲ 석파정 원래 일고여덟 채로 사랑채와 안채, 별채와 별당, 중국풍의 정자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중 4개 동이 남아 있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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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근은 헌종 때만 해도 극력 간언을 하다가 귀양을 가고, 왕이 일곱 번을 불러도 나아가지 않아 장동 김씨 중에 명성이 높아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얼마 안 되어 조정에 나아간 후에는 관직을 사양한 적이 없었고, 철종 때 영의정까지 오르는 등 여러 번 재상에 올랐으나 별반 뛰어난 일을 하지 못했다.

고종을 임금으로 옹립할 때만 해도 김흥근과 흥선군의 관계에는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철종이 승하했을 때의 일이다. 철종은 후사가 없었다. 철종은 일찍이 지금의 임금(고종)에게 뜻을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장동 김씨들이 그를 옹립하려고 애를 썼다. 이때 김흥근이 말하기를, "흥선군이 있으니 두 임금이 있는 것과 다름없다. 두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차라리 흥선군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석파정 소수운렴암에서 본 석파정 계곡 풍경
▲ 석파정 소수운렴암에서 본 석파정 계곡 풍경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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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이후 흥선대원군이 김흥근을 원수로 여기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때는 갑자년인 1864년(고종 원년)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점차 정권을 잡으려고 하자 김흥근은 조정에서 드러내놓고 말하기를, "예로부터 국왕의 아버지는 정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며 사제(私第, 개인 소유의 집)로 돌아가 종신토록 부귀를 잃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했다.

흥선대원군은 이때부터 장동 김씨들 중에서도 김흥근을 가장 미워하게 되었고, 이후 김흥근이 소유한 땅 수십 경(頃)을 빼앗았다고 한다. 이것을 시작으로 대원군은 김흥근이 소유하고 있던 이름난 별서마저 고종을 대동하는 수를 써서 빼앗고 말았으니 석파정이 단순히 개인 간의 단순한 소유권 이전이 아닌 여러 정치사회적인 상황에 맞물려 있었다는 걸 당시 시대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석파정

석파정은 원래 김흥근이 소유할 때만 해도 집 뒤에 '三溪洞'(삼계동)이라고 새긴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로 불렸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의 별서를 빼앗은 뒤에 그곳을 '석파정(石坡亭)'이라 불렀다. '석파'는 앞산이 모두 바위[石] 언덕[坡]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석파라는 대원군의 호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삼계동 바위 각자 석파정은 원래 김흥근이 소유할 때만 해도 집 뒤에 ‘三溪洞’(삼계동)이라고 새긴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로 불렸다
▲ 삼계동 바위 각자 석파정은 원래 김흥근이 소유할 때만 해도 집 뒤에 ‘三溪洞’(삼계동)이라고 새긴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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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곳에는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인 오재 조정만(趙正萬, 1656~1739)의 별장인 소운암(巢雲庵)이 있었던 곳이다. 조정만의 자는 정이(定而)이다. 지금도 석파정에 가면 계곡가 너럭바위에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이라고 새긴 글자를 발견할 수 있다. 가로로 쓴 "소수운렴암"은 "물을 울로 삼고 구름을 발로 삼은 암자"라는 뜻이다.

그 옆에 세로로 "한수옹서증 우인정이시 신축세야(漢水翁書贈 友人定而時 辛丑歲也)"라는 글씨를 볼 수 있다. "한수재 권상하(寒水齋 權尙夏, 1641~1721)가 벗 정이(定而)에게 글을 써 준 것으로 때는 신축년(경종 1년, 1721년)"이라는 뜻이다.

권상하는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수제자였다. 옛 서울의 이름난 경승지로 손꼽히던 자하문 밖 이곳의 빼어난 산수와 아름다운 경관을 '소수운렴암'이라는 다섯 글자로 응축하여 새긴 것이다. 이 조정만의 소운암을 김흥근이 인수하여 별서로 삼았고 나중에 흥선대원군이 소유하여 석파정이 되었다.

소수운렴암 바위 각자 지금도 석파정에 가면 계곡가 너럭바위에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이라고 새긴 글자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옆에 세로로 “한수옹서증 우인정이시 신축세야(漢水翁書贈 友人定而時 辛丑歲也)”라는 글씨를 볼 수 있다.
▲ 소수운렴암 바위 각자 지금도 석파정에 가면 계곡가 너럭바위에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이라고 새긴 글자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옆에 세로로 “한수옹서증 우인정이시 신축세야(漢水翁書贈 友人定而時 辛丑歲也)”라는 글씨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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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은 누가 언제 본격적으로 원정을 조성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1815년에 조성된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옥호정과 비슷한 용도로 장안의 별서로 조성됐다. 건물은 원래 일고여덟 채로 사랑채와 안채, 별채와 별당, 중국풍의 정자 등으로 구성됐으며 각기 안태각(安泰閣)·낙안당(樂安堂)·망원정(望遠亭)·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風樓) 등의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은 <석파정도 병풍>에서 볼 수 있는 옛 건물들이 모두 남아 있진 않지만 그중 4개 동이 남아 있어 옛사람들의 풍류와 예술적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유수성중관풍루 석파정 깊숙이 있는 중국풍의 정자로 특히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다. 다음 편에서 소개 예정
▲ 유수성중관풍루 석파정 깊숙이 있는 중국풍의 정자로 특히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다. 다음 편에서 소개 예정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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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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