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나는 급성 맹장염에 걸렸다. 임신 3개월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태아가 걱정스러웠지만, 나는 수술실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곧 맹장이 터질 지도 모를 위험한 순간이었다.

맹장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나에게는 어려운 숙제가 주어졌다. 수술 과정 중 의료상의 문제로 임신중절수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소견을 전해들은 상태였다. 태아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잔인한 선택지를 받아든 나의 시야에는 세상이 온통 희뿌옇게 보였다.

합법적인 낙태수술이라고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동안 나는 낙태에 대해 줄곧 반대해 왔다. 그런데 막상 낙태를 선택해야하는 입장이고 보니, 막막하기만 했다. 합법적인 낙태 수술도 이리 괴로운데, 불법의 낙인을 감수하고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마음은 오죽할까.
"한국 정부는 낙태를 음성적으로 권장하던 시기에도, 낙태금지를 실질적으로 고려하는 시기에도 계속해서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관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사결정 과정에서 당사자인 여성은 항상 배제되었습니다. 이 예민하고도 복잡한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고 싶다면, 여성이 왜 낙태를 선택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그 고통스러운 당사자의 목소리에 차분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시작일 것입니다."


몸은 정직하다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우리 사회 전반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문제들이 인간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연구 분석한다. 낙태에 대해 저자는 합법적이고 안전한 임신중절수술이 여성의 건강문제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밝힌다. 1989년 혁명으로 낙태금지법이 철폐된 루마니아의 모성 사망비가 그전보다 절반 수준으로 감소됐다는 통계자료를 제시한다. 저자는 사회 법망을 피해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몸에 가해지는 위험부터 먼저 고민해볼 문제라고 말한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집으로 돌아온 나의 몸은 급격하게 쇠락해졌다. 배우자와 함께 고민해 내린 진지하고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임신중절수술에 대해서는 선뜻 지인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어쩔 수 없는 사고임을 알면서도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다. 저자는 말하지 못한 상처의 기억들은 인간의 몸에 새겨진다고 말한다.

"우리 몸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때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그 상처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몸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


스며든다는 것, 나는 그것의 위력에 대해 절감했다. 나의 의식 속에 스며든 낙태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들 때문에 나는 밤잠을 설쳤다. '낙태는 살인 행위야'라는 문장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때 알았다. 사회적인 환경과 내 삶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것을. 사회적인 시선과 나의 의식세계는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는 것을.

만약 내 삶의 문제로 주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낙태를 도덕과 비도덕의 문제 정도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 여자에게 낙태는 몸과 마음으로 겪는 상처였다. 육체적 고통 못지않게 정신적 아픔도 뒤따랐다. 단순히 도덕적 잣대로만 판단할 문제는 아니었다.

인간의 삶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무분별한 정리 해고 이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삶을 연구한 결과는 참담했다. 2009년에 조사한 파업 참가 노동자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유병률'은 걸프전에 참여했던 군인들의 유병률보다 더 높게 나타났다.

소방공무원들 10명 중 4명이 추간판탈출증(디스크)의 진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울증과 수면장애로 고통을 겪었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가 아픈데도 참고 일한 경험이 원청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2배 이상 더 많았다. 직장 내에서 일하다가 다쳐도 그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거나, 집단의 성과를 위해 재해를 숨겨야 하는 조직 사회의 폭력 속에서 우리의 건강은 위협받고 있다.

건강과 공동체의 관계

이 책의 저자가 사회 곳곳을 누비며 찾아가는 현장은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이다.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학문"인 사회역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저자는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삶을 기록하고 분석한다. 인간의 건강을 개인적인 문제로만 돌리지 않고,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며, 어떤 사회여야 건강한 삶의 기초가 마련되는지를 질문한다.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좌절감을 느끼지 않도록 우리 사회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나요. 위험한 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금연에 실패한다면, 그 원인은 개인의 의지 부족일까요 아니면 금연 의지를 좌절시키는 위험한 작업 환경일까요. 한국사회에서 또다시 쌍용자동차와 같은 대규모의 정리해고가 발생한다면 참사로 이어지지 않을 정책적 대안은 갖고 있을까요.

위험 사회의 불안과 문제들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속으로 스며든다. 그 스며듦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어떤 흔적들을 남긴다. 낙인과 차별의 정서가 쌓여 우울증과 자살률로 이어지고 심근경색 같은 돌연사의 병증으로 발전한다. 인간의 삶의 기초는 건강한 사회 구조에서 시작된다.

올해 한반도의 여름은 폭염의 기록을 갈아치울 기세로 펄펄 끓고 있다. 정부가 폭염을 자연재해로 규정한다는 방침을 내린 이즈음, 폭염을 극복한 미국 시카고 시민들의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1995년 7월 폭염으로 700여 명이 사망한 미국 시카고에 다시 폭염이 찾아온 것은 2년 뒤인 1999년이었다. 그해 사망자 수는 110여 명으로 대폭 감소했다.

시카고 폭염재난 이후의 연구 결과로 사망자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임을 알아냈다. 또한 그 지역의 불안한 치안 문제가 고립의 주된 원인임을 파악했다. 준비된 사람들에게 자연 재해는 더 이상 속수무책의 재난이 아니었다. 시카고에 폭염이 다시 찾아왔을 때 34곳의 쿨링 센터를 설치하고 쿨링센터까지 운행하는 무료셔틀 버스를 시민들에게 제공했다. 이동이 불편한 사람들을 일일이 가정 방문해 건강상태를 확인했다. 폭염의 사회적 원인을 찾아 대책을 마련한 행정기관과 이에 협조한 시민들이 이룬 값진 성과였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가 위기에 빠진 나를 구해주리라는 믿음이 사라진 불안한 이 시대에, 이 책은 한 여름 밤의 반딧불이처럼 세상 밖으로 찾아왔다. 시대의 어둠을 기록한다는 것. 이 책을 통해 누군가는 그 기록을 읽고 사유한다는 것. 그런 작은 불빛들이 모여 아름다운 세상을 밝힌다는 믿음을 되새겼던 시간들이었다.

아픔이 길이 되기도 어렵지만, 아픔 없이는 어떤 한 자락의 길도 닦여지지 않는다는 진실을 확인했다. 법과 제도의 모순에 빠진 힘없는 사람들의 저항이 없었다면 역사는 진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자의 슬픔에 선을 긋지 않는 것. 그 공감의 연대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인다. 부디 나의 혹은 당신의 아니면 우리의 아픔이 길이 될 수 있기를….


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동아시아(2017)


태그:#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